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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화 〉종 (13/303)



〈 13화 〉종


오후 시간을 연구에 매진하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체헤게가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의 기술자라는 사람들은 죄다 만나고 돌아온 듯 하다.
덕분에 자기 혼자 돌아올 줄 알았더니 뒤에 주렁주렁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와서
하나하나 돌려보내는데 상당히 진땀을 빼야 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로봇의 작동 원리를 물었다.
마법이 사라지고 주술이 잊혀진 세상에서 이들은 이걸 마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어떤 기술로 움직이고 있는지만 물어왔다. 피곤했다.
어떤 직업이나 다들 그렇겠지만 대장간 출신인 사람들은 유달리 직업정신이 강했다.
그래도 덕분에 체헤게가 우리 가게 점원이라는 건 알려졌으니
다음부터는 심부름을 조금 더 편하게 보낼 수 있겠다.

이 좁은 마을에 기술자가 무려 여섯 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놀라운 일이다.
마르커스, 헬렌, 그리고 방금 찾아온 기술자 넷.
물론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대장간에서 직접 기술을 배운 사람은  일부인  하지만
그래도 일단 기술적인 흥미를 가지고 체헤게를 바라본 사람들임은 분명했다.
앞으로 저들이 가게에 종종 찾아와 내게 기술에 대해 질문을 하게 될 것임은 명백했다.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낸 이후에 나는 체헤게에게서 커피콩을 비롯한 각종 재료를 받았다.
분명 하나같이 유기농이라는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듣자하니  근처에는 허브를 재배하는 노인이 있다는 모양이다.
취미로 시작하던 것을 점차 확대해서 허브 농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도 가본거야?]

[아니, 때가 되면 장터에 물건을 팔러 나온다더군.
허브를 사러 농장까지 찾아가는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자주 거래하게 될 텐데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봤어?]


[별 말을 안하기에 굳이 물어보려 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대화라는게 되어야 말이지.]

[아 맞다. 그랬지 참. 그래 고생했어.]


[그리고 질문이 있는데 말이다.]


[뭐가  궁금한데?]

[청소를 하면서 걸레질을 몇  했더니 몸이 습해진  같다.
이끼가 끼려고 하는데. 어떻게 대비책은 없나?]

[아, 벌써 이끼가 끼어? 별 수 없지. 적어도 비바람 맞고 쪼개진 것보다는 낫네.]

[신체적인 한계로 이끼를  만큼의 정교한 작업은 어렵다.]


[오늘 네가 데려온 기술자들 중에 한 명 정도 섭외해서 현대적인 기술로 몸체를 만들어보자.
그러고 나서 영혼 회로랑 구동 회로 정도만 다시 그려넣으면 확실히 낫겠지.]

[그거 안전한거냐?]


[왜, 이제와서 죽는게 무섭다고 말이라도 바꾸시게?]


[아니, 어설프게 사라지지도 못하는게 두려워서 그렇다.]

[이제와서 뭘. 하던대로 해. 마녀식대로. 몰라?
내가 언제 네 입장 챙겨줬었나?]

[참 서로 정붙이기 어렵겠구만.]


[원래 미운 정이 오래간다고, 서로 한번씩 목숨줄 끌어잡고 협박 한번 하는거지.]

[그때 어떻게든 골로 보냈어야 하는건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웃고 있으면 가게 문이 열리고 오전에 찾았던 오크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의 옆에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이 한  같이 들어왔다.


"ㅈ... 저... 그.... 다시...왔...는데..."


"네, 어서오세요. 거기 앉으시고요. 자스민 티 맞으시죠?"


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의자를 끌어 앉았다.
옆에 앉은 노인이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오크에게 말했다.

"이 사람인가? 자네를 보고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사람이?"

"ㅇ...으응..."


노인은 나를 보고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마치 이 마을에서 처음 있는 일 같았다.
말 그대로 귀족이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오는 남자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내게 고급스러운 인상을 남겼다.


"반갑습니다. 내 이름은 글로타인 에네도르.
올 에네도르 공작 3세의 차남이요, 엔타인 에네도르 공작의 손자이며,
위대한 뿌리이신 뱀의 귀족, 시조 오닐 에네도르의 후손입니다."


"에네도르요?"

