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비밀 (24/303)



〈 24화 〉비밀

겔은 커피를 마시며 내게 말했다.

"뭔가 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맞나요?"


"별 건 아니에요. 그냥 꼬마를 하나 봐 주고 있었죠."

"꼬마요?"

"데니스요. 이 마을에서는 다들 알던데요."

"아 그 꼬마요. 네 그렇죠. 지금  하고 있나요?"

"아마 시킨 일을 하고 있을 거에요. 음료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간단히 가르쳐 주는 중이었어요."

"에리아씨는 상냥하시네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상냥을 기대하시지는 않는 편이 좋아요."


"잠시 기다릴게요. 아이는 눈을 떼면 안되니까요. 데니스라면 더더욱요."


"아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데니스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연구실에서는 데니스가 여전히 반죽을 만들고 있었다.


"누가 왔나요?"

"어. 그래서 너를 봐 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일단 오늘은 빨리 마무리를 해야겠네요."

"그래, 다음번에는 저녁쯤 와. 낮에는 카페가 있으니까 밤에 시간을 빼 볼게."


"그래서 이 밀기루 반죽은 뭘 위한거죠?"


"내가 없는 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시킨거."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밀가루 반죽을 떼내서 비닐봉지에 넣고 냉장고에 쳐박아두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힘  썼지? 수고했어. 자 다음에 보자고."

"쳇, 매번 이런 식이야."

"더럽고 치사하면 너도 어른 하던가."

"그런 말이 어디있어요."

"다음번에 오면 네가 치댄 반죽으로 구운 빵이라도 먹여줄게.
오늘은 에너지 음료만드는 법 알려 줬잖아?"


"하아... 원래 그래요?"

"너무 착하면 살기 힘들어."


"잘 배워 갑니다. 손 좀 씻어도 되죠?"


"가게 화장실에서 씻어. 여긴 주방이야."


데니스는 손을 씻고 털어내며 가게를 나갔다.
그 모습에 왠지 겔이  신나 보였다.


"상당히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 겔?"


"그런건 아닌데, 에리아 빵도 만들어요?"


"제안을 받아서요. 카페에서 빵도 함께 팔면 좋지 않겠느냐고요."

"기대가 되네요."

"돈 받고 팔거에요."


겔은 근육잡힌 팔을 구부리면서 잠시 앓는 소리의 신음을 했다.
그리고는 차분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는 찬성입니다."


"반대하셔도 팔거에요."

그의 표정이 조금은 굳어졌다.
그의 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광대가 살짝 떨리고 동시에 가볍게 다문 입이 경직하듯 입꼬리를 올린다.
그런 표정을 보고 나는 그에게 물을 내밀었다.
 물이 찰랑이는 컵을 가만히 바라보던 겔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래요,  그건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니까.
그나저나 월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 조금 전에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길래 정중히 거절했죠."

"월은 생각보다 많이 피곤한 사람이에요. 잘 했어요.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리아를 생각하게 되는 방향이 아마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네요."

"부정적인 방향으로 말인가요?"

"그건 모르죠. 다만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강요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 정도만 드릴 수 있겠네요."

겔은 에스테리카를 마시다가 내 표정을 살핀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 작은 마을에서는 지인의 평과 주변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니까."

"그건 솔직히 큰 상관 없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게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잖아요.
늘 오시던 분들만 오시면 충분해요."


"내가  이 자리를 채울게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내가 그러고 있으면 겔은 이게 아니라는 애매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커피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가 화장실로 사라지고 나서 이제껏 보지 못한 손님이 우후죽순 나타났다.
아마 마을의 인원으로 보이는 남자들과 아이들이 제각기 나타나서는
저마다 다른 커피와 음료를 제멋대로 주문했다.
아마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들을 고용했으리라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고용이 아니라고 해도 지인을 이정도로 순간적으로 몰아붙일만한 인물은 많지 않으니까.
아마 억제력의 기능을 하고 있던 겔이 시야에서 사라지나 그렇게 몰린 듯 하다.
그들의 주문을 나름 차분하게 받고 있으면 그들은 상당히 제각각의 표정을 하고 와서는
주문을   까지만 해도 이유 없는 분노에 콧김을 씩씩대다가 커피를 받아들고는
생각보다 차분한 표정을 하고 커피를 마셨다.

"아무래도 바리스타는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생각보다 만족하는 사람이 많네."

 혼잣말에 체헤게가 답했다.

[긍정적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쫒기던 때보다 표정이 밝아.]

