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노인
가게는 한가했다.
문을 열었지만 늘 오던 몇명 정도를 제외하면 손님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개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내가 홍보를 그다지 하지 않기도 했으니 누구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적당한 여유가 내게 가벼운 안정감을 주었다.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도 있어서
여차하면 가게째로 데니스에게 넘겨주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되도록이면 그럴 일이 없는게 제일 좋기야 하겠지만.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는 주방 옆에 만들어둔
조그마한 단칸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포션을 개발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나는 약품을 섞고 효과를 연구하고 기록을 남기는 등의 작업을 한다.
이곳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하루 대다수의 시간을 투자했지만,
콜린으로 이주해오고 나서는 그럴 시간이 상당히 부족해 진 것도 사실이다.
손님이 오지 않는 이런 자투리 시간을 내서 조금씩 연구하는게
지금의 일상이다.
손님들에게 내준 포션, 그러니까 14호TAG라거나 RIC-9호, 6번-7호 APV같은
오늘의 메뉴들은 사실 이전에 연구해온 것들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
콜린에 가게를 세운 이후로는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지 않았다.
이미 효과가 어느정도 검증된 것들은 손님이 찾지 않으면 더 팔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풀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고, 풀 때 가치가 있다.
이미 해답이 나온 문제를 더 붙들고 있어봐야 의미는 없을 것이다.
포션의 연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한두시간만에 간단히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나도 참 좋겠지만,
재료를 가공하고 배합하는 것이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을 활용하지 않으면 신메뉴는 그만큼 더 늦어질 것이다.
효과를 생각하고 만들 것인지, 맛을 생각하고 만들것인지.
그건 지금의 내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이전보다 고려할 것이 늘었다는 이야기다.
산 속에서 연구하던 때는 다소 맛이 없어도 실험 대상이 나였기에
그저 마시고 효과만을 확인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상이 내가 아닌 타인 다수로 확대되면서
맛은 그들의 재방문, 즉 피험체의 상태 진행경과를 지켜볼 수 있는가 아닌가의
중요한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는 없었다.
포션을 만들면서 맛을 생각한다니.
언어도단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래도 그렇게 변화하는 것도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고나니
지금의 나를 욕할 사람들은 과거의 연금술사 연합 외에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 연금술사들은 비밀 조직이었고
국가에서도 정식 직종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지라
포션도 그런 식으로 진화하는게 당연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조직들도 찾아보기 어려울 뿐더러,
포션을 사람들에게 내놓는 방식으로 나는 내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거였으니까
마땅한 변화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포션 배합이 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당연히 포션 하나의 성공을 위해서는 수 개월의 시간이 들어간다.
조금의 비율차이, 조금의 가열차이가 성패를 좌우하고 포션의 종류를 좌우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체헤게로부터 신호가 온다.
[손님이다.]
[갈게.]
방 문을 열고 나오면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노파가 왔다.
허리가 한껏 구부러진 노파는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 영업을 안하는 줄 알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반가워요."
"어서오세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에스테리카로 부탁해요."
노파는 테이블을 살포시 끌어 앉았다.
힘이 부족한건지 의자를 당기지 못하고 테이블에 거리를 두고 있다.
체헤게가 의자를 잡아 앞으로 밀어주자 노파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말했다.
"어머, 고마워요. 친절한 사람."
체헤게는 대답 대신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이 가게는 참 좋네요.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내 이름은 로라에요. 반가워요."
"기억해둘게요."
"이 카페에는 처음 와 보는데, 생각보다 가격표가 많이 저렴하네요."
"돈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라서요."
"나도 예전에는 그렇게 순수하게 일하는게 좋았을 때가 있었어요."
"어떤 일을 하셨나요?"
"혹시 알고 있나요? 사설 도우미를 했답니다."
"사설 도우미? 죄송해요, 처음 듣네요."
"내가 꼭 아가씨 나이 정도였을 때, 나는 엠페레스 왕국에 살았답니다."
"엠페레스면 텔레프란 대륙인가요?"
"그래요, 나이를 먹고 이곳으로 이민을 왔어요.
엠페레스도 물론 살기 좋은 국가였지만..."
"결국 왕조가 수도 없이 바뀌는 국가였죠?"
"그래요. 내가 있었을 때는 그나마 살만한 국가였는데 말이죠."
"격동의 시기를 지내오신거군요."
"그렇게 말할수도 있겠네요. 후후, 아가씨는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에리아에요.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래도 된다면야, 꼭 손녀딸을 보는 기분이구나. 호호..."
