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스승과 제자
헬렌은 들고있던 맥주를 내려놓으며 내게 윙크를 날려보였다.
"나도 뭐 사랑이니 로맨스니 말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은 하는데,
어쨌든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거잖아? 네 로봇이랑 교감이 된다는 거?"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 내가 만든거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그냥 돌덩이를 캐와서 영혼만 불어넣은 거니까.
"굳이 이런 콜린같은 마을에서 로봇을 수리하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수리하는게 더 낫지 않아?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말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마르커스는 생각보다 실력있는 기술자가 아니야."
"렌, 그건 누누이 말하지만 자네가 나에게 그닥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생각하네."
"나를 렌이라고 부르지 마. 나도 누누이 말했을걸?"
"미안하네. 입에 붙어버려서 말이야."
"네가 그러니까 마을 꼬마들이 정말 우리가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이라고 생각하잖아.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게 상당히 불쾌하다고."
"불쾌하기 까지 한 건가..."
"키도 작지, 수염이 덥수룩한데다 맨날 기름때 끼어서는 무드라고는 요만큼도 없고,
칙칙한 기계만 하루종일 만지고 있는데다가 옛것에 집착하지."
"뭐 하나 틀린 말이 없어서 더 아프구만."
마르커스는 그렇게 말하며 스패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대화하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의자를 두고 앉았다.
"나는 그렇게 사는게 운명이고 천직일세. 고칠 수는 없지.
그게 곧 나라는 증명이니까. 그걸 포기하면 기술자로서의 마르커스는 죽어버리고 만다네."
"포기하라고는 한 마디도 안했어. 그런 기술자 마르커스랑 얽히는게 탐탁치 않다고 했지."
"처음 만났을 때 까지만 해도 이렇게 까칠하지 않았잖나 헬렌."
"그때는 적어도 면도는 제대로 하고 다녔잖아 마르커스. 어쩌다가 그렇게 된건데?"
그 말에 마르커스는 자신의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메만지며 말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그닥 잘보일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야겠지."
헬렌은 술기운에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주접은. 병신."
헬렌이 다 마신 맥주캔을 손으로 찌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마르커스가 작업중이던 체헤게의 몸체로 비틀대며 걸어가서는
쪼그려앉아서 이곳저곳을 만져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당시의 기술력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겠네.
지금은 확실히 더 편하고 나은 기술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런걸 정말 실전용으로 쓴다고? 장난하는 건 아니었나봐?"
마르커스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장난을 치기에는 너무 흥미로웠지.
저 로봇은 단순히 구식의 유물 같은게 아니었으니까.
영기술이 기어이 기술의 영역을 대체해버린 거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기술이 영기술의 영역을 아직 뛰어넘지 못한 거겠지."
"예사롭지는 않았는데 정말 영기술이었어?"
이런 식으로 알리고 싶은건 아니었지만 결국 또 콜린을 떠날 준비를 해야하나 싶은 생각에
말없이 맥주만 홀짝이고 있으면 헬렌이 말했다.
"대단하잖아. 요즘 세상에 영기술은 사제나 성기사 아니면 보기 드문데!"
"네?"
"나는 그런거 처음 봤으니까 말이야. 어쩐지, 대장간 출신이 아닌데도 로봇을 만든다니 신기하다 싶었어.
나는 영기술은 진짜 하나도 모르니까 말이지. 크으... 나도 원래는 영기술을 배우려고 했었거든.
그러다가 어쩌다보니 기술직이 되긴 했지만 말이야. 좀 동경하고 있었거든. 영기술이라는거."
"이건 그렇게 대단한건 아니에요. 그저..."
"어, 알고있어.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 영기술이라고 말하는 사기꾼은 많았으니까.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고 하면 피곤할 법도 하지.
요즘 영기술은 엔터테인먼트에서 실용직까지 인기가 많으니까!
너 그래서 콜린으로 온거 아냐? 사람들의 관심을 피해서?"
"그렇게도 볼 수 있기는 한데요."
"그렇구나! 너같은 아이가 콜린까지 온 이유가 뭘까 싶기는 했었는데!