"그렇습니다. 원래 저는 페세티아 대륙 출신이 아닙니다.
텔레프란 대륙의 엠페레스왕국 출신이지요.
물론 그것도 서열 싸움에 밀려 도피하듯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 생활에 만족합니다. 종종 형님으로부터 편지도 받고 있고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저는 에네도르가 어떤 가문인지 잘 모르는데요."

"아, 실례했습니다. 워낙에 모르는 사람이 잘 없다보니.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를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아...보시다시피 20대에요."

빠른 변명을 했다.
어차피 이 얼굴로 몇백이니 몇천이니 해봐야 믿지도 못할 테니까.
그리고 정확히는 내가 몇 살인지 알아야 대답을 해줄텐데
최근 몇 백년 이전의 기억이 없으니 내가 늙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나이테가 남는 식물도 아니고 노화 진행도 없으니  스스로도 모르겠다.
대충 여기서 술만  수 있으면 됐지...

"그러면 6귀족에 대해서도 잘 모르시겠군요.
최근에는 이전보다 6귀족 자체의 영향력 자체도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최근의 6귀족은 그저 명성만 유지되는 상황이니
모르시는 분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실제로 제가 만나뵈는  처음이군요."

"설명을 좀 해 주실수 있으신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오크에게 자스민 티를 내 주었다.
여러 잔을 주문하겠다 싶어서 미리 큰 대접에 내 주면 내게 가볍게 미소지어 보이고
오크는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듣고싶어 글로타인."

오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하면 노인은 잠시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대답했다.


"참, 이런걸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잊어버릴 틈이 없습니다.
엠페레스 왕조가 이제 500년이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죠.
처음 건국하기를 베델그 엠페레스라는 자가 새로 국가를 세웠고,
이후로 상인, 장군, 학자, 법관, 비서, 의원의 여섯 인물을 주축으로 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고 하죠. 그 여섯 인물이 6가문의 시조가 된 거고,
그 이후로 세습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이었죠.
이제는 이전에 비해 많이 퇴색된 감은 있지만 여전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국가적으로도  점에 있어서 대우를 해 준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베델그?"

"자세히는 저도  몰라서 대답을 해드리기가 어렵군요.
에네도르는 그중에서 비서를 맡은 귀족가문으로써,
문장으로 뱀을 사용하는 가문이다. 정도로만 이해하시면  겁니다."

"그렇군요."

"또 너무 자세히는 알려드릴 수가 없군요. 형님은 아직 현역이시다 보니."


"괜찮아요. 뭔가 주문하시겠어요?"

"음... 에레푸틴은 주문이 가능할까요?"


올게 왔구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곧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주문할 수 있는 메뉴는 아니다.
재료 단가부터 고가인 데다가 까다로운 제조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화수 만큼은 아니겠지만.


"에레푸틴은 드셔 보신건가요?"

"아, 종종 자택에서 마십니다.
아무래도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주문하기 어려운 것도 있어서
카페같은 곳에서는 마셔본 지가 꽤 됐지만요."

"참 까다로운 커피거든요. 할 줄 알아도 팔지 않는 카페가 많죠."


"네, 저도 직접 만들어 마시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아무리 해 봐도  맛이 안나더군요. 이제는 조금 노하우가 생겼지만요."


"혹시 괜찮으시면 만드는 동안에 두분의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지..?"

"어떻게 만나게 되신건지 말씀해 주세요. 일반적으로 오크와 인간의 조합은
생소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으니까 계기가 궁금하거든요."

오크가 자스민 티를  모금 마시고 나서 말했다.

"저는 이래뵈도 요리사입니다. 과거 오르그에서는 꽤 이름을 알렸었는데 말이죠.
언젠가 휴가차 떠난 여행에서  친구를 만나게 된거죠. 당시 오크와 인간 자체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를 시기였을까요, 제가 타고 가던 배가 조난을 당했습니다.
배는 산산히 부서지고 겨우 목숨만 건졌을 때, 제가 도착한 곳은 자연 국립 공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문명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았을때 저는 단순 생물군계에서 최상위 포식자였고,
부정적으로 보았을 때는 제가 야생 동물을 잡아본 적이 없다는 거였죠."

"오크는 호전적인 종족 아닌가요?"

"아, 그건 오크가 알려지기 시작했을때의 지도권층과 당대의 사회가 그랬던 겁니다.
저는 그때 아직 어려서 전쟁의 역사는 겪은 적이 없죠.
당시에 제 아버지께서 참전하시긴 했지만요.
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도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십니다.
물론 지금의 오크들 대다수는 그런 프레임이 씌워진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건 분명히 우리가 감내해야할 아픈 역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 죄송했습니다. 실례했네요."


