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콜린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목욕이었다.
하지 말자고 해놓고서도 습관처럼 했다.
개운한 느낌이 든다는건 여전히 좋았다. 루틴으로 박혀서 그냥 하는게 마음이 편하다.
이를 닦고, 수제 가글로 입을 헹구고, 옷장에서 새로운 옷을 꺼내 입고,
내 방의 창문을 열어 햇살을 받아들인다.
[아침부터 바빠보이는군?]
"나간다고 했잖아."
[어제 가게 문 안잠근거 기억 나나?]
"기억나. 안잠갔네."
[내가 잠갔다.]
"고맙네요."
[무슨 일이지?]
"왜 또 뭐가?"
[아..아니다. 나도 나갈 채비를 좀 하면 되나?]
"알아서 해. 채비 좋지. 좋은데, 너 뭐 챙길게 있어?"
[하아... 아직도 내가 인간 같다니까.]
"20분 뒤에 나갈거야. 준비 천천히 하고 있어."
[채비할 게 없다고 방금 말했는데.]
"나는 남았거든. 골렘주제에 주인한테 대드는거야?"
[이기적이었군. 미안하다.]
"...."
[왜 그러나?]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나나 너나 정상이 아니네."
[그런 것 같군.]
적당히 옷장을 뒤적이다가 체헤게에게 후드를 던져줬다.
[또 이건가? 빨래는 하는 거겠지?]
"걱정마. 내가 자주 입던거야. 같은 옷이 4벌 있어."
[네 벌이나?]
"원랜 다섯 벌이었거든요. 근데 어디사는 누구씨가 태워먹었어."
[오 그러고 보니 익숙하다 싶었다.]
"익숙하셔야죠. 덕분에 저는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다 보는데 알몸으로 묶여있었거든요."
[걱정마라, 아무도 널 성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거다.]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다.]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성희롱을 꽤나 좋아하시네요. 그렇게 안봤는데."
[실망인가?]
"실망은 그 말투가 제일 실망스러워. 누가 나이든 유령 아니랄까봐,
끝까지 저 말투 안 고치는것 좀 봐."
[나이는 네가 더 많다 마녀.]
"어련하시겠어요. 아주 이름은 안부르고 마녀 마녀..."
지갑과 가방을 챙겼다.
크로스백을 매고 그 안에 가볍게 마실 에스테리카를 물병에 담아 넣었다.
큰 맘을 먹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가면 따스한 햇살이 비췄다.
내 뒤로 체헤게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우리가 가게 문을 닫고 가게 앞에 붙은 Close 문패를 남기고 돌아서면
저 멀리 걸어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그 얼굴은 천천히 가까워져 내 앞에까지 다가와 묻는다.
"오늘은 가게 안해요 누나?"
"응. 내일 와. 오늘은 마을을 좀 돌아다니려고."
"이 마을... 볼 건 그닥 없는데, 시장을 중심으로 한번 돌아다녀봐요.
그게 그나마 마을을 제일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을거에요."
"그래, 이제 너는 어디로 가려고?"
"글쎄요. 갈 곳이 사라졌으니 집으로 돌아갈까봐요."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글쎄요. 이 작은 마을을 나갈거에요. 그리고 저 스스로 만족하는 직업을 가지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 밑에서 내가 인정할만한 사람을 상사로 두고 일하겠죠."
"그건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알고있어요. 나는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는 직업보다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제일 잘 하고 싶은거에요. 특출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직업은
내가 아니라 그 직업을 보게 될 것 같아요. 나를 잃고 직업으로 불리는게 싫어요.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면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과연 그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너를 인정해줄까?"
"인정을 해주는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인정하도록 만들거에요.
그럼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제일 기피하고 혐오하는 직업은 뭐라고 생각해요?"
"나는 글쎄, 성직자 정도일까, 성기사들은 생각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병신들이거든."
"성직자.. 너무 누나 개인의 의견 아니에요?"
"나중에 알게 될거야. 그게 얼마나 모순적인 직업인지."
"좋네요. 반드시 나는 성직자가 될거에요.
반드시 누나의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릴게요.
그리고 다시 카페를 찾아올게요. 그때 다시 말해주세요.
제일 기피하는 그 직업을 가지고 돌아온 나를 보고."
"이 새끼... 너 생각보다 제대로 미친 놈이구나."
"결국 누나에게서도 새끼라는 말이 나오는군요."
"왜, 기분이 나빠?"
"아뇨, 상당히 늦게 나온 편이에요. 별로 기분이 나쁜 편도 아니고요."
[어떻게 되어먹은 애가 이렇게 꼬인거지.]
[그러게나 말이야. 정말 나를 보는 것 같아.]
나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지폐 한 장을 빼냈다. 페킷 지폐였다.
그걸 데니스에게 내밀었다.
"뭐에요 이건?"
"용돈이야. 가서 뭐라도 사먹어. 가게를 닫은데 대한 사과야."
"됐어요. 돈은 있으니까. 이전에 실례했던 걸 이걸로 없던 걸로 하죠."
"아무리 봐도 애 같지는 않단 말이야. 너 몇 살이야?"