좋았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특별히 비밀로 해줄게!"
결국 원하던 대로 되기는 했다.
과거와는 다른 이유로 존재를 숨기게 되었지만.
시대의 변화를 또 피부로 느끼게 된다.
혹시 정말 그런게 아닐까 했던 생각이 이렇게 현실로 다가온다는건,
생각보다 그렇게 마음편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마녀가 살기 상당히 편해진 세상이군.]
[그러게. 마녀를 위한 나라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이렇게 바뀌니까 나도 어색하다.]
[네가 알던 그 지식도 결국 변해버렸군.]
[생각은 하고 있었어. 어렴풋이. 혹시 정말 그런건 아닐까 하고.]
[그런 것 치고는 스스로도 부주의 했다는건 인지하고 있겠지?]
[....]
"표정이 왜 그래 에리아?"
"아...아니에요."
"혹시 괜한 참견이었니?"
"아뇨, 감사합니다."
헬렌은 들고있던 맥주캔을 던져 쓰레기통으로 넣으면서
주머니를 뒤적여 사탕을 꺼냈다.
"사탕 좋아해?"
"아뇨, 그다지요."
마르커스가 사탕을 그녀의 손에서 주워들고 말했다.
"에리아는 그렇게 어린 아이가 아닐세. 알고 있겠지만."
"사탕은 아이들만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누가 그러는데?
그것도 대장간에서 배운 구시대의 발상인가?"
"하아... 내가 가르칠 때 까지만 해도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하던 아이는 아니었더랬지...
대체 어떻게 이런 아이로 변해버린건지. 돌아올 수는 없겠는가 헬렌."
"선생님으로서 대우해주던 5년동안 너무 정이 들어버렸지. 아직도 이렇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렸으니."
"그렇게 말하니까 꼭 후회하는 것 같은데 내가 틀렸길 바람세."
"후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뭐 서로 애틋하게 생각할 사이도 아니잖아?"
"하아... 그래, 좋을대로 하게."
한숨을 내쉬며 털썩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마르커스를 보고
헬렌이 내 어깨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놀랐어?"
"아, 조금은요."
"내가 갓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엄마는 날 저 골초에게 떠맡겼어.
당시에 영기술의 몰락이 처음 대두되고, 점차 자연소재를 기반으로
실생활에 유용한 걸 만드는 기술자들이 떠올랐거든.
말하자면 나름 블루 오션일때 뛰어들었다고 할까?
정작 그런 딸내미가 기술은 커녕 그림이나 그리면서 밥 빌어 먹고 살 줄은 우리 엄마도 몰랐겠지.
내가 대장간에 막 들어갔을때, 저 사람이 내 선생이었어."
"그때는 선생님~선생님~ 하면서 깍듯하게 말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아는 사람이 없었는걸. 믿을 만한 사람이라곤 저 아저씨 뿐이었고.
어린 나이에 술을 배운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그게 정신적으로는 도움이 된다는걸 배운 시기였지.
아마 그 교훈이 이제껏 마르커스한테 배운 모든 기술보다 유용할걸.
내가 저 사람 아래에서 배운거라고는 5년간 옮아버린 똥고집이랑 식습관 정도?"
"진작 파문을 해버릴걸 그랬구만 헬렌. 그렇게 자네가 날 싫어할 줄 몰랐지."
"내가 대장간을 졸업하면서 바로 선생님에서 마르커스로 호칭이 격하했어.
당시에 나처럼 대장간을 조기졸업한 천재는없었다니까?"
그 말에 마르커스가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대장간에는 졸업이란 개념이 없네. 중간에 도망친거지.
대장간에서는 끝없는 기술이 개발되고 공유되지.
새로운 자원, 새로운 기술, 새로운 인력.
이 모든 것들이 늘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술을 이루어내는데,
졸업이라니 언어도단에 가깝다네. 자신이 만족하거나, 더는 따라가지 못하거나,
열정이 식어버리면 그때는 대장간을 떠나는 걸세."
"나는 결국 밥벌어 먹는 정도로 살고 있으니까 졸업이 맞지."
"내가 자네였다면 대장간에 발을 붙이지 않았을걸세.