[여전히 죄의식이 전혀 느껴지지 않으시나봐요. 아주 밝으세요.]

 말에 체헤게는 짧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잠시 후에 화장실에서 나온 겔이 모여든 손님들을 정리하고 나서 가게가 한 층 조용해졌다.

"잠깐 자리를 좀 비웠다고 저렇게 몰려든다니. 이기적인 새끼들."

겔은 커피를 입에털어넣으면서 말했다.

"상당히 식었네요. 한잔 더 부탁해도 될까요?"

"그러세요."


내가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겔은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월은 이 마을에 하나뿐인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이 좁은 마을에서 소재는 그들에게 치명적이에요.
1차적으로는 기술자들의 숨통을 조여올 거고, 2차적으로는 기술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게에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카페도 그렇지만 철물점도 마찬가지에요. 서로 견제하지 않으면
너무 커져버린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죠.
거기 익숙해져버리면 오늘 같은 상황이 일어나는 거에요.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고
화를 내며 분노를 표출하게 되는거죠. 인간의 탈을  돼지 새끼들.
말했잖아요. 이 마을에서는 사기꾼이 유독 많아요."


"너무 열내지 마세요. 그럼 저 사람들도 고의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잖아요."


"고의였든 아니었든요. 결국 자기가 누군가의 영업을 방해한다는 자각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던 거였는데 어떻게 그 찰나를 노려서 판을 벌이니."

"일부러 오셨다고요?"


"네, 이 커피숍에서 조용하게 여유를 느끼고 싶었거든요.
다른 가게에서는 그러지 못했으니까."


"시골마을인데도 여유가 통제되고 있다는게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이 드네요."

"그치만 그게 현실이에요. 이 마을은 잘못되었어요."


"잘못...되었다고요?"


겔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가게 입구로 나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리쳐 그들을 쫒아냈다.
사람들을 물러가도록 만든 후에 다시 내가 있는 자리로 돌아온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없어요."

"유난히..."


"어른들은 차고 넘쳐요. 물론 젊은 사람들이 이런 작은 마을을 좋아할리 없다는건 알아요.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이렇게 많은 가구가 존재하는데,
아무도 아이를 내놓고 다니지 않아요. 아이가 있다고 하지만 말이죠.
데니스는 그런 이 마을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존재에요."


"확실히  말대로라면 그럴 수 있겠네요."


"아마 알고 계시겠지만 마을의 북쪽 끝에는 안카 숲이 있어요."

"네, 대수림이죠. 한번 들어가면 헤멜지도 모른다고 해서 주의하고 있어요."

"그 위쪽으로 올라가면 있는 국가가 바로 미리타엔제국이에요.
국민 대다수를 세뇌하다시피 하는 제국국가죠. 모험가 출신인 저는 알아요.
멀쩡한 사람도 거기서 3달만 지나면 폐인수준으로 변해요. 그러면 미리타엔을 빠져나오는건 불가능하죠."


"미리테안...."

"퀘트로네스에는 미리테안 외에 다른 국가는 없어요. 오히려 안카 숲에서 미리테안까지의 거리도 상당하고요.
그리고 그 우측에 존재하는 미로. 아시죠?"

"미로요?"


"모험가들에게서는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에요.
거기에는 영원히 잊어가는 여신이 잠들어있다고 하는 전설이 있죠."

내가 커피를 내밀면 그가 그걸 받아들며 말을 이었다.

"저도 본 적은 없어요. 오히려 본 사람이 더 드물죠. 대다수는 거짓말을 하니까요.
투박하게 쌓인 돌무더기에요. 부서지지도 않고, 밀려나지도 않아요.
깊은 안개로 둘러쌓여서 들어가는 사람의 방향감각을 잃게 만들고
결국 그 안에서 헤메다 죽거나 운이 좋으면 빠져 나오거나.
그러나 결국 그 중심에 잠들었다는 여신은 본 사람이 없어요.
낭설만 무성하죠. 붉은 머리라더라, 근육이 상당하다더라. 금발이라더라."


"흥미롭네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는 거기까지 가는 것도 고비에요. 안카숲을 건너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미리타엔 제국영토기 때문에 허가를 받아야 하고,
더욱이 세뇌당하지 않고 무사히 도달하기란 더욱 힘들죠. 미로는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그 미로가 아이들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여기 모인 사람중 상당수는 미리타엔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자식을  적이 없고요. 미리타엔에서 분명히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어요."


"기억해두죠."

