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취중담
내가 디스펜서에서 맥주를 따르면 헬렌은 받자마자 술을 벌컥이며 들이켰다.
취한건지 아닌건지 잘 모를 표정으로 그녀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 이렇게 기분이 알딸딸해야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니까?"
"확실히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네요."
"너도 앉아서 마셔."
"저는 음료를 계속 만들어야 하는데 취해버리면 안되잖아요?"
"그런거 신경 안쓸테니까."
그녀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자신의 옆 빈자리 의자를 가리켰다.
내가 맥주를 들고 그 자리에 앉으면 그녀는 내 잔을 가만히 보더니 자신의 잔을 가져다 부딫힌다.
건배정도는 해줘야 술 마실 맛이 나지 안그래?"
"술을 그렇게 막 좋아하지는 않아요."
"너 정말 재미없어."
"어쩔 수 없는걸요."
"후우... 그래, 아직 막 기분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인테리어 이야기로 돌아갈까?"
"모나지 않은 인테리어로는 안될까요? 왠지 좀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요.
꼭 아기자기한 아늑한 느낌을 포기해야 하나 싶어서 걱정이 되네요.
더 마니악해지지 않을까요?"
"마니악해진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네.
마니악해진다는건 원래는 마니악하지 않았던게 마니악해진다는 이야기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제정신인것 같은 느낌은 아니네요."
"어쨌든 틀린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다시말해서,
원래부터 이 가게가 마니악한 가게였다는걸 인정한다는 이야기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가게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뭐 이미 올 사람들은 올거고, 안 올 사람들은 안올텐데 어떻게 만들던 자유 아냐?"
"그래도 그건 제 자유잖아요. 헬렌씨의 자유는 아니에요."
"알고있어. 난 조언을 해 주려는 것 뿐이지. 디자인을 바꾸면 어떻겠냐는 조언에 찬성한건 너지?
나는 그냥 방향성을 제시해주는거야."
"어렵네요."
"예술이 쉬운건줄 알았어?"
"예술이 어려은 거랑은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에요.
그래서 어떤 디자인을 추천하시는데요?"
"전체적으로 조명을 차분해지는 색으로 바꾸면 어떨까 싶어. 조금 블루 계열로.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 테니까. 그리고 좀 전체적으로 화사한 지금 조명이랑 다르게
군데군데 포인트를 줘서 조명을 설치하면 색다르겠지?"
"저희 가게는 카페인데요. 사진 인화용 암실이 아니라구요.
더욱이 밤에는 호프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분위기가 안 살잖아요?"
"호프였나? 나는 한 번도 호프라고는 생각한 적 없어.
술 파는 카페정도로 생각했지. 나만 그런건 아닐걸? 굳이 따지면 펍 아냐?"
"그런가요?"
"내가 제안하는 디자인은 호프에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펍에는 상당히 어울리거든."
"펍은 안돼요. 위스키도 그렇고 술 값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요.
단가가 올라가면 당연히 전체적인 메뉴 값이 올라갈거고요.
금전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운 가게가 모토라서요."
"어쩐지 너희 가게 음료는 너무 저렴하다 했지. 그걸 유지하는 것도 아이덴티티다 이거지?
그런데 잘 생각해봐. 나는 가게를 펍으로 바꾸라고는 안했어.
분위기는 그쪽에 더 맞는 것 같으니까 가게 분위기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추천한거지.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가게 내부에 블라인드를 달면 어때?"
"블라인드요?"
"낮에는 지금 이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을거아냐?
조명을 끄고 블라인드를 걷으면 자연광이 들어올 테니까.
창문을 다 뜯어내는건 수지에 안맞고.
밤에는 블라인드만 가지고도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으니까."
"너무 복잡하게 들어가는건 성미에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동감이야. 그렇지만 카페나 호프, 바같은 장소는 다른 장소에 비해서 분위기와 무드가 좌우하는 영역이 더 많지.
손님들을 유치하고 어떤 이미지를 남기느냐가 유달리 중요한 업종이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벌써 판단의 일정 부분을 가지고 들어가기도 하니까.
내가 제안한 내용은 그렇게 심각한 편도 아니고.
간단하게 요약해볼까? 블라인드, 조명 색, 조명 운용 방식. 세가지 이야기했어."
"까다롭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였나요?"
"그래 원래 낯선 단어들은 까다롭고 어렵다고 느끼기 마련이야.
아, 술이 다 깬 것 같은데 맥주 말고 조금 센 술로 줄래?"
"위스키는 없어요. 보드카나 진 정도만 있는데 괜찮으세요?"
"나배주 만든거 있다며?"
"그건 단품으로 팔아본 적이 없는데... 알겠어요."
내가 나배주를 꺼내 잔에 따라주면 헬렌은 그걸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대장간 출신이라고 말하면 가끔 눈치 없는 사람들이 엉겨붙었어.
왜 그런거 있잖아. 취미가 같다고 혼자 들떠서 말 붙여 보려고 하는 사람들.
