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나비는 왜 날지 못하게 되었는가
해피가 나가고 나서 체헤게가 물었다.
[그래서 어쩔건가? 계속 여기서 자리 잡고 살 건가?]
"그래야지. 뭐 어디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언젠가는 떠나야 할텐데."
내가 그렇게 대꾸하고 형식적으로 앉아서 오지않는 손님을 기다리면 체헤게는 말 없이
나를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정말 사람이 맞는지 하는 그런 생각.]
"유령이지."
[나는 그냥 로봇같은게 아닐까, 그냥 내가 체헤게 로드원이라고 믿는 자아인건 아닌가.]
"테세우스의 배 문제네. 걱정마. 내가 기억하니까."
[기억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영 믿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별 수 있어?"
결국 그 날은 손님이 오지 않았다.
밤 12시가 되어 가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체헤게를 적당히 들고 마을로 나왔다.
[어디 가려고 하는건가?]
"마을 밖으로. 안카 숲이 궁금해져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는구만.]
"내가 언제 누구 말 듣는거 봤어?"
그렇게 말하고 내가 천천히 마을쪽으로 향하면 저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직 거리에 나와있었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대략 중년의 남성들로 보였다.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지만 왠지 꺼림칙해 나는 그들을 피해 건물 사이로 숨어들었다.
이런 사건에서는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훨씬 좋은 방법도 있었으니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도 없다.
체헤게의 머리를 적당히 그 근처에 몰래 두고 돌아왔다.
[사람을 녹음기로 쓰지 말았으면 하는데.]
[그냥 들은 내용만 전해주면 되는데 그게 어려워?]
[그래, 기다려라.]
체헤게를 놔두고 나도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평소라면 아무 일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공존했다.
[죽지도 않는 두 명이 이런데에 무섭다고 숨어있는 꼬락서니도 우습지 않나?]
[너도 알잖아. 우리쯤 되면 죽는 것보다는 다른게 무서워지는 법이야.]
[저 사람들 뭔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뭔가를 찾는다고?]
그말에 난 조금 더 몸을 낮추고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에 손에 들린 것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익숙하다는걸 알고있다.
곡괭이와 삽, 그리고 작은 랜턴들. 그리고 배낭 하나씩을 등에 맨 이들은
누가 보더라도 이 야밤에 안전한 인간으로 분류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잠시 숨을 죽이고 그들이 사라지길 기다리다가
마침내 체헤게의 신호에 따라 돌아와 체헤게의 머리를 주우면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를 파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위치는 정확히 특정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마 확실한건 이 마을 외곽, 그 어딘가에 파묻었다는 것 같군.]
[이번에도 시체야?]
[이번에도 라니. 난 잘 모르겠군.]
[따라가볼까?]
[무섭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재미는 있어 보이잖아?]
[변덕이 무슨...]
[변덕은 향신료야. 담백한 인생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라고.]
[오 문학적이야. 누가보면 마녀라기보다는 히스테릭한 작가로 볼지도 모르겠군.]
[그건 날 잘 모르는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할걸.]
[그래서 안갈건가? 더 늦으면 놓쳐버릴거다.]
나는 체헤게의 영혼 회로를 분해했다.
영혼 회로에서 순간 붉은 빛이 잠깐 점멸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푸슈슉' 하는 소리가
어울릴법한 모양으로 사그라져 꺼졌다.
그리고 돌조각은 힘없이 부서져 깨져버렸다.
그리고 옆에서 약간의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더니
어딘가 공허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체헤게를 다시 영혼상태로 뽑아낸 것이다.
[무슨 일로 이걸 또 풀어주셨지?]
[돌덩이를 들고 다니려니까 무거워서.]
그렇게 대답하고 나는 아직 저 멀리서 반짝이는 램프의 빛을 발치에서 따라갔다.
무더기의 사람들은 애먼 땅을 조심스레 파냈다.
사람들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렇게 땅을 파내고 뭐라고 떠들더니
서로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구멍을 다시 덮었다.
순간적으로 주머니에서 부적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즉석에서 수면부를 작성했다.
태우면 반경 50m 이내의 생물을 재우는 효과가 있는 주술이다.
문제라면 아마 나도 확실히 잠이 들게 된다.
결국 나는 내 나름의 해결 방안을 알아낸 상태지만.
차분히 따라가다 그들이 신이 나서 만세를 부르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들의 뒤로 조심스럽게 돌아갔다.
실수로 자그락대는 자갈을 밟기는 했지만
그들은 그런 자그마한 소리에 크게 관심을 가질만큼 영리하거나 예민하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수면부를 손에 꽉 쥐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연기를 풀풀 흘려대며 조심스레 기다렸다.