"나는  마을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요. 신뢰는 더욱 하지 않고요.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웃는 낯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어요. 그걸 때로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죠."

내 대답에 그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는 금방 지웠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커피를 마시고 말했다.

"종종 올게요."

"네, 그러세요."


그리고 그는 값을 지불하고 사라졌다.
퀘트로네스와 미리타엔, 그리고 콜린의 사람들과 비밀.
이제 막 이 마을로 이주한 내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마을에 애정이라는게 생기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몰려왔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  자연스레 와해되어갔고
나는 외지인, 정확하게는 모험가 출신의 떠돌이 용병에게 신변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엇다.
이 시대는 아직 내게 웃어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가 볼 건가?]


"어딜?"


[퀘트로네스. 눈만 보면 당장이라도 가고싶어하는 눈인데.]

"가고싶기는 한데, 지금은 성급하지. 오늘 제대로 끝내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아.
찜찜하게 이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또 뭘 못 끝냈다는 거지?]


"건방진 꼬마한테 시킨 빵반죽. 원래 오늘 내로 구우려고 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몰아쳐버려서 못했어. 꼬마도 그냥 보냈고. 물론 눈치는 좋은 아이라서
빠르게 상황파악을 하고 사라진 건 좋지만. 그리고 두 번째로 겔 말이야.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같았어.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 버리니 주제가 바뀐거지."


[아, 그거라면 걱정 마라. 아마  쓸데는 없는 이야기일거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너보다 나이는 훨씬 적어도 나름 가족이 있고 아내가 있었던 사람이니까.
하물며 널 잡아 태운 날 밤에도 아내를 안았는데 사랑을 모를리가.]

"사랑?"

[겔이라고 했지. 너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신경은 쓰지 마라. 어차피 애새끼니까.]


"물론 정말 그런 거였다면 나도 관심은 없어. 이 나이에 누굴 만나서 뭐가 어쩐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 또 언제 늙지 않는 여자라고 마녀라면서 횃불을 들고 돌아올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어저께 했던 몬갈리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지?]

"아, 그거? 그것도 나름 네 비밀이었지?"


[오랜 친구였으니까.]


"그래, 네 친구 몬갈리오. 그 뼈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는 마녀를 찾아 죽이겠다고 말하던 너는
상당히 봐줄만 했었는데 말이지. 아직도 그때 일을 후회하지 않으신다니까  할 말은 없네."


[내가 죽인 사람들 모두가 마녀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그때  친구를 죽이고 가증스레 살아있던
그 가면 쓴 악마들을 불태웠을 뿐이다. 손에 피를 묻히면서도 괴롭다고 소리치는 몬갈리오의 얼굴이 꿈에 찾아오면
결국 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마녀를 찾아야 했지.]


"말해줬잖아? 네 친구랑 같이 살던 여자애. 마녀 아니라니까.
그냥 전염성이 너무 강한 병이 있었던것 뿐이지.
알잖아 너도? 친구의 묘에 들어가 누워있던 여자애의 말. 들었잖아?"

[나는 모른다. 그건 아마 환청이거나 바람소리였을거다.]

"다시 말해줘?"


내가 키득이며 웃으면 그는 짧게 말한다.


[닥쳐라.]


"마녀한테 그런거 바라도 돼?
난 확실히 알 수 있어. 그때 들었으니까.
몬갈리오의 뼈가 마을에서 발견되던 밤에 소녀는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열었어.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지. 그게 너였어. 소녀는 몬갈리오가 죽고 나서
그 관에서 함께 따라 죽을 생각이었던 거니까.
그리고 수상하다고 생각한 네가 그녀를 빵하고 쏘고 나서 총에 심장이 꿰뚫려 죽었지 아마?
그때 분명히  들었다니까. 걔, 고마워요 아저씨라고 말했어. 알잖아?"


[모른다...]


"이상한데서 죄책감 느끼긴. 신경 쓰지마. 그 애는 고마워했어."

[그럴리가 없어, 그래서는 안된다.]


"이제껏 마녀가 아닌걸 알면서 죽인 사람은 차고 넘치면서 그 소녀만 차별대우야?"

[마녀가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나를 원망했으니까. 그게 내 죄책감을 옅게 했다.
그게 아닌 반응은 처음이었지.]

"병신. 넌 죽었어. 이제와서 몇백년 전에 죽인 사람 하나로 징징대지 마.
그럴 정신이 있으면 나한테나 사과하라고."


체헤게는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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