자기가 얼마나 피곤한지 모르고 들이대는 부류."
"대장간이 그렇게 아무하고나 이어질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닐텐데요?"
"그래, 그런데 워낙에 화끈한 장소긴 하니까 말이야.
하루 종일 불 앞에서 쇳덩이만 때려대면 엄청 덥거든.
땀 범벅이 되어 나와서 가끔 그 앞에서 옷 벗고 쉬기도 하고 그래.
그게 이전에는 대장간 내에서나 쉬쉬하던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시대가 바뀌고 하니까, 일반인도 그런 이야기를 주워듣는단 말이야.
우리는 물론 그게 대장간 사람들이 그만큼 열정적이고 털털하다고 받아들이고 말지만,
대장간에 간 적이 없는 녀석들은 잘 모르잖아?
내가 대장간 출신이라는걸 알고 나면 대쉬 성공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건지."
"특수한 환경이 만들어낸 습관을 개인의 욕망과 이어 생각하는 거겠죠."
헬렌은 나배주를 입에 가져다대고 말했다.
한 잔을 마신 것 뿐인데도 알콜 향과 함께 어딘가 독특한 향이 풍긴다.
"어으 매워. 이거지, 이 아린 맛. 도수는 낮지만 꽤 훌륭한데?"
알싸한 향이 감도는 술냄새는 그 향으로도 입을 마르게 한다.
목 너머로 넘어갈 때부터 톡 쏘는 알싸한 매운맛 때문에
마신 후에 그렇게 공기가 달게 느껴질 수가 없다고 한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그때 결심했어."
"뭘요?"
"결혼은 반드시 대장간 출신이랑 하겠다고.
내 뒤틀린 성격을 받아줄 사람이 대장간 밖에서는 없을 것 같아서."
"좋은 사람 만나실거에요."
"에이 씨, 이게 다 마르커스 때문이야. 이상한것만 배워가지고.
괜히 목욕하고 난 후에 요구르트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고."
"그런건 어떻게 배우신거에요?"
"뭐, 한시간 뒤에 만나자고 해서 각자 목욕하고 나오는거야.
나오고 나서 꼭 마르커스가 요구르트를 사줬거든."
"사줘요?"
"응, 선생이었으니까. 덕분에 지금도 샤워든 목욕이든 하고 나면 요구르트를 마셔야 해.
엄격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만 마신다고. 우유에 발효된 요거트 원액을 섞은 설탕 안들어간 거.
이런건 어디서 잘 팔지도 않더라니까. 덕분에 시간 날 때마다 집에서 요구르트 발효시킨다고 고생이지."
"확실히 그렇겠네요."
"아무튼 이제 네 이야기를 좀 해볼래?"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마시다가 흠칫 당황했다.
이야기를 하기에 너무나 길었고,
기억나는 부분도, 나지 않는 부분도 있는 나의 과거는 불분명한 것이었으니까.
"음,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으신데요?"
"직업 특성상 힘든 일이라거나 없었어? 아니면 이제껏 네가 경험한 이야기나."
"아... 그러면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요?"
"그래, 그런거 말이야."
"혹시 그러면 몬갈리오라고 아세요?"
"몬갈리오?"
[오 드디어 아는 이야기가 좀 나오겠군.]
잠깐 신경을 쓰지 않았던 체헤게가 말했다.
[이제와서 끼어드는 것보다는 잠이나 자는게 나아보이는데.]
[영혼이 잠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어디부터 들었어?]
[들을 부분은 전부 들었지. 왜, 불편한가? 사라져주고 싶지만 이런, 다리가 없군.]
나는 그 돌조각을 조심스레 들고 말했다.
"몬갈리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선 이 돌을 먼저 방에 가져다 놓고 올게요."
"응, 그래. 근데 그 돌은 뭐야? 혹시 중요한거야? 아까부터 소중히도 챙기던데."
"음...그냥 제 과거를 기억하는 돌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겠네요."
"그거 왠지 멋진데."
"멋지긴요. 생각보다 엄청 짐덩어리에요."
나는 말을 마치고 체헤게의 머리를 들고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욕실에 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 돌을 집어넣었다.
영혼회로가 그 정도로 지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영혼이 이런다고 괴롭지도 않겠지만 적어도 대화할 상대가 없는 곳에서
홀로 물 속에 갇혀있다는 감각은 분명 그렇지 않을 때보다 불쾌할테니까.
[이건 정말 너무한다고 생각 안하나?]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헬렌이 말했던 분위기의 중요성이 조금 이해가 가거든.]
[실험용 모르모트 신세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데.]
[알겠는데, 조심하라고. 물에 젖어서 혹시 약한 부분이 부서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영혼째로 거기 갇힐테니까. 그런다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나는 일부러 돌을 툭툭 건드리고 욕실 문을 닫았다.
차가운 물 속에 갇힌 채로 암실에 방치되는 기분은 어떤지 나중에 꼭 들어봐야지.