"이전에 말했잖아요. 11살이에요."
"그래..."
데니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내게 인사하고 반대로 돌아 걸어갔다.
나도 뒤쳐지지 않도록 시장쪽으로 향했다.
아직 식사를 하지않았으니 무언가 음식을 파는 곳을 찾으려 했다.
가던 도중에 좋은 향기가 나는 곳으로 따라가면 그곳에는 아침부터
빵 굽는 베이커리가 있었고 나는 홀린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어머, 처음 보는 아이네."
"안녕하세요."
"어서와요. 지금 갓 구워서 따끈따끈할거에요."
성격 좋아보이는 아주머니가 머리에 손수건을 두르고 커다란 앞치마를 펄럭이며
오븐에서 빵을 꺼내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우리 가게에 들르는 손님은 늘 정해져 있었어요.
워낙 작은 마을이니 기억을 다 못하는것도 이상하다고 할 정도죠.
새로운 얼굴을 보니 반갑네요.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어머, 왜 손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네?"
"아뇨 딱히 그렇지는..."
"그건 말이지, 우리 마을에는 워낙에 인구가 적다보니 손님은 곧 이웃이란 말이야.
미리 알아둬서 나쁠건 하나도 없다 뭐 그런거 아니겠어?
그나저나 아가씨, 이름은?"
"에리아에요."
"그래 에리아씨, 내가 말을 좀 놓고 싶은데 그래도 되려나?"
"네.. 그러세요."
"그래, 우리 가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늘 빵을 진지한 얼굴로 서서 고르곤 해.
그럴 필요 없어, 전부 맛있거든. 벌써 침이 고이지?
난 알고 있어. 우리 가게 빵 냄새를 그냥 지나치는건 있을 수 없지.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거야 당연하지 않겠어?
자 일단 여기 앉으렴."
정신이 없었지만 여자는 말을 쉬지 않았다.
"아차차! 내 정신 좀 봐. 자기소개 하는걸 깜빡했네.
경우가 없어 정말. 미안해. 늘 이렇게 깜빡 깜빡 한다니까?
일주일 전에도 말이야 글쎄, 목걸이를 잃어버려서 한참 찾았는데 어머나,
그게 오븐에 들어가있지 뭐니? 난 또 잃어버린 줄 알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걱정을 그렇게 했지 뭐야? 남편이 선물해 준 거라서 잃어버리면 안되는 거거든."
"아...네..."
"아, 우리 남편은 지금 서지스에 가있어. 출장을 갔거든.
일주일에 한번 우리 가게 빵을 가지고 서지스로가서 그걸 팔고,
번 돈으로는 밀가루나 견과류, 꿀이나 우유 같은걸 사오는거야.
정말 정말 세~상에 그런 자상한 남편이 없어!"
그리고는 그녀는 하하 웃었고 후덕한 목이 접혀 웃을 때마다 살이 떨렸다.
그녀는 이것저것 빵을 집어 내가 앉은 자리에 가져다 두고 말했다.
"먹어 먹어. 내가 또 원래는 이거 비싼거다? 아무나 못먹어요. 예약도 겨우 잡아!
아이쿠! 이건 농담~ 그래도 말이지, 이거 엄청 맛있어. 빨리 먹어봐.
아 이야기를 안했네~ 우리 가게는 첫 손님은 무조건 무료! 무조건 무료야!
그렇잖아? 이웃이 될 테니까 말이지!"
"저기 잠시만 좀..."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아주머니의 화술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체헤게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 한껏 웃어제꼈다.
[크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하하하하!!!]
당연히 들을 사람은 나 뿐이었다. 화가 더 나는건 당연했다.
그러나 자리에 가만히 앉아 버티고 잇으면 아주머니가 말했다.
"내가 너만한 딸이 있어요~ 아주 그 말도 안듣는 지지배가 그냥~
있는데 글쎄, 걔는 그렇게 내가 빵집을 이어받으라고 해도 말을 안듣지 뭐니?
'엄마랑은 일하고 싶지 않아!' 라나? 너무하잖니 정말..."
한참을 떠들다가 진정한 듯 멈춰서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아하하... 나도 참 할말 못할말 다 해버렸네~ 호호...
내가 방해한건 아니지? 어머머, 식겠다. 어서 먹어."
그렇게 한바탕 몰아치고 나서야 여유가 찾아왔지만,
어쩐지 식욕이 생기지않는다.
그나마 다행인건 식품용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침은 튀지 않았다는 점 정도?
그러나 마스크도 이미 허옇게 김이 잔뜩 껴서 물방울이 맺혔다.
어째 배는 고프니 빵을 떼어 먹으면 확실히 맛은 있었다.
만족스러운 맛에 나는 다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 아주머니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얘, 에리아! 아주머니라니! 나델리아라고 말했잖니!"
"고마워요 나델리아!"
언제 말했더라...
아무래도 텐션이 높은 사람이라 피곤한 것 같았다.
우선은 조금 익숙한 곳부터 찾아가고 싶었다.
빵도 받았겠다, 로라 할머니나 마르커스 같은 사람들.
