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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리모델링 (22/303)



〈 22화 〉리모델링

헬렌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말했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피곤할만한 이야기는 맞는 것 같은데,
그래도 그게 지속적으로 너의 일상에 후유증을 남기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


"그렇다면 그럴 수 있겠죠. 덕분에 웃음기가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좀 큰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맥주를 달그락 거리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안주가 더 필요하세요?"


"아니, 괜찮아."


헬렌은 살짝 머뭇거리는  같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어깨를 툭툭 치고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는 잠시 지나서 돌아왔다.


"화장실은 생각보다 깔끔하네."

"소박한 편이죠."

"그런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그닥 안했는데."

"이전에는 취해계셨잖아요."


"깨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테이블 위에 빈 잔은 계속 늘어갔다.
나배주가 모두 동이 나고 헬렌이 내려놓은 빈 잔이 17잔이 되고 나서야
그녀는 툭 쓰러졌다.
테이블에 고개를 묻고 새근새근 졸고 있는 그녀를 나는 조심스레 들어 옮기려 했으나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다못해  옷장에 있는 후드를 꺼내 덮어주었다.
참 오래 된 후드지만 쓰임새 하나는 확실하다.
내일 아침에 깨워서 집으로 돌려보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밤이 늦었는데도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린다.
똑똑 노크소리에 문쪽을 바라보면 마르커스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빗발이  거세지는 바람에 우산을 쓰고도 다리는 함뻑 젖은 그는
내가 문을 열자 가게로 들어와서, 헬렌을 부축해 들었다.

"미안하네. 후우... 아직도 술조절을 이렇게 못하니. 얼마나 나왔는가?"


"돈은 안받아도 괜찮아요."

"미안하네.. 정말, 나이는 찰 만큼 차가지고 아직도 자기 관리를 못하니...
스승은 그만둔지 10년이 더 지났는데 말이지."

"데리러 오신거에요?"


"아마 이렇게 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말이네.
다행히  사고는 없었던 모양일세."

"네. 사고는 없었어요."


"다음에 정식으로 사과하러 오지."


그렇게 말하고 마르커스는 헬렌을 업고 한 손으로 그녀를 받쳐들고
다른 손으로 우산을 든 채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문을 좀 열어주겠나?"

"그러세요."


마르커스는 헬렌을 업고 가게를 떠났다.
참...  어울리는데 말이지.
나이차는 조금 있어 보였지만. 내일쯤 둘의 나이차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슬슬 가게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헬렌이 둔  잔을 정리했다.
보는 눈도 없길래 가벼운 마법으로 잔을 들어 한번에  안에 든 수분이며 음료를 털어내고,
간단한 강화를 걸어 표면을 코팅한 후에 선반에 올려두었다.
남들은 일일이 설거지를 해야 할 테지만, 컵과 음료 자체를 분리해내고,
사람의 타액이 묻은 부분을 제거하면 그건 새 컵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대충 정리는 끝난건가?"


  가게에 앉아서 헬렌이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가게의 분위기.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음침한 분위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헬렌은  이미지와 능력을 생각해서 아예 마녀로 컨셉을 굳히라고 말한 것 같지만
한 평생  소리를 들어오며 쫒겨다닌 내게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도 알고 있다. 그것보다 더 나와 어울리는 말이 없다는 것을.


결국 나는 헬렌이 내게 준 작은 가습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이 마을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준 사람이고
더불어 정말 오랜만에 만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가게에 들여둔 조명은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린 조명 하나하나가 전력에 반응해서 빛을 내도록 설계한 발광성 금속이었는데,
다행히 조명 자체에는 그렇게 큰 어색함이 없어서 내심 만족하던 것이었다.
단점이라면 상당히 뜨겁다는 정도? 반응이 끝나고 불이 꺼진 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은 식도록 내버려 두어야 했고,
그래서 일부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설치했던 조명이다.
이제와서 저걸 떼내고 다른 걸 달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차분히 헬라티움 광석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테이블위에 따로 놓을 스탠드를 만들기로 했다.


"체헤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내가 체헤게를 욕조 안에 가두어 놓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하아..."

다시 욕실로 돌아가 물이가득 든 수조에서 체헤게를 빼내면 그가 말했다.

[몇 시간이나 지났지?]


"몇 시간은. 그냥 헬렌이 집에 돌아갔어."

[오,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더 들어가 있고 싶어졌어?"


[그건 됐다.]

그렇게 말하는 체헤게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냥 생각이 바뀌어서 꺼내준거야."

[그래서 이번엔 여기 놔둘 생각인가?]

"어쨌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해라.]