"괜찮아요. 여튼 저는 그래서 인간은 고사하고 동물도 죽여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곳에서 과일이나 식물을 채집하는 것으로 버텨야 했죠.
물론 이 체구에 그런 정도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지만요.
흔히 정육점에서 구입하는 고깃덩어리가 원래 동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생물을 죽여서 그 고깃덩어리로 가공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죠."

"그렇겠네요."

"다행이네요. 제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비웃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거든요.
같은 오크족에서조차 한심하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기본적으로, 유전자에 심어진 육식 본능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기뻐요."


"저도 그런 편견에 상당히 피해를 봤거든요."


"그렇..군요... 여튼 저는 그곳에서 상당히 고생했습니다.
거의 매일이 공복이었죠. 저는 계속 한 쪽으로 걸었습니다.
텔레프란 대륙 어딘가에 문명이 있기를 바라면서요.
그렇게 도달한 곳이 엠페레스였죠."

오크의 말을 받으며 글로타인이 말했다.


"당시에 영지 남쪽으로 괴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가봤더니,
이렇게 생긴 오크가 있는겁니다. 놀랐죠.
언어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언어로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는걸 느꼈죠.
음식을 제공했고, 아주 잘 먹더군요."


"그 음식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어요.
대다수의 음식이 육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오크들의 요리에서
과일과 채소는 생식이 기본입니다. 하물며 빵이라는건 들은 적도 없었죠.
세상에 어떤 오크가밀을 재배하고 그걸 수확해서 제분하고 반죽하고,
발효할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당시 오크는 전쟁과 약탈이 주를 이뤘으니까요.
생존 방식 자체는 유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애플파이는 정말 혁명과도 같았어요."

"저는 그래서 이 친구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그때가... 얼마나 걸렸었지?"


"2년 하고도 4개월정도였지 아마.
당시에  가르치러 들어오는 교사들이
하나같이 내 몸을 보고 두려워해서 곤란했다고."

"결국 성공했지만. 2년 4개월 후부터는 어느 문화권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스스로 의사소통을 하고 점차 언어능력을 키워가더군요."

"글로타인, 너는 내가 얼마나 언어에 소질이 있는지 모를거야."

"여튼 이녀석은 그렇게 저희 집에서 거주하며 지내다가 4년 째 되는 해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텔레프란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국가라고 했는데,
가 본적은 없으니 잘 모르겠군요."


"오크 자체가 인간과 교류하기 시작한건 얼마 되지 않아요.
저는  물꼬를 튼 오크라는 프라이드가 있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듯 커피를 내주며 말했다.

"주문하신 에레푸틴 나왔어요.
그래서 오크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름... 모라프루사 데 브라기아타에요."


"모라프루사 데 브라기아타... 모라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그건 조금 곤란해요."

오크는  큰 팔로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표정에 어딘가 조금 난처한 기색이 분명히 있었다.


"이해해주세요. 오크가 타 종족과 교류한 시기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잖습니까.
오크의 이름은 그들의 긍지를 표현하는 자랑스러운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남들이 쉽게 부른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는  같더군요."

노인이 그렇게 말하고 커피를  모금 마셨다.
살짝 불안한 눈을 하고 있던 모라프루사 데 브라기아타씨는 자스민 티를 마시고는
한껏 진정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는 경우이거나,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름에 자긍심이나
의미를 가지지 않아서 아무도 그 이름을 존중하지 않는 경우죠."

"그러면 서로를 부를 때는 어떻게 부르죠?"

"별명이죠. 서로에게 별명을 붙여주곤 합니다. 조금 까다로우시죠?"


"아, 아니에요. 그럼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나요?"

"원하시는 대로 불러주세요. 겁쟁이라거나 평화주의자 같은 별명도 있었는걸요."

"저는 이 친구를 퓨어하트라고 부릅니다."

옆에서 글로타인씨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저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네.. 편하신대로."

까다롭네 이 문화라는거.
오래 살아도 아직 모르는게 넘쳐난다.

"그건 그렇고, 커피는 입에 좀 맞으세요?"


내 질문에 글로타인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이 마을에도 왕왕 들를만한 카페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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