그렇게 거리를 걷다보니 시장 귀퉁이에 꽃이 핀 화분을 전시해둔 아틀리에가 보였다.
"여어, 에리아."
"헬렌씨!"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가게랑은 거리가 꽤 되잖아?"
"인사차 홍보차 그냥저냥 나와본거죠."
"오 그래? 들어와.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차 정도는 내 줄게."
내가 그녀의 가게에 들어가면 그녀의 성격과는 대비되는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미술품과 가구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이거 내가 만든 것들. 하나같이 마음에는 안드는데, 꼭 고객들이 이런걸 좋아하더라고?
내가 아끼고 정성들여 만든건 팔리질 않는데, 나는 결국 그런 것들을 만들려고
저런 허접한 나무판떼기를 이어붙이고 있지."
"허접하지 않아요. 예쁜데요."
"그래? 다행이네. 그거라도 보고있어. 금방 마실걸 내줄게."
헬렌은 안쪽에서 찰랑이는 액체가 든 병을 가져왔다.
"자, 받아."
"이게 뭐죠?"
"뭐긴, 물이지."
"물이요?"
"미안, 방금 봤는데 차를 다 마셨던데? 시중에서 파는 둥글레 차 있지?
나 그거 좋아하거든 저렴해서. 분명 티박스를 여럿 샀는데 다 마셨나봐."
"아, 저 물도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네. 혹시 도움이 필요해? 마을 안내해줄까?
나 한가해서 괜찮은데."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려도 되나요?"
"당연하지. 맥주를 제값에 팔아주는데."
이가 드러나보이게 웃는 헬렌의 얼굴은 생각보다 예뻤다.
이는 미의 기준이 아니라 마음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었다.
적어도 가식은 없는.
"아, 물 냉장고에 넣어둬서 시원할거야."
"네, 고마워요."
"당연히 그 가방에서 차라거나 커피라거나 꺼내서 저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내 가방을 유심히 살피다가 헬렌이 말했다.
"그 가방에 출장용 음료같은거 없어?"
"없어요. 그런건 보관이 까다로워서요."
"미리미리 쟁여두라고. 필요할때가 생각보다 많을거야."
"그나저나 헬렌씨는 어떻게 아틀리에를 열게 되신건가요?"
"어? 나? 별 거창한 이유는 아니고,
내가 이전에 그린 그림을 어떤 돈 많은 재력가,
조금 시선이 불쾌한 노인네들한테 팔린 적이 있었고,
그 양반이 하필 이 작품들을 좋아하는 바람에.
"그래도 나름 즐거운 인생이네요."
"즐겁다... 그렇기는 하지. 조금 재수없어서 그렇지."
"이번에 저희 가게 디자인에 어울리는 소품이 있으면 보고싶은데요."
"소품? 아, 저번에 내가 말한거 담아두고 있었어?"
"일부러 그런건 아니구요. 음악이라도 틀어두면 좋으려나 해서."
"노래는 사실 누가 부르던 상관 없어. 존나게 신나기만 하면 클럽에서 틀 수 있고,
존나게 우울해지면 카페에서 틀어도 되는거지."
"그렇..죠..."
"사실 우리 가게에서 음반이나 악기를 취급하지는 않아. 아무래도 아틀리에고.
그래도 분위기 내는데 좋은 빈티지 상품들은 있지. 우선 이런 의자?
원단이 이렇게 되어있어서, 안쪽에 솜을 들여넣고, 이쪽이 단단한 재질로 되어있는데,
이렇게 세워두고, 이런 식으로 정리하면 돼."
뭘 보여주기는 하는데 아틀리에라더니 그림은 생각만큼 몇 점 없고 작품을
화실 안에 전시해두는 타입 같다는 생각이 든다.
"너 지금 되계 무례한 생각 했지?"
"아니요."
"그래? 아니면 말고."
순간 당황했다.
헬렌은 가만히 가게를 둘러보고 나를 슥 보더니 결심했다는 듯이 말한다.
"기다려봐. 내 역작을 보여줄 테니까, 역작 중에 골라봐."
"역작이요?"
"분위기 내는데는 선수인 아이들이지."
그렇게 그녀는 소크리같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 안에는 그녀가 만든 소품이 가득했다.
"이건 캔들, 이건 무드등, 이건 장식품, 이건 수석 조각.
아마 마음에 드는게 이중 하나는 있겠지. 자, 쭉쭉 간다.
이건 사과 장식품, 이건 아크릴 인형, 이건 곰인형,
이건 보석 가공 목걸이, 이건 돌덩이....으악!!"
헬렌은 체헤게의 머리를 습관처럼 떼서 자랑스레 보여버렸다.
"으아아악!!!"
세 명이 다 기겁하듯 놀랐다.
그러나 체헤게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죽을 뻔 했다.]
[안죽을걸?]
[저 여자 하필 구동회로 바로 근처를 잡고 문지르던데.]
[긴장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걸 인지한다는 말이잖아.
스스로 지키는 법은 알아야지 나름 마녀헌터도 한 양반이.]
[마녀한테 그런 소릴 듣다니 기가 상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