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콜린
"어우 심장아퍼... 미안해, 네 로봇 대가리를 뜯어버려서."
"아뇨, 괜찮아요. 다시 붙이면 붙어요."
체헤게의 머리를 딸깍이며 조립하고 나서 웃었다.
그제서야 헬렌도 조금은 안심한건지 어색하게 웃는다.
"이건 뭐에요?"
내 질문에 그녀가 내가 가리키는 물건을 본다.
그건 동그랗게 생긴 작은 기계였는데 앤틱한 감성이 한껏 살아있었다.
"그거? 내가 어릴때 만든 가습기야. 어릴때? 젊을 때가 맞지? 나이가 꽤 들었으니.
마음에 들어? 줄까? 그거 사실 자신작은 아냐. 좀 성능이 애매하거든."
나는 사실상 기계를 잘 다루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기계는 젬병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다.
나는 연금술과 주술을 사용해 만들어낸 물건을 사용하는거지, 저런 기계는 제대로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당시 기계라고 해도 뭐 엄청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지금이니까 컴퓨터고 자동차고 등장한거지,
마차나 타고다닌 내 시대에서는 기계라고 해봐야 집 전화나 총 정도였으니까,
내가 훨씬 발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낡은 가습기가 내게 낯선 기계가 되는 것이다.
"보기에도 그래 보이지만 투박하잖아? 원래 가습기라고 하면 수증기를 뿜어야 하는데,
얘는 분수를 뿜는 형식이거든. 물론 내 설계오류야. 괜히 집을 적시고 싶은건 아니니까
나도 잘 사용하지 않는 도구야. 사실 엄밀히 말하면 흑역사라고 해도 좋겠네.
네가 가지고 싶다면 줄게. 나한테는 필요 없어."
"그래도 직접 만드신 건데."
"직접 만든 선물이라고 생각해줘."
"알겠습니다."
꽤 마음에 드는 소품을 얻어냈다.
내 표정을 본 헬렌이 내 기분을 읽은건지 흐뭇하게 웃었다.
"보아하니 우리 가게에서 뭐 더 살 건 없어 보이네."
"죄송해요."
"아냐, 그 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안했는데 내가 더 기쁘다."
"감사해요."
"그래, 다음에 또 오라고."
그녀는 나를 배웅해주며 기분좋게 웃었다.
사실 헬렌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흔한 이름이다.
그래서 나는 헬렌이라는 이름을 상당히 많이 봤다.
태양, 태양의 정도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넓게는 빛나다 같은 의미로 주로 쓴다.
그래서 파생된 것이 헬라레소 같은 커피라거나 헬라티움 광석이다.
헬라레소 커피의 맛이 태양의 맛이라거나 헬라티움 광석의 특징이 빛이라거나
그런 간단한데서 온다.
여자라면 헬렌이나 헬라, 남자라면 헬리오스 정도의 이름이 종종 붙는다.
그건 수백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내가 만난 태양들은 성격이 좋다는 것이었다.
시장 위쪽으로 걸어가면 누가 보더라도 카페라고 볼 수밖에 없는 큰 가게가 있다.
아마 하나뿐인 경쟁업체겠지.
당당하게 나는 그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늘은 손님으로서 온 거니까 말이다.
"어서~쓰!"
주방에 있는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흘끔 바라본다.
가게의 분위기는 편안함보다는 이색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콜린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내부는
도시의 카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한 페인트칠에
자리마다 호출벨이 달려있어서 가격 말고는 경쟁 수단이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저, 카페오레 주세요."
"카페오레? 라떼로 하지?"
마른 컵을 닦으며 내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고 이 카페의 분위기를 알게 되었다.
"그래요. 라떼로 주세요."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섞느냐 드립커피에 우유를 섞느냐 하는 차이지만
수고로움에는 차이가 있다.
나도 일단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는 사람이니까 그정도는 이해해주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면 남자가 카페라떼를 내 자리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네, 고마워요."
