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노인
로라는 가만히 커피를 기울이다 말고 헬렌에게 물었다.
"그래서 헬렌, 그 마르커스는 어디있는지 아니?"
"마르커스요? 아마 자기 가게에 있지않을까요?
요 며칠간 페마르를 구하겠다고 발품을 팔던 걸 보면,
납입이 있는 것 같던데요. 아마 그걸 작업중이겠죠."
"그래, 최근 그 아이를 못 본 것 같아서 말이야.
만나면 안부 인사를 좀 전해주련."
"그럴게요."
헬렌은 그렇게 말하고 살짝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걸 굳이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헬렌은 자기 앞으로 나온 술을 마시고 내게 물었다.
"근데 헬라레소는 그 칼루아랑 뭐가 다른거지?"
"아, 차이가 조금 있어요.
칼루아는 술로 분류되는데 반해 헬라레소는 커피로 분류되죠.
애초에 헬라레소는 대장간에서 업무중에 근무 태만을 이유로 금주령이 시행되고,
술을 숨겨서 반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커피가 선택된게 유래에요.
그래서 당시 검사 과정중에서 '커피는 김이 모락모락 나도록 끓여야 한다.'
라는 수칙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알코올을 날리려고 한거죠.
그래서 원래 레시피 규정대로 만들면 알코올은 없어야 했는데,
그걸 밀주하듯 숨겨서 유통한 형태 자체를 이제 헬라레소라고 부르는 거니까요."
"아, 그런거야? 너 대장간 출신이 아니라고 했었지?
어떻게 그런걸 다 알고있는거야?"
"어, 공부과정에 나와요."
"그래? 저 윗집 카페는 모르던데."
"아... 심사 규정이 바뀌었나보죠?"
"그런가, 그러면 이 헬라레소는 정확히 말하면 정품은 아니라는거네?"
"그렇긴 하지만 알코올을 날리고 드리면 싫어하실거잖아요?"
"그렇지."
"그런거에요. 정식 헬라레소는 따로 있지만 아무도 그걸 기대하고 주문하지 않아요.
칼루아는 적어도 끓이지는 않잖아요? 현대 기준으로는 끓였느냐 아니냐로
분류 기준을 명시하고 있어요."
"그거 말고는 차이가 없나?"
"비율 조정 정도요? 애초에 칼루아도 어떤 술에 섞느냐에 따라 블랙 러시안이니,
화이트 러시안이니 명칭이 바뀌는 리큐어니까요."
"까다롭네. 음료 하나 만드는데 생각보다 머리 아프겠어."
"그래서 아무도 칼루아를 주문 하지 않는 이 조용한 도시가 좋은걸지도 모르겠네요.
적어도 헷갈릴 일은 없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과연 칼루아를 알기나 할까?"
"헬렌씨는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냥 종종 들었어. 커피가 들어가는 술이 있다고."
로라는 후후 웃으면서 커피 향을 맡았다.
그리고는 헬라레소를 가볍게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칼루아와 헬라레소는 향부터 다르지 않니?
따뜻한 느낌을 주는건 술보다는 커피에 어울리잖니.
그거면 충분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단다."
"그것도 확실히 그럴 수 있겠네요."
헬렌이 긍정하자 로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들면서 말이야, 사람은 고집이 강해진단다.
어느순간 자신의 의견에 공감해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성질을 부리게 되고.
그걸 나이로 정당화하려고 하곤 한단다. 부끄러운 일이지.
나는 늘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했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그런데도 너희가 이렇게 내 의견에 맞다는 이야기를 해주니,
어쩐지 내가 또 옳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고집을 부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란다."
"가끔씩은 그러셔도 괜찮아요.
어머님이 누구보다 배려심 깊고 사려깊으시다는건
이 마을에 조금이라도 산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거에요.
이 마을 자체가 워낙에 좋은 사람들만 모였기도 하지만요.
그정도는 괜찮아요.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고맙구나. 그래도 말이야, 젊은 세대를 사는 너희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한단다.
내가 너희의 이야기의 흐름을 실수로 끊은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가만히 듣고 있는게 나았을텐데..."
"괜찮다니까요. 저희한테 없는 경험이 있으시잖아요."