나는 그를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조명은 아침에 필요할  같아서 따로 떼지는 않았다.
대신 작은 받침대를 만들어, 길게 대를 올리고, 작은 물레방아를 만들어 달았다.
물레방아에는 내 손에 들린 작은 가습기를 연결했다.
그리고 헬렌이 내게 준 가습기에 물을 받아넣었다.가습기라고 하기에도 뭐한
그 작은 기계는 물이 들어오자 안쪽에서 스스로 펌프질을 해내더니
곧 이어 분무기처럼 작은 분수를 칙칙 소리를 내며 뿜어냈다.
쪼르르 굴러가며 물이 떨어지는 물레방아 아래에는 헬라티움 광석 덩어리를 놓았다.
사실 기술만 있으면 얼마든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 헬라티움 광석이다.
아는 사람만 만들  있다는 단점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작은 스탠드를 여럿 만들어 테이블 좌우로 설치하고,
운치있고 조용해보이도록 배치했다.
여전히 좁은 카페는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지 않았지만 상당히 분위기는 변해있었다.
은은한 빛이 퍼지는 소형 물레방아 스탠드를 가만히 바라보며 헬렌이 말한대로
푸른 색소를 가져와서 물에 풀었다.
투명하던 물에 파란 색소가 은은하게 퍼지면서 부드러운 푸른 빛으로 변했다.
마치 일렁이는 바닷조각과 같은 느낌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내심 만족했다.
물이 계속 순환하며 헬라티움 광석을 덮기에 가능한 일이다.
어차피 쓸 일도 없던 광석이니 상당히 괜찮은 용도를 발견한 것 같다.
식용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블라인드 뿐이었다.
블라인드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가능은 하겠지만 왠지 그건 내가 하는 것보다
내일 헬렌이나 마르커스같은 사람과 함께 구입하는 것이 더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음악을 잔잔히 틀어놓을 방법은 나는 잘 모르겠다.
음악 자체를 잘 안듣고  것도 있고 고작 음악을 듣자고 주술이나 마법을 연구하는 멍청이는 없으니까.
전적으로 이 시대의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왠지 아직은 어색하다.
사실 오전의 체헤게도 그렇다.
아무래도 나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껏 믿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남에게 무언가를  맡기거나 하지 않앗다.
그 이면에는 분명 내 오랜 연구가 타인의 짧은 경험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배어있었을 것이고
이렇게 막상 내 혼자서  수 없는 일이 닥치면 이를 해결하기 이전에 인지 부조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짧은 한숨을   물었다.


"체헤게, 난 이제 올라가서 잘거야. 넌 어쩔래?"


[선택지같은게 있을리가 없잖나. 같이 가지.]

"넌 여자가 자러 간다는데 그걸 잘도 따라오겠다고 하는구나?"

[덮치기라도 할까봐 그러는 거라면 걱정 안해도 된다.]

"아유 저놈의 주둥이를 그냥."

[주둥이 같은게 없어서 미안하군.]


나는 그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오직 나의 침대만 준비된 작은 다락방에서 나는 돌덩이를 내려놓고 옷을 벗었다.
자기 전에는 우선 씻어야 하니까. 그리고 더욱이 목욕이 필요한 기분이니까.
목욕은 때로 생각의 환기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때로는 담배나 술보다도 더.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잘도 벗는군.]


"뭐 덮치기라도 하게? 덮치는건 걱정 말라며?"


[걱정마라,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너는 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닥쳐. 그리고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군. 그래도 이전에 봤던 알몸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는데.
그땐 갈비뼈와 피하 근육도 봤었으니까.]

"여자를 묶어놓고 바베큐했다는게 자랑은 아니잖아?"


[그러게 먹지도 못할걸 왜 그렇게 힘들여서 구우려고 했나 모르겠군.]


"저질."

나는 그렇게 응대하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욕조에는 돌가루가 조금 떨어진 차게 식은 물이 들어있었다.
왠지 불안해서 물을  빼버리고 다시 따뜻한 물을 내려 받았다.
욕조에 찰랑이는 물이 가득차면 나는 살짝 발 끝을 물에 담가보았다.
따뜻한 느낌이 들면 그제서야 나는 안도하며 욕조에 들어갔다.
이제와서 여유로운 척 하지만 사실 요즘도 여전히 두려움은 남았다.
아직도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서서 내게 총구를 겨눌  같단 생각에
괜히 더 정을 붙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있었다.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건 나를 죽이려고 든 체헤게 뿐이라는게 스스로의 처지가 우스워서
웃음만 실실 흘리게 되었다.


"병신."

그건 나에게 한 말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고 속마음을 들으면서도
내 이야기는  번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고 속이면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그 사람들보다 나는 어딘가 하나라도 우월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같아서
아직도 나는 그 시절의 도피자인 것 같아서 스스로에게 말한 것이다.

"병신. 병신 머저리....하아..."

나는 탕에 얼굴까지 담그고 아무 말 없이 숨을 참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뭔가 변할 거라고 믿으면서
그 전까지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 볼거라고 생각하면서.
일단은 지금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그들이 알게되면
얼마나 내게 배신감을 느낄지, 내게 실망하고 제일 먼저 칼끝을 들이대지는 않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짧은 숨을 내뱉었다.


숨은 공기방울이 되어 보글보글 탕위로 떠올랐다가 그대로 부서졌고
나는 이런 고민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집은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주 작은 부분부터 변해가려고 하고 있다. 가게로서의 방향을 정한 것이다.
나도 변해야 했다. 방향이 필요하다.
그들을 믿고 이번까지와는 다를 거라 생각하며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
아니면 무덤까지 들고 갈 비밀이라고 믿으며 그들을 기만하고 끝까지 속일 것인지.
나는 아직 선택하지 못하고 어설픈 존댓말로 그들을 속일 뿐이라는 생각에
괜히 이 욕조의 온수가 나를 잡아당기려고 하는  같았다. 나를 끌어들이고
그대로 익사시킬 것 같은 그런 위협적인 따스함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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