내가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들었을 때, 카운터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린다.
"어제보다 가격이 올랐잖아! 사기꾼 새끼가!"
"어제는 반값으로 팔았잖아!"
"장난하나, 어제 매출이 오늘 영향을 주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럼 마시러 오지 말던가! 가게에 손님이 너밖에 없는 줄 알아?
우리 가게 말고는 이 콜린에서 에스테리카를 사 마실 수 있는 곳은 없어!"
"이...이 개새끼가..."
바리스타와 남자 하나가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며 주전부리 삼아서 커피를 마셨다.
잠깐 홀짝이고 있으면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에리아. 오랜만이군. 자네 가게를 찾아갔는데 문을 닫았기에 여기로 왔는데,
설마 여기에서 만날 줄 몰랐다네."
"아, 마르커스씨, 잘 지내셨어요? 어째 더 헬쓱해지신 것 같아요."
"아, 좀 못 먹고 못 잤지. 걱정 말게. 안 죽네."
"그래도 건강 챙기셔야죠."
"아, 말도 말아. 마감을 앞두고서 새까맣게 잊어서 요 며칠 욕봤다니까.
납입에 늦었으면 미안해서 오늘도 못 잘 뻔했지."
"어떤 일이었는데요?"
"알다시피 페마르 수입규제가 강화되는 바람에 지체되었던 작업을
자네 덕분에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어. 성능면에서도 큰 차이가 없고.
클라이언트한테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이제 당분간은 좀 쉬어야지.
저번에 그 금속은 어떻게 구한건가. 몇 개 더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부탁하면 드릴게요."
"아, 고맙네. 종종 가게에 들러서 사도록 하지."
그런 말을 하고 있으면 옆에 있던 남자가 살짝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마르커스, 그건 누구야? 새로운 물주를 잡았나?"
"물주라니. 지인일세."
"가게라고 말하는거 보면 알아듣는다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철물점이랑은 계약을 끊을 생각이지?
이제껏 납품가를 할인해줬던건 어떻게 할건가?
독점 거래를 하겠다고 해서 계약한거잖아? 계약 위반이야?"
그런 말을 하는 남자에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저희 가게는 철물점이 아니에요."
"아, 처음뵙겠습니다 아가씨, 콜린에 온 걸 환영해요.
그렇지만 그런 속보이는 거짓말은 적을 늘릴 뿐이야."
"거짓이 아니에요. 저는 저 마을 변두리에서 카페를 하고 있어요."
"하?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카페를 한다는 사람이 다른 가게에서 커피를 마셔?"
"오늘은 휴업을 할까 해서 온거에요."
"그래, 알겠다고. 그래도 우선 마르커스에게 물품을 공급한건 아가씨 맞지?"
그가 내게 따져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르커스가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아가 아니라고 하잖는가!"
"에리아? 그게 이름이에요? 반가워요. 나는 월이라고 해.
철물점을 하고 있어. 그럼 이제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차분하게 말해볼까?"
"그래요 월. 대체 뭘 원하는거에요?"
"원래 매달 페마르를 정기적으로 수입해오던 가게 입장에서,
이번달 페마르는 유난히 비쌌고, 겨우 고액을 들여서 구입했지.
발주하는 과정부터가 힘들었다고.
그런데, 예상했던 거래처에서 이번 달은 페마르가 필요가 없다네?
그런데 그게 알고보니까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중간에서
모조품으로 바꿔치기를 해서 팔았다는걸 알게되면 화가 나는게 당연하지?"
"저는 페마르는 판 적도 없고 돈을 받은 적도 없어요."
그 말에 월이 다시 마르커스에게 말했다.
"그럼 그 보일러 납품은 어떻게 한건지 말해보시지."
"당연히 대체재를 썼네. 에리아양에게 그만 채근하게.
내가 책임지고 페마르는 살테니까."
"얼씨구, 약점이라도 잡혔나?