"그래도 말이야, 때로는 그 경험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보다
너희가 직접 경험을 얻어내는게 더 값진 일일 수 있단다.
나이가 들었으면 이만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도 어른의 일이지."
로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잔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참 즐거웠단다. 고맙다 얘들아.
나는 이제 돌아가 봐야겠구나.
자, 여기 커피 잘 마셨단다."
로라가 돈을 내밀었다.
딱 맞춰서 마신 만큼 돈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어서
거스름돈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더 있다가 가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이제는 집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고양이가 기다리거든.
그녀석, 내가 없으면 배가 고플 때마다 벽지를 긁어대거든.
덕분에 비가 오면 벽이 습하고 말이야."
"안녕히 가세요."
"들어가세요 할머니."
로라는 그렇게 다소 불안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체헤게, 가서 모셔다 드려.]
[그래, 다녀오지.]
의외로 군말없이 출발한 그 돌덩어리 로봇이 생각보다 든든했다.
헬렌은 당연히도 그렇게 출발하는 체헤게를 보고 내게 말했다.
"그래서 저 로봇은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어떻게 조종하는거지?"
"영업 비밀이에요."
"비밀이 너무 많은거 아냐?"
"어쩔 수 없어요. 비밀인걸요."
"하아... 재미없기는. 그래서 이제 말해봐. 그 보드카를 어떻게 한거야?"
"두꺼비는 원래 독성이 없어요. 독성이 있는 벌레나 생물을 잡아먹고,
그 독성을 저장하는 방식이죠.
나배주가 독성이 강하다고 느끼는건
두꺼비의 독에 있는 부포테닌이라는 성분이 원인이거든요.
강한 환각증상이 있어요. 실제로도 독이기도 하고요.
저희 가게의 헬라레소에 사용되는 보드카는
두꺼비의 섬수를 따로 구해서 담근 거에요."
"나배주랑 구조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네."
"그런 셈이죠. 그래도 도수가 더 낮고 향이 적죠.
독성 자체도 제가 조절하고 있고요. 조금만 쓰면 약재로도 쓰이거든요."
"잘도 그런걸 알고있네."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일수도 있어요. 잘 알아야죠."
"아무리 봐도 이런 촌에서 카페나 할 사람으로는 안보이니까 하는 말이야.
너 혹시 무슨 과학자라거나 약사 같은거 아냐?
다른 곳에서 사고쳐서 콜린으로 도망쳐왔다거나...할리는 없나.
미안, 그냥 잊어줘. 농담이었어."
"감사하지만 저는 이 마을에서 이렇게 카페 하는게 좋아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그닥 안하고요."
"그래, 나는 영 농담이랑 맞질 않는다니까.
네 표정을 보아하니 재밌는 편은 아니었나봐.
사과할게. 늘 마르커스가 재미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보라기에
농담을 던지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사람을 열받게 하는데 소질이 있는 모양이야."
"괜찮아요. 손님이시잖아요."
"그 말은 내가 돈을 주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뭔가 달랐을 거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건, 굳이 알려드리고 싶은 내용은 아니네요."
"그...그래. 왠지 나, 네가 조금은 무서워 지려고 하는데."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요. 이 마을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고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말이었지만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마을에서 언제까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동안은 쫒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 마을이 좋다는 의미는 그런 생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최근 이런 마을을 찾는 녀석들, 하나같이 순진한 애들을 등쳐먹으려고 하거나,
노인들을 상대로 한탕 해서 마을을 뜨려고 하는 사기꾼들 뿐이라서 말야.
너도 그런 부류는 아닌지 의심했었어. 지금도 네가 왜 여기서 장사를 하려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카페를 연건 진심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면 다행이네요. 저는 여기서 맥주만 팔면 되는 거였죠?"
"어...그렇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헬렌은 내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나를 프리스트노브라고 부르지,
일반적으로는 헬렌이라고 부르지 않아.
성격이 이상한 기술자나, 사람이 너무 좋은 로라 할머님 말고는."
"그럼 프리스트노브씨라고 불러드릴까요? 그게 편하신가요?"
"됐어. 그냥 헬렌이 좋아. 적어도 렌은 아니잖아.
그냥 이름 불리는게 어색하다고. 마치 우리가 몇 년은 알고 지낸 사람 같으니까.
원래 이름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았으니까."
