특별히 색이나 모양이 다르다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떴던 나는, 이내 담담히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좀 놀라긴 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어쨌든, 멀쩡히 살아 있긴 하다니까.
‘전과 그대로라면, 현실 세상의 내 몸은 아직 살아 있는 거겠지.’
망할 GM 놈들이지만, 그들이 말한 대로 보상은 확실했다.
나는 아마, 이 상태로 계속 이 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큰아버지가 또 내 병 수발을 들고 있을지도.
그 생각을 하자, 잠깐 울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빠르게 털어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 이제 앞으론…… 계속 쭉 볼 수 있는 거죠?”
내가 또 사라질까 두려웠던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니세가 불쑥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안심한 니세가 마지막으로 떠나고, 황태자의 집무실에는 나와 카셀만이 남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카셀은 아까 전부터 고요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카셀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듯 나를 돌아보았다.
“뭐가?”
“제 모습이요.”
“모습이 왜.”
“……예전이랑은 많이 달라졌잖아요.”
아닌 척했지만, 나는 그와 재회한 후 내내 의기소침했다.
외모로 따지자면 예전에 코스튬을 한 모습이 훨씬 나은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리고 다니긴 했지만, 누구나 감탄하던 절세 미녀에서 평범한 내 모습으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왜 저런 여자를…….”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그렇지. 너무 평범하지 않나?”
솔직히 나를 향한 쑥덕임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어쩌면 이건 모두 다 저 요망한 얼굴 때문일지 모른다.
‘좀 덜 잘생겨 먹을 것이지. 왜 그렇게 퇴폐미 쩌는 섹시한 미남처럼 생겨 먹어선…….’
못마땅한 눈으로 그 낯짝을 흘겨보는데.
“허.”
별안간 그가 코웃음을 쳤다.
“외모에 좌지우지될 애송이였으면, 암시장에서 경매로 약 올리는 일도 없었겠지.”
깜빡 잊고 있었다.
처음으로 로브를 벗고 카셀을 마주했던 곳이 바로 암시장이라는 걸.
그때를 떠올린 나는 눈에 불을 켜고 그를 노려봤다.
“읏…… 그때, 일부러 그런 거죠? 내 500만 코인!”
“남의 이름 사용한 값은 물어야 하지 않나? 무려 연인으로 팔아먹었으면서. 그나마 500만으로 싸게 쳐준 걸 감사히 여기도록 해,”
“…….”
“다른 놈들이었으면, 목숨으로 값을 치렀을 거야.”
그 무시무시한 말에 나는 곧 입을 다물고 숙연해졌다.
노예상에게 [악몽의 군주]의 연인이라고 거짓말 치는 장면을 당사자가 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찔끔해서 시선을 피하는 내게, 카셀이 짓궂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처음부터 얼굴에 흉터가 있다는 말 따윈 믿지 않았다. ”
그 말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 어, 어떻게…….”
“기억 안 나나? 도버 마을에서 압송되던 나한테 돌 대신 포션 던지던 때 말이야.”
“…….”
“맨 처음에는 로브도 안 쓰고 당당하게 던졌잖나.”
그의 말에 나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무, 무슨…… 맨 처음이요?”
“그래. 그 이후로 회귀할 때마다 네게 포션 병을 얻어맞은 횟수가 거의 300번에 육박하는데, 첨탑에서 보자마자 안 죽인 걸 다행으로 알아.”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300번이라뇨?”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다급히 되물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하지만 카셀은 그런 나를 비웃을 뿐, 알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300번이라니. 내가 갇혔던 건 고작 2년…… 헉.’
혼란에 잠긴 채 그의 말을 곱씹던 나는 별안간 헛숨을 들이켰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고작 2년을 살았던 게 아니란 걸.
11살 때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몇 달간, 나는 이곳에서 거의 평생을 NPC로 살았다.
이 세계와 관계없는 이방인이었기에, 늙지도 죽지도 않은 채.
세상이 멸망하든, 카셀이 다시 회귀하든, 새로운 유저들이 찾아오든.
계속, 계속,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그래도 그 당시에 그대가 호송되던 카셀에게 던진 포션은 획기적인 아이디어이긴 했다네.”
“그 후로부터, 이방인들이 카셀과 친해지도록 필수적인 코스로 집어넣었으니 말일세!”
불현듯 세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 설마…….”
카셀은 그럼 그걸 다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희게 질린 얼굴로 카셀을 돌아보자, 그가 섬뜩하게 웃었다.
“이제 기억이 좀 나나 보지?”
“…….”