쓰지도 않을 페마르를 사겠다고?
한 두푼 하는 것도 아닌데? 아예 우리 가게랑 척을 지겠다 이건가?"
"경거망동 하지말게. 자네의 발주가 늦어졌고 올해 페마르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다른 곳에서 대체제를 구했을 뿐이야. 구매도 아니고 양도 형태로."
"믿을수가 없군. 양도 할만큼 저렴한 소재의 페마르 대체제가 있다고?"
나를 째려보는 그 시선이 아니꼬와 나도 한마디를 얹었다.
"저렴하진 않아요."
그 말에 월이 말했다.
"좋아 에리아씨, 가게 주소를 알려줘. 내일 찾아가지. 가서 커피를 반드시 마실테니까.
이 좁아터진 마을에 과연 카페가 둘인지 철물점이 둘인지 보자고."
그렇게 말하고 월은 커피를 원샷한 뒤에 나가버렸다.
"미안하네 에리아. 저 친구가 좀 과격해서 그렇네."
"세상 일들이 다 마음 같을 수는 없죠."
"그런데 에리아, 왜 여기 있는건지 물어봐도 되나?"
"네, 대답 못할 것도 없죠. 여기 카페는 어떻게 손님을 유지하는지 궁금했죠."
"아, 그런건가."
"겸사겸사 일도 있고 해서요. 괜찮은 기술자를 찾고 있어요."
"기술자? 무슨 일인가?"
"아, 여기 이 돌덩이로봇 보셨죠?"
"아, 자네 가게에 있던..."
"사용중이 아닐 때 화장실에 배치했더니 다리 부분에 이끼가 끼더라구요.
미끄러지는 일이 늘어서 새로운 소체로 바꿔주려구요."
"그럼 석공을 찾는게 빠르지 않겠나?"
"아뇨, 이왕 하는 김에 전문 기술자의 손에 부탁해서 제대로 된 기계로 하려고요."
"그거 재밌구만. 흥미가 생겨. 내게 맡겨줄 수 있나? 마침 페마르도 써야하고."
"아, 그 페마르.. 그렇게까지 안해주셔도 괜찮은데."
"어차피 돈을 지불할 생각으로 기술자를 찾아보려고 한 거겠지?
그럼 나는 페마르를 써서 더 튼튼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이네."
"아... 그러면 조만간 연락 드릴게요."
"그거 듣던 중 좋은 소리군."
그 대화를 들은건지 바리스타가내 자리까지 찾아왔다.
"카페를 한다고?"
"네. 혹시 불편하셨다면 사과할게요."
"아, 아니 이런 꼬마가 운영하는 카페인줄 알았으면 견제도 하지 않았을텐데.
내가 어른으로서 배려가 부족했군. 그래, 애들 소꿉장난에 돈을 많이 받기도 미안해서
조금씩 받는 건줄도 모르고 신고를 넣었지 뭔가.
가게 폐업 건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이 나라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가게는
법적으로 제제되거든. 나이가 차지 않은 미성년자의 가게는 불법이고 말야."
"아, 괜찮아요. 허가를 받았거든요. 조합에도 가입했고요."
"뭐...?"
"그냥 이 가게에 참고할게 뭐가 있는지 보러 온 것 뿐이에요. 커피 잘 마셨어요."
나는 그의 앞에서 지갑을 꺼내 물었다.
"얼마죠?"
"7...아니, 11페킷이야. 꼬마야."
"11페킷? 너무 비싸잖은가..."
마르커스가 내 편을 들어주었으나 그의 표정은 편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픽 웃어보인 후에 큰 소리로 말했다.
"비싸네요! 우리 가게에서는 이런 커피는 5페킷이면 될 텐데!"
"이...이런....!"
나는 그에게 11페킷을 건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커스는 내 표정을 보고 일이 벌어짐을 확인한건지 내게 웃음기를 띄고 물었다.
