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탁자와 남자들
마을회관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회관이라기보다는 단순히 마을 사람 몇몇이 모여
간단한 마을의 소일거리를 하고 있는 사무소같았다.
내가 발을 들이면 그곳에 있는 사람 몇몇이 나를 돌아보았고,
그 사이에서 루나르씨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 에리아씨. 어서오세요.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가 느긋한 손짓으로 내게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루나르는 막 작성중이던 일을 내려놓으며 내게 묘한 표정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게 이전에 보았던 교회에서의 노신부보다 훨씬 편안해보였다.
"마을을 좀 돌아보고 싶어서요."
내 말에 루나르씨는 편안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었죠. 혹시 집은 구하셨나요?"
"가게에 집이 딸려 있어서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일단 저도 개인적으로 가게를 홍보해드리도록 하죠.
사람들이 다들 친절하시니까 잘 지내실 수 있을 거에요.
며칠 지나면 아마 거리나 가게들도 익숙해지실 거고요.
혹시 질문하고 싶으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든 하셔도 됩니다."
"아 그럼 여기 혹시 재료를 구입하려고 하면 어디서 살 수 있죠?"
"재료라고 하심은 어떤 재료를 말씀하시는건가요?
커피콩이나 곡물류는 흔히 구하실 수 있으실거고,
주류는 조금 멀리 서지스까진 가셔야 할거에요.
이 마을에는 그저 자연물이 위주로 거래되는 수준이라서
큰 걸 기대하시긴 어려울 테니까요.
아, 그래도 곡주나 과실주는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서지스에 생각보다 자주 가야겠네요."
"그럴 수도 있는거겠죠. 보통 카페를 한다고 하면 서지스가 더 나을텐데
어째서 여기까지 오신건지 그 이유를 좀 듣고 싶습니다.
조합도 서지스가 가까우니까요. 사람들의 왕래도 많은 편이고."
"저는 서지스도 여기도 처음 와 본 거였거든요. 그래서 잘 모르고 온 거에요.
그리고 추가적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뭐랄까 저는 왁자지껄한건 그닥 선호하지 않아서요.
무엇보다 저는 이런 편안한 분위기 자체를 좋아해요.
사색하고, 연구하고 그런거요."
"연구요?"
"더 나은 음료를 대접하기 위해서죠."
"아, 그런 거라면 시그니처 메뉴도 만드시겠네요."
"그렇기는 한데 아직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편이라서요."
"언젠가 가게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개발정신을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이전에 저도 그런 쪽에서 일을 했던지라."
"아, 가게에 오시면 드릴게요."
효과를 스스로 체감하기 쉬운 포션을 만들어주지는 않겠지만
일반 음료라거나 약한 정도의 포션이라면 대접해도 크게 나쁘지 않을 테니까.
다만 재료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서지스의 입구에 있는 그 커다란 교회를 별 수 없이 마주쳐야 한다는건
내게 상당히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나는 루나르씨의 손에 이끌려 원탁에 앉은 남자들과 합석했다.
루나르씨는 그들에게 나를 점잖게 소개했다.
"여기 있는 이 분이 마을에 새로 전입오신 에리아씨입니다.
마을 외곽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계시니까 한번씩들 들리시고,
오늘은 잠깐 같이 이야기라도 하면 어떨까 해서 불렀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첼이에요.
여기 있는 사람은 저희 형이고, 이름은 겔이에요."
첼과 겔이라고 서로를 소개한 남자들은 이미 테이블 위에 카드를 늘어놓고
무언가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보였는데, 익숙한 트럼프카드와는 조금 다른
녹색과 보라색의 트럼프 두 벌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두 분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모험가 형제였어요. 7급과 8급. 그러다가 이 마을에 오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눌러앉아버렸죠. 그것도 갱신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루나르씨가 저희를 종종 고용하시니 큰 걱정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해서 이전만큼 현역으로는 활동 못하겠더라구요."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 첼. 루나르씨는 물론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시는 건 맞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실력이 예전에 비해 녹슬었을 거라고 생각 안해."
둘의 외모는 독특한 편이었는데 그건 불편하다거나 기이한 그것과는 달랐다.
사람 각각을 놓고 보면 문제가 없지만 둘이 형제라는 점이 이상한 것이었다.
동생인 첼은 상당히 키가 멀쓱하고,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였다.