“처음엔 긴가민가했다. 내게 몇 번이나 포션병을 던지고 그대로 사라지던 자가, 갑자기 도와주겠답시고 첨탑까지 찾아올 줄이야.”
카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더더욱 창백해졌다.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로 암살자라고 의심할 법도 했잖아.’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카셀이 그때를 줄줄 회상했다.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됐나. 하지만 300번이나 그 꼴을 봤으니, 그럴 리 없을 테고…….”
“…….”
“갑자기 귀신이라도 씌었나 보다, 했었지.”
“허…….”
그 말에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랬던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외모와 같은 하잘것없는 이유로 그의 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죄송해요.”
“알면 됐어.”
한숨처럼 중얼거리자, 그가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나는 그 태도에 감히 불만을 품지 못했다.
한동안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래서.”
이번엔 카셀이 내게 물었다.
“떨거지 같은 놈들에게 샤리 아즈라엘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도 끝났고.”
“떨거지…….”
“이제 뭘 할거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일전에 현실로 돌아가면 할 것들에 대해선 잔뜩 생각해 뒀었는데…….
이곳에서 이제 뭘 해 먹고 살지에 관해서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우선…….”
나는 고심 끝에 조심스럽게 답했다.
“약초밭을 가꿔 보려고요.”
“약초밭?”
“네. 생각보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현실에서 회사에 다닐 때도 그렇고, 여기서 NPC 노릇하며 살 때도 그렇고.
그렇게 죽어라 농사일을 한 걸 보면,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솔직히 이런 말을 하면 카셀이 비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황궁의 약초밭을 모두 비워두라 해야겠군.”
퍽 진지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동공이 흔들렸다.
“네? 그,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왜. 황태자 궁의 정원도 밀라고 시킬까?”
“아니요!”
나는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키며 꽥 소리쳤다.
안 그래도 황궁의 모두가 나를 시시각각 주목하는데.
여기서 더 씹을 거리를 제공하는 건 사양이었다.
“황궁에서 할 생각은 없어요.”
황급히 부정하자, 이번엔 카셀이 느슨한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번뜩였다.
“그럼. 이제 집도 절도 없으면서, 어디서 하려고.”
“집도 절도 없다니요. 제가 왜…….”
곧장 반박하던 나는, 곧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토벌을 떠나기 전, 내 재산은 모두 일레인을 포함한 엘프들에게 넘겨서 나는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이었다.
‘망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나는, 승리한 것처럼 기세등등해진 카셀을 흘겨보았다.
“……그러는 전하는 이제 뭐 할 건데요.”
비겁하지만, 일단 후퇴한다.
황급히 말을 돌리자, 다행히도 카셀이 고심하기 시작했다.
“잠깐 이리 와봐.”
한참 후, 그가 내게 손짓하며 몸을 숙였다.
소리를 죽여 은밀한 얘기를 하려는 듯 보였기에, 나는 순순히 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그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일단…….”
“…….”
“입이나 맞춰 볼까.”
“네?!”
귓바퀴의 민감한 부분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나는 화들짝 놀라 기울였던 몸을 바로 했다.
“대, 대낮부터, 그, 그, 무슨…….”
“왜. 공주의 키스로 왕자의 저주가 풀렸는지 이제 진짜로 시험해 봐야 할 거 아니야.”
기겁하는 내 반응을 본 그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나는 놈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리르의 서재에 있을 때 나눴던 동화 이야기였다.
“입 맞춰 봐.”
“혹시 모르지. 그대의 키스로 내게 걸린 저주가 풀려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그와 동시에, 내가 그에게 저질렀던 만행이 떠올랐다.
단검으로 스스로를 찌르기 전,
정신을 잃은 그에게…….
“먼저 도둑 키스하고 도망갈 땐 언제고.”
같은 때를 떠올리는 건지, 카셀이 별안간 웃음을 지우고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니, 아니야! 안 했거든요?!”
나는 펄쩍 뛰며 부정했다.
거울로 보지 않아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도둑 키스’란 말 때문일까.
서재 외에도, 포션을 먹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 맞췄던 순간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 진짜예요! 제, 제가 그런 파렴치한 사람으로 보여……!”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러나 팔까지 허우적거리며 결사적으로 부정하던 내 주장은, 얼굴을 감싸 쥐는 커다란 손에 의해 무의미하게 일단락됐다.
“눈이나 감아.”
이윽고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틀어막았다.
밀려들어 오는 남자를 맥없이 받아들이던 나는, 비로소 눈을 감으며 한탄했다.
아, 내 모든 무덤은.
다 내 손으로 판 거였구나…….
<망겜 속에 갇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