"종종 그런 분들이 계시곤 하죠."
"어쩌면 너도 로라 할머님만큼 성격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적어도 아직 이런 귀찮은 상대랑 말을 섞어주잖아?"
"손님이시니까요. 돈만 주시면 최대한 성실하게 응대해드리죠."
"피곤한건 어디 안가는구나."
"한 잔 더 드릴까요?"
"됐어. 충분해."
그렇게 말하고 헬렌은 남은 커피를 입 안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해. 얼마였지?"
"3.5 페킷이요."
"4페킷 줄게. 귀찮게 한 값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 헬렌은 돈을 내밀고 돌아 나가면서 문을 잡고 멈춰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잔잔한 음악 같은거라도 깔아놓으면 어때?"
"참고할게요."
"그래."
헬렌은 그렇게 말하고 나갔다.
아직 체헤게가 돌아오지 않았다.
적당히 두 사람이 앉았던 자리를 정리했다.
마른 수건으로 테이블을 닦아내고 의자를 정돈했다.
"손님이 더 많아지면 피곤하겠네."
그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우리 가게는 손님도 적고, 아무리 많이 온다고 해도 정원이 4명이다.
종업원을 더 고용할 생각도 없고, 가게를 늘릴 생각도 없다.
나중에 우리 가게가 인기가 많아진다면 그때는 어쩌지 하는 그런 막연한 생각.
누가 온다고 보장이 된 것도 아닌데 괜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를 비웃듯이
나는 냉수를 한잔 마시고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게에 틀어두면 좋을 음악을 생각했다.
음악같은건 평소에도 잘 들은 기억이 없어서 잘 모른다.
아무래도 이 시대에서 음악을 어떻게 재생하는지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설마 아직도 우리 시대처럼 전축에 레코드를 올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아, 왔어?]
[오는 김에 마을도 좀 둘러보고 왔지.]
[골렘이 그렇게 태평해도 돼?
돌조각밖에 없는 몸이 연구 대상으로 잡혀갈 거라고는 생각 안해?]
[잡혀가도 내가 아프기라도 하겠나?
어차피 한번 죽었는데 두번이 어려울까?
죽음이 두려웠던건 죽은 이후 뭐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호오, 그래? 죽은 이후에 뭐가 있는데?]
[뭐가 있다고 해야 믿을거지?]
[상관 없어. 뭐라도 지껄여보라는 의미지.]
[아무래도 나는 마녀의 저주로 끌려오면서 기억이 군데군데 뜯겨나간 모양이다.
죽은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아.]
[죽기 전에는 잘도 기억하면서.]
[그러게나 말이다.]
[기억이라는 개념이 죽음 이후에도 통용되는 거였나? 뇌에 저장되는 거 아니었어?
무슨 별도의 기억을 저장할 만한 기관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잊어버리는거 아냐?]
[그러면 죽기 전의 일들도 기억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나는 지금 영혼체 상태잖나. 골렘에 뇌라도 달아뒀으면 또 모르지만.]
[아 미안, 깜빡했네. 죽은 적이 없어서 몰랐네.]
[그게 놀라워. 죽은 적도 없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아.]
[생각보다 무서운게 아니라고 말하는 경험자를 앞에 두고 있거든.]
[그래도 기억나는건 있지.]
[뭐가 기억이 난다니 또 다행이네. 연구에는 도움이 되겠어.]
[뭐든 다 연구로 귀결시키는군. 답답한 타입이야.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확실히, 또 로드원이야?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또?]
[무슨 이야기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시겠지.]
[나보다 오래 산 입장에서 짚이는 부분은 없나?]
[글쎄,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네.]
[왜지?]
[뭐랄까, 네가 날 놀리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 그럼 그냥 다음 손님을 기다리면서 커피라도 내리고 있으라고.
골렘은 저 구석에서 잠시 쉬고 있을 테니까.]
체헤게는 그렇게 말하고 구석자리에 섰다.
손님은 오지 않았다.
한동안 손님이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나도 부엌에 딸린 연구실에서
조용히 쪼그린 채로 새우잠을 청했다.
그다지 졸리지는 않았지만 쉬고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부터 내 예상과는 달리 흘러갔으니까.
[누가 오면 깨워.]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말 안해도 안다.]
잘 안다니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