살이 후덕하다거나 말라서 비틀거린다거나 할 특징 없이 평범한 남자였으므로
나는 그의 나이를 30대 정도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겔은 조금 달랐다. 키는 나 정도의 작은 크기에, 얼굴은 갸름한 미남형이어서
수염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매끈한 피부에 어딘지 모르게 탄탄해 보이는 팔다리는
그가 상당한 관리를 꾸준히 병행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오히려 첼의 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젊어보인다는게 나의 의견이다.
잘 쳐줘도 20대에 겨우 들어선 것 같은 외모에, 매끄럽게 늘어지는 머리칼.
부드러운 눈매.내가 마녀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애정이 필요했다면
상당히 호감을 느꼈을 외모였다.
내가 물론 성적으로 그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비호감으로 작용할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겔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테이블에 올리면서 자신의 동생에게 말했다.
"뭐해? 빨리 카드 넘겨."
"알겠어 형."
첼이 내 자리 앞에도 카드를 내려놓았다.
하트 3과 스페이드 2, 그리고 스페이드 8과 클로버 J, 클로버 K가 있었다.
우리는 순서대로 돌아가며 카드를 쳤다.
게임은 익숙한 캐슬 메이킹이었다.
같은 문양의 K Q J A 네 종류를 순서대로 모으는 게임이다.
바닥에 깔아놓은 카드뭉치에서 한 장씩 카드를 바꿔가며 덮는 동안,
나의 기억력을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연이은 게임에서 꾸준히 승리했다.
내가 몇 판을 내리 이기기 시작하자 겔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기 아니야? 무슨 게임을 네 판을 연속으로 이기는거야?"
"제가 기억력이 조금 좋아서요."
"그게 기억력으로 되는일이야?"
"그럼 뭐가 좋아야 이길 수 있는데요?"
"아니 원래 이거 다들 운으로 플레이하지 않아?"
"진정해 형..."
첼이 겔을 말리며 피식 웃는다.
화가 난 것 같은 겔이 자리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카드를 빼앗아가더니
직접 섞어서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케이, 제대로 해."
그러나 결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내가 또 캐슬을 완성하고 나면 겔은 카드를 엎어버리고 삐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표정을 구겼다.
"진정하시고 이거라도 드세요."
나는 가방에서 에스테리카를 꺼내 컵에 따라주었다.
고소한 향과 커피향이 균형있게 느껴진다.
겔은 아무 말 없이 그걸 받아 마시더니 눈썹을 씰룩거렸다.
"에리아씨, 카페를 한다고 했었죠?"
"네."
"자주...갈게요."
겔은 그렇게 말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첼, 카드 돌려."
첼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형을 만족시킨 커피는 오랜만이에요.
형은 상당한 미식가거든요."
"내가 미식가가 아니라 그 녀석들이 사기꾼이었어.
음식은 할 줄도 모르면서 가게를 내고 돈을 받는건 사기꾼이야."
"제 커피는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겔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그냥... 마실만한 커피를 찾았다고 느낀 것 뿐이야."
그의 얼굴이 약간 붉어보였다.
첼은 어딘지 음흉해보이는 표정으로 겔을 바라보면서 쿡쿡 웃는다.
"형. 난 알았어. 응원할게."
"뭐가 임마! 가만히 안있을래?!"
일방적으로 놀려대는 첼에게 겔이 화를 냈지만 상황에 큰 변화는 없었고
결국 우리는 다시 카드를 깔아두고 다음 게임을 진행했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나는 몇 번인가를 더 이겼다.
"에리아씨."
"네?"
"몇 살이에요?"
"저는 보시다시피..."
"20대 초반 맞죠?"
"아뇨, 그것보다는 조금 더 많은데, 그렇다고 할게요."
괜히 피곤해지기 싫어서였다.
그걸 들은 첼이 말을 붙인다.
"저는 스물 넷이에요."
스물...넷?
믿기 어려웠다.
누가 보더라도 서른은 족히 넘을 것 같았는데. 마흔이라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그 얼굴은 너무나도 노안이었고,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았다.
"첼, 너 이새끼. 또 너 때문에 나까지 늙다리로 오해받잖아."
"미안해 형, 화 풀어."
"하아... 저는 스물 다섯입니다."
"아, 생각외네요."
"역시 그렇죠? 이 마을에는 스물 셋 일때 왔었는데 말이죠.
2년 정도 전이네요."
"그렇군요."