"거기, 헬라레소는 얼마요?"
"3페킷 5크레딧이요."
우리의 꽁트에 얼굴이 붉어져서는 바리스타가 말했다.
"이렇게 하고도 장사할 수 있을 것 같아?
더러운 놈들..."
"아 죄송한데요. 양심 따지면서 장사하셨으면 저도 이렇게 안했죠.
그리고 덧붙여서 저는 돈 바라고 장사하는것도 아니라서요."
분명 찰나의 소동이었지만 가게내부의 시선은 분명히 나에게, 아니 우리에게 쏠렸다.
지금이 홍보를 위한 최적의 순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녀의 카페에 와서 직접 확인해보시겠어요? 기다릴게요!"
내 말에 고소한 웃음을 지으면서 마르커스가 바리스타에게 말했다.
"아, 나도 잘 마셨네. 여기 10페킷."
그리고 나와 체헤게, 마르커스는 카페를 떴다.
가게 문을 닫고 나서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들 커피는 얼마 마시지도 않았잖아!!!"
나는 나와서 마르커스에게 피스트 범프를 신청했고 그는 흔쾌히 받아주었다.
"자네는 확실히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이렇게 해줘야 후련하거든요. 뒷 일은 어떻게든 되겠죠."
"벌써부터 매출이 늘어날 소리가 들리는구만."
"마르커스씨야말로 아까 월씨랑은 어쩌시려구요?"
"놔 두게. 가게 접기밖에 더하겠나, 크하하하!!"
마르커스씨는 흔쾌히 웃다가 덧붙였다.
"자네가 카페를 한다는 걸 알면 그 친구도 아마 그렇게 화내지도 않겠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오. 그렇게 인정 없는 사람도 아니고.
아마 배신감을 느꼈겠지. 그런 것보다 우선 로봇을 만들 이야기를 하지않겠소?"
"아, 체헤게."
"체헤게?"
"아, 별명이에요."
"로봇에 별명을... 별나군. 확실히 대장간에서도 종종 보이는 편이긴 하지.
자기가 만든 로봇에 이름을 붙이는 친구들은."
[내 이름을 별명 취급하다니.]
[좋게 생각해. 이제 네 이름을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 더 생겼잖아?]
[나를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버린 것도 있지.]
[로봇 맞잖아?]
[하아... 그래... 맞지.]
마르커스는 길을 걷다가 내게 말했다.
"내 가게로 가지. 내 가게도 한번 소개해주고 싶어지는군."
"아, 그럴까요.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은 아예 쉬기로 한건가보군?"
"네. 오늘 가게는 쉬고, 내일부터 다시 하려고요."
"미안하게 됐구려. 내 말실수로 내일은 잔뜩 독기가 오른 남자가 손님일테니."
"더한 손님도 받아봤는걸요."
"그건 전혀 위로가 안되오. 내 잘못은 변하지 않을거요."
"너무 신경 안쓰셔도 된다는 의미에요."
"고맙군."
"원래 내일 재수 없는 꼬마의 과외를 해주는 것 말고는 할 일도 없었거든요."
"재수 없는 꼬마... 데니스인가?"
"바로 아시네요?"
"이 마을에 재수 없는 꼬마라고 할만한 녀석은 그 아이 하나지.
머리는 상당히 좋은 것 같다만 정을 붙이기는 어려운 아이야.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상당하고."
"그런가요..."
"독특한 면도 있다네. 이전엔 내 가게에 며칠인가 찾아와서는 금속의 성질을
가르쳐 달라고 하고 그걸 노트에 받아적으며 공부를 하고는 했다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그 아이를 제자로 받을 생각까지 했었지."
"알 것 같네요."
"한 달쯤 되던 날인가? 이만하면 됐다고 하더니 더는 오지 않더군.
덕분에 아직도 혼자 일한다오."
마르커스는 그렇게 말하고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워도 되겠소?"
"네, 그정도는요."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