"손녀딸이요?"
"그래, 내 아들내미는 철이 없었어. 젊을 때에 모험가를 하겠다며
유레크로스로 떠났단다. 겁이 없었지. 나는 말렸지만 기어이 가겠다고 했어.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적어도 손주 얼굴 정도는 보여주고 가길 바랐는데.
그렇게 그 아이는 모험가가 되었단다. 상당한 실력자였어.
5급 모험가가 되었다며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내게 안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아들을 믿어주지 못했던걸 후회했지.
그리고 그 다음 해에, 안카 숲을 넘으려고 한 한 상인이 우리 아들을 고용했어.
아들은 자신만만하게, 이번 일은 보수가 세다고 좋아하며 돌아오면
꼭 같이 유레크로스로 이사를 가자고 했단다. 그게 마지막이었어."
"아..."
"괜찮아. 이제는 오래된 옛 이야기란다."
"이거, 주문하신 에스테리카에요."
"그래, 고맙구나."
로라는 에스테리카를 바라보며 가볍게 후후 불었다.
"종종 와도 괜찮겠니? 집에서는 외로워서 말이야."
"네. 언제든요. 자리가 많이 남거든요."
"그래, 호호... 착한 아이로구나.
너같이 젊고 착한 아이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젊고...착하다... 무엇 하나 내게는 어색하지 않은 수식어가 없었다.
어색한 수식어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젊고 착하다. 딱이군. 하하하!!]
[닥쳐.]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말이 꼭 맞는구만. 마녀가 착하다는 이야기는 고사하고,
마녀가 젊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아아, 젊은거였나? 늙질 않으니까!]
[시끄러워. 그렇게 떠들 기력이 있으면 숙소 청소라도 하지 그래?]
[이미 끝내놓았다.]
[하여튼 마음에 안들어.]
"혹시 괜찮으면 콜린까지는 어떻게 온건지 물어도 괜찮겠니?"
로라가 내게 질문했다.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기는 했으나 거짓말을 섞어 대답했다.
"아, 도시에서 사는건 너무 팍팍하다고 느껴져서요.
콜린으로 넘어오면서 좀 안정을 찾는 느낌이라고 할까."
"어머, 어린데 생각한 것보다 어른스럽구나."
"그런가요?"
"그럼, 나는 그런 생각을 마흔이 넘어서야 했단다."
로라는 흐뭇하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 마을에는 아무래도 젊은이가 많이 없단다. 너도 보면 알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다들 도시로 나가고 싶어하니까 말이야.
이제 이런 조그마한 마을은 아무도 찾지 않는걸까 해서 조금은 적적했단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지.
이제 마을이 늙어간다는 느낌을 받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나름 정이 들었거든.
콜린이라는 마을에서도 나름 오래 살았으니까 말이야."
"저는 그래도 그게 이 마을을 쉼터로 만들어주는거라고 생각해요."
"참... 어른스럽구나 에리아."
"카페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니까요."
카페를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변명으로 이보다 더 적절한 대답을
떠올리지 못한 나로서는 최상의 대답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될 거란다.
이런 나이많은 할머니 말 벗도 해주고 참 고맙구나... 고마워..."
"종종 찾아주세요."
"그러마. 에스테리카 한 잔 더 주겠니?"
"아, 다 드셨어요?"
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빈 잔을 내밀었다.
나는 잔을 새로 꺼내고 에스테리카를 내리기 시작했다.
로라의 주름진 얼굴은 내게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주름진 얼굴이, 그 시간의 흐름을 온전히 받아내고 나이를 먹어가는 태도가
내게는 존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로라와 무언가 더 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적어도 내가 산에 틀어박힌 동안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내가 알던 시대의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 기대감이 로라에게 흥미를 가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에스테리카를 내리던 중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맥주 한잔 줘."
그건 헬렌이었다.
아틀리에를 하고 있다던 말처럼 얼굴이며 가슴이며 물감을 묻히고 나타나서
맥주를 요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머리를 묶고 생각보다 털털한 민소매 셔츠를 입고 나타났는데,
가슴께가 푹 파인 옷이었다.
쇄골이 다 드러난 옷에, 정비용 바지를 입고,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은 외투를
허리춤에 감아묶고 나타나서는 빙그레 웃어보인다.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오후 9시 이후부터 호프가 되거든요."
"뭐야~ 맥주 없어? 그럼 헬라레소로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가능한 뜨겁게 부탁해."
"그래야죠."