내가 적당히 대꾸하면 첼은 내게 뭐라도 더 말을 해보려고 하는 눈치였고,
겔은 왠지 동생인 첼과 얽히기 싫어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아까까지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였다.
내 옆에 앉아있었던 루나르씨는 말 없이 슬그머니 웃으며 내가 따라준 에스테리카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루나르씨와 첼은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걸 모르는 것은 나와 겔 뿐이었다.
"그, 카드 안하세요?"
차라리 이런 어색함 보다는 게임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신이 난 첼이 카드를 섞어 돌렸고 나는 다시 카드를 받아들었다.
"카드놀이 좋아하세요?"
첼이 물었다.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모여서 하는건 재미있네요."
"그럼 평소에는 어떤 걸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시나요?"
첼이 연이은 질문을 했고, 나는 그냥 연구라고 가볍게 일축해버렸다.
"연구요? 독특하네요. 보통은 쇼핑같은걸 좋아하시던데."
"글쎄요. 쇼핑할만큼 넉넉하지도 않고,
물질이 주는 순간적인 쾌감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더라고요.
나중에는 그리 크게 기쁘지도 않아요. 길어야 일주일이죠.
결국 그건 소모전일 뿐이에요."
첼은 내 대답에 살짝 질렸다는 듯이 눈을 찡그리고 카드를 건네주었다.
클로버 1, 클로버 5, 클로버 K, 하트 2, 다이아몬드 2였다.
그닥 좋은 패는 아니었다.
"이번 게임도 이기실 것 같으신가요?"
첼이 내게 은근한 웃음을 띄우며 물었다.
"해봐야 알겠죠. 장담은 못하겠어요."
왠지 괜한 열의를 불태우는 겔과, 흐뭇하게 웃는 루나르씨를 보고
적당히 이긴 후에 빠지는 것도 좋은 결정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게임에서는 이상하게 퀸이 모이지 않았다.
빠르게 다른 모양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게임의 포인트는 빠르게 패를 보고 조합이 가능할 모양을 선택하고
유동적으로 바꾸는 판단과, 미리 내가 필요한 카드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파악하고
결국 반드시 필드로 내려오는 카드를 빠르게 집어내는게 중요하다.
그리고 겔은 아까와 비견해 지금 누구보다 게임에 몰입해있었고,
확실히 아까와는 다른 집중력으로 카드를 모았다.
왠지 그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니 더욱 더 지고싶지 않아졌다.
이번 게임이 끝나면 나가려고 했던 생각은 머리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내 기억력이 맞다면 내가 필요한 Q는 그가 가지고 있었다.
이 게임에서 패의 매수가 5장인 것은 내가 필요한 패를 모으는데도 이유가 있지만
상대의 패를 방해하고,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확실하지 않다면 차라리 캐슬카드를 집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분명 다시 상대의 손에서 내려올 테니까.
살짝 마른 입술을 커피로 적셨다. 느슨한 사람들 사이에 오직 나와 그만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심리전을 치루고 있었다.
나이 먹고 이상한데 불이 붙어서 인색하게 뭐하는 짓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기어오르려고 하는 그 싹을 밟아주는데서 쾌감을 느낄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어차피 시간은 보내야 했고, 저녁에는 체헤게를 찾으러 가야했다.
그럼 그 전까지는 느긋하게 카드나 조금 치다 가도 되겠지.
빠르게 승리하고 나가려고 한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묘한 자존심이란건 그런 것이었다.
마녀로서 혹은 새로 이 마을로 온 입주민으로서? 그것도 아니라면 이제껏 혼자 지내온 외톨이의 울분?
이유는 정확히 재단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나는 집중해서 카드를 노렸고 그렇게 28바퀴를 더 돌고 나서 난 당당하게
캐슬완성을 외칠 수 있었다.
"아.. 또 졌나. 정말 잘하시네요."
겔이 그렇게 말했다.
아까와는 다른 표정. 분하다기보다는 차라리 후련하다는 느낌을 한 그는
이마에 땀방울까지 흘리고 있었다.
"저는 저 위쪽 푸른 지붕의 벽돌집에서 살아요."
그가 자신의 주소를 말했다.
"네."
별 생각 없이 대답하자 그가 다시 말했다.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그때 같이 또 하시죠."
"그러세요."
나는 기분좋게 대답했다.
첼이 나를 보며 말했다.
"콜린에 오신걸 환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