지금 자네는 그림을 그리고 나무를 깎는게 전부잖는가."
"그치만 분명한건 우리 아틀리에를 찾는 사람이 너의 이 비루한 공방보다 많다는거지."
"크흠..."
마르커스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손에 든 담배를 한껏 빨아들였다.
헬렌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경쓰지마. 우리 이래뵈도 사이 좋으니까."
"그래 보여요."
"다행이네."
내가 빙그레 웃어보이자 그녀는 표정을 지우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래도 오해하지 마! 너 그 표정 좀 불안한데. 우리는 그냥 옛 사제지간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괜히 나랑 저 골초를 엮으려 들면 가만 안둬!"
"그럴 생각 없어요."
"하긴. 그렇기는 하겠네. 맥주는 다 마셨어?"
"아뇨. 아직이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아직 시원하긴 했지만 탄산이 빠지고 거품도 사라져 나름 밋밋한 맛이다.
"너 맥주 꽤나 잘 만들던데. 너희 가게 가서 한잔 더 할래?"
"오늘 가게는 휴업이에요."
"에이 씨, 아쉽게 됐네. 하긴 그렇다고 했었지."
"저희 집으로 가시면 어때요?"
"진작 그럴 것이지. 말이 통하네. 좋아, 가자!"
나는 체헤게의 머리를 담당했던 영혼 구동 회로가 쓰인 돌덩이를 들고 일어섰다.
헬렌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신발을 슥슥 그었다.
아무래도 바닥에 묻은 재나 쇳가루가 신발에 묻은 듯 보였다.
"어으 기름냄새야... 이래서 여긴 자주 오기가 싫어. 술맛이 떨어진다니까.
어이, 마르커스 알아들어? 빨리좋은 여자 잡아서 결혼이라도 하라고.
그래야 나랑 좀 덜 엮일거 아냐. 이 가게도 좀 정돈이 될거고, 그리고 그 씩을 수염도 밀어."
마르커스는 그새 상당히 짧아진 담배를 물고 말했다.
"그래, 충고 고맙네."
"가자 에리아."
헬렌은 내 손을 잡고 당당히 걷다가 내리는 비에 멈춰섰다.
"우산 있어?"
"네. 여기요."
우산을 건네주자 그녀는 우산을 쓰고 비틀대며 앞으로 걸었다
내 손을 놓지 않은 그녀의 손에 상당히 힘이 들어가서 조금 손이 아팠지만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우산을 나란히 쓰고 우리는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 문 앞에 서서 헬렌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네 가게, 이름이 뭐야? 간판이 없어서 몰랐네."
"아, 그냥 카페에요."
"카페같이 생기지도 않아놓고 간판도 없고 이름도 없어?
이러니 장사가 안되지. 어디보자... 좀 진부하고 고전적이긴 한데, 마녀의 휴일 이런건 어때?"
"네? 마녀의 휴일이요?"
"그래! 가게 이름말이야."
"왜 하필 마녀죠?"
"글쎄, 별 이유는 없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영기술이라고 하니까 말이야.
그리고 넌 뭐랄까 분위기가 신비롭거든. 알아?"
"신비롭다고요?"
"그래, 나쁘게 말하면 좀 정이 없달까? 너무 차가워. 꼬맹이 주제에."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 아무래도 대답을 보아하니 고쳐질 것 같지는 않지만.
아, 그리고 이왕이면 내부 인테리어도 조금 바꿔보면 어때?"
"인테리어를요?"
"그래, 가게 규모나 테이블 수같은건 내가 관여할건 아니지만
적어도 분위기 정도는 손보자는 말이야. 너무 특별할 것 없는 나무집이잖아.
물론 편안한 이미지가 있기는 한데, 이 마을은 죄다 비슷한 테마라서
예술가의 시선에서 보면 좀 질린단 말이지. 개성이 없어."
"좀 도와주실래요?"
"그래, 자세한건 들어가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할까?"
그녀는 그렇게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가게 문을 열고 손을 씻은 후에 테이블에 앉은 그녀에게 물었다.
"맥주 드실거죠?"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