내게 주문을 하고 나서 헬렌은 로라의 옆자리에 앉아서 로라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 둘은 생각보다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저번에 부탁하셨던 흔들의자 다 완성됐는데, 가져다 드릴까요?"
"어머, 그러니? 그러면 내가.. 받으러 가야겠구나."
"아뇨, 허리도 안좋으신데 그냥 계세요. 제가 내일 모레쯤 가지고 갈게요."
"그래주겠니? 정말 헬렌 너도 참 착한 아이로구나."
"다른 사람한테는 아니에요. 어머니만 특별히."
"그래, 알겠다. 참 한결같구나 헬렌."
헬렌은 그렇게 말하고 주머니에서 목장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면서 가게 전경을 훑어본다. 어제 왔을때도 분명히 확인했을 텐데.
"에스테리카 나왔어요 할머니."
"그래, 고맙구나."
로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잔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아까보다 조금 더 단 맛이 강해진 것 같구나."
"연세를 생각해서 조금 더 달게 해봤어요. 곡물류도 조금 더 넣었고요."
"고맙구나, 배려는 언제나 사람을 미소짓게 만들지.
티스푼을 하나 내 주겠니?"
순순히 티스푼을 내주면 로라는 티스푼으로 커피를 천천히 저었다.
커피의 향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로라는 나를 보며 말했다.
"에스테리카가 처음 개발될 당시에는 커피가 상당히 고가였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커피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곡물을 섞어 볶았다는 이야기가 있지.
그러니까 아마도 에스테리카는 이렇게,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었을거란다..."
"에스테리카, 그거 영 내 입맛에는 아니던데..."
헬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에스테리카는 그렇다고 치고, 내 헬라레소는 언제 나와?"
"거의 다 됐어요."
"가능하면 나배주를 조금 더 추가해줘."
"술은 아홉시 이후라고 말해놓고 헬라레소를 파는 것도 웃기지만,
그래도 제가 설정한 최소한의 마지노선이에요. 술은 정량만 넣어요.
그리고 덧붙이면 나배주를 쓰고 있지도 않고요."
"뭐? 나배주가 아냐? 그럼 어떤 술이 들어가는건데?"
"화주요. 나배주를 쓰면 호불호가 심하게 갈려요. 대장간 사람들은 좋아하시지만요.
대장간 분들이 주로 찾으시는 건 맞지만 일반인 분들도 주문하시거든요.
나배주같은 개성이 강한 술은 싫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나배주가 뭐가 어때서! 화주보다는 낫지않아? 헬라레소에는 나배주지!"
"지금은 가게에 나배주를 구비해둔게 없네요.
나배주를 주문하게 되면 다시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나배주나 화주나 큰 차이 없을 거에요. 보장하죠."
"꽤나 자신만만한데?"
"자신이 있으니까요."
"기대해볼게."
"그리고 나배주보다 제가 넣은 술이 더 고급이에요."
"그 정도는 알아. 나배주 싸구려인거."
헬렌은 자리에 앉아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이제는 익숙해지려고 한다.
어제 오늘 이런 손님들이 상당히 많았으니까.
분명 헬라레소의 재료에 들어가는 술의 종류는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간 출신들은 나배주를 고집하곤 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나배주를 싫어한다.
뭐랄까 벌레 내장같은 맛이 난달까.
화주가 그나마 독한 술중에는 깔끔하다고 볼 수 있었다.
적어도 나배주보다는. 물론 화주나 나배주나 그닥 맛이 좋은건 아니다.
둘 다 쓰고 어지러워진다. 그러나 적어도 화주는 커피맛은 가리지 않았다.
구하기도 쉽고 종류가 다양한 건 덤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내가 헬라레소를 내놓으면 헬렌은 그걸 마시고 말했다.
"나쁘지는 않네. 그래서 어떤 술이 들어간건데?"
"보드카죠."
"고작 40도로 감당이 되겠냐고 생각했는데, 너 제법이구나."
"보통 나배주를 찾으시는 분들은 그 독특한 맛을 좋아하셔서.
제 나름대로 어레인지를 했어요."
"센스가 좋네. 어떻게 한거야?"
"식욕이 달아날지도 몰라요?"
"나배주부터가 호불호가 세다며. 네가 그랬잖아. 말해봐.
뭐가 들어간건데?"
"그건 여기 로라 할머니 안계실때 알려드리죠.
할머니는 편안한 기분으로 커피를 드실 권리가 있어요."
"그건 그러네. 네가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