일층계단으로 다시 내려오면 헬렌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녀왔으면 빨리 몬갈리오 이야기를 해줘."
"예전에 몬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당시에 마을에서 아주 존경받는 사람이었어요.
마을 사람 모두가 그를 신뢰했고요. 마을의 주축으로서 그는 사람들을 규합해서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서 무역을 시작했죠.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빠르게 발전하는 마을에 만족했죠."
"좋은 사람이네. 그나저나 몬갈리오라. 들어본 것 같은데."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무역을 통해 띄운 배에서 한 소녀가 발견되었어요.
이름을 물어도 소녀는 확실하지 않다고 대답을 꺼렸고요.
작은 소녀는 사람들을 좋아했어요. 몬갈리오는 책임지고 소녀를 키우겠다고 했죠.
그때 저는 그 소녀의 얼굴을 기억해요. 어디서 온 건지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헤메이다 우연히 올라탄 화물선에서 그 마을로 오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안타깝게 여겼어요.
그리고 시간이 흘렀죠. 소녀는 마을에서 사라졌어요."
"왜? 갑자기 사라졌다고?"
"네. 마을 사람들은 소녀를 걱정했어요. 그리고 오랜 시간 소녀를 찾아다녔지만
결국 소녀는 찾을 수 없었어요. 몬갈리오만이 포기하지 않고 소녀를 찾아다녔죠.
저도 그 사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녀를 찾는 모습에는 조금 놀랐으니까요.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네요. 오랜 시간을 고생해서 몬갈리오는 결국 소녀를 찾아냈어요.
찾던 소녀를 발견하고 그는 소녀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왔죠."
"그러나 소녀를 걱정하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남아있지도 않았죠.
몬갈리오가 소녀를 데리고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몬갈리오는 병으로 죽었어요.
아마 소녀를 찾으러 다니던 와중에 지병이 도진 모양이죠.
몬갈리오의 장례식은 아주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3일간 사람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졌고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비웠다.
헬렌의 표정은 흥미로운 눈빛보다는 어딘가 진지한 의문을 띄는 것 같았다.
짧은 공백이 이어지고 나는 다시 맥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4일째 되던 날에 사람들이 몬갈리오의 집에 더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자
소녀는 홀연히 다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몬갈리오의 무덤이 파헤쳐진 것도 그 시기였어요.
날마다 몬갈리오의 뼈가 광장 한가운데 뿌려져있었죠.
첫날은 머리뼈, 둘째날은 대퇴골, 셋째 날은 복사골, 넷째날에는 갈빗대.
사람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죠. 그게 몬갈리오의 뼈라는걸 모두 알고 있었거든요.
결국 사람들은 몬갈리오의 무덤을 다시 열어 그 안으로 뼈를 집어넣기로 했습니다.
몬갈리오의 관을 열어보자 그 안에는 몬갈리오의 유해 대신 소녀가 죽어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녀의 시신을 꺼내 불태우고 몬갈리오의 뼈를 다시 그 안에 집어넣었어요.
몬갈리오의 뼈를 소녀의 시신보다 우선했던거죠."
"가끔 사람들의 가치관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후로 소녀를 마녀로 몰아가기 시작햇어요. 몬갈리오를 죽인 거라고 하면서요.
뭔가 주술을 사용해서 죽였을거라고 누가 맨 처음 말했는지는 몰라요.
그러나 의심은 삽시간에 불어나고 말았죠."
"선동이란건 생각하는 것보다 빨라. 아마 누구라도 사람들의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나와
다른 의견을 말하기가 힘들었을 테지."
"그래요,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소녀를 따라 마녀로 몰리게 되었죠.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소녀부터 노파, 아주머니, 처녀.
그들은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죽였고,
자신들이 죽인 시체를 잊기 위해 술집으로 모여들었어요."
"오, 기억났어. 그거 분명 역사책에 써있었다고. 본노르제 몬갈리오.
마녀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이라고."
"네, 덕분에 술집이 부흥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사람들이 빠르게 미쳐갔죠.
알콜 중독도 아마 그 원인중에 하나였을거에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네가 알고있어?"
"음, 몬갈리오 사건으로 마녀로 몰려 처형당한 사람중에 제 할머니가 계셨거든요."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형편좋은 거짓말, 더욱이 진실의 여부를 알수 없는 약간의 거짓말은
사람을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덕분에 저는 술집을 열고 카페를 하면서
어머니께 그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술을 판다는건 사람을 죽이고 태연하게 찾아와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는 피에 젖은 남자들을 위로하는 척 하는
까다롭고 좆같은 일이라고요. 그게 지금으로서는 직업 스트레스 1순위네요."
"그래, 들은 이야기치고는 상당히 자세하네.
그래서 그 소녀는 어떻게 됐대?"
"아 죽은 소녀요?"
"어. 궁금하네."
"글쎄요. 그것까지는 어머니한테 들은 기억이 없어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맥주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