손에 불이 옮겨붙어도 괜찮았다. 열로 타들어가는 손에서는 고기가 타는 냄새가 났다.
고통은 수면을 쫒아내기에 효율적이다.
요즘 같은 주술이 사라진 시대에서는 적은 마력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화상으로 번져가는 손을 가만히 쥐었다.
몸에 불이 번지는건 참을 수 있었다.
고통에는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들이 뭘 캐내려고 했는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냄새와 빛을 눈치채지 못할만큼 바보는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금방 나를 발견했고 내게 달려왔다.
나를 지킬 수단은 없었지만 그들도 불타는 내게 함부로 손을 댈 배짱은 없었다.
날아드는 곡괭이나 삽도 종종 있었지만 그건 내가 사람이라는걸 인지하지 못한 그들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몇 명의 쓰러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은 빠르게 도망쳤다.
휘청거리며 몇 걸음 지나가다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중 대다수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이에 섞인 얼굴중에
이전에 보석상에서 보았던 음침한 여자도 섞여있었다.
아까는 남자만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는건가.]
"아무래도 그렇지."
[도망가게 둬도 되나?]
"별일 없을거야. 아마 저 사람들도 가다가 쓰러질걸.
그 전에 무사히 도망치면 되는 문제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적당히 주변을 정리했다.
어느새 불이 꺼진 몸은 밤바람에 떨어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불에 타 숯같이 말랐던 몸은 불이 꺼지자 마자 다시 새록이며 돋아난다.
생기가 꺼져 푸석하던 피부에 마치 군고구마 껍질과 같이 타버린 살 사이로
밝은 살이 천천히 돋아난다.
언제부턴가 회복되는 시간이 점차 빨라진 것도 있었다.
[볼때마다 경이롭군. 대체 그 회복력은 어디서 나오는거냐.]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말 그대로 나는 완전히 상처 하나 없는 몸이었다.
오히려 깨끗하게 씻은 것 같은 몸이었다.
은은한 눈빛과 밝은 피부, 그리고 옅은 금발의 머리칼과 조금 작은 키.
불에 탄 것이라고는 옷가지와 작은 가방 정도였다.
가방은 미리 방화에 어느정도 대비를 세워둔 것이어서
파프리카처럼 밖은 아주 그을려 숯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안쪽은 멀쩡한 물건이었다. 나름 당대의 기술력이 모인 가방이니까 이정도는 해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문제는 결국 상의를 홀라당 날려먹은 내가 지금 탑리스였다는 것이었다.
탑리스인지 토플리스인지 정확히 어떤 명칭인지 신경을 쓴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갈아입을 옷은 있나?]
"그런게 어딨어. 이런 일이 일어날줄 몰랐는데."
[그 상태로 돌아다닐건가?]
"빨리 사라져야지. 그리고 여차하면 간단한 마법이나 주술도 있으니까."
[상당히 효율적으로 잘 써먹는구만.]
나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보이면 어색하다는 듯이 후후 웃어주는 체헤게는
내게 별 잔소리나 군말을 하지 않았다. 뭐 조금 창피한 것보다 중요한게 있었으니까.
내가 그들이 쓰러진 사이를 보면 작은 금빛의 십자가 모양의 장식물이 있었다.
아마 구덩이에서 건져낸 건 이것 같았다.
옆에 파인 깊은 구덩이에는 상자가 하나 묻혀있었고
반쯤 열려 헐거워진 뚜껑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십자가?"
[종교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하기 마련이지.]
"그건 알고 있어. 이걸 왜 저 사람들이 찾아내려고 한 건지가 궁금한거지."
[그렇게 따지면 이게 여기 묻힌 것 자체부터가 궁금하지 않나?]
"그건 그러네. 그래, 이건 내가 맡아둬야겠어."
나는 그렇게 답하고 주머니에 적당히 십자가를 구겨넣었다.
구겨 넣는 와중에 뾰족한 끝에 찔려 피가 조금 흘렀다.
"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하고 십자가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다 불길함에
다시 넣으려던 십자가를 빼보면 아까와는 어딘가 다른 것같이 느껴졌지만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그런 느낌만이 얼기설기 얽힌 듯이 존재했다.
내 기억력은 틀리지 않는다. 바뀐 것은 없다. 다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만 존재했다.
확실히 갖은 보석이 박힌 십자가 끝에 내 피가 묻어난 것만 빼면 말이다.
[그 십자가가 효과가 있기는 한가보군. 꼴에 십자가라고 마녀에게 상처를 입힌다니.]
"상처? 잠깐."
그 말대로다. 내 몸은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는 몸이다.
갖은 약품실험의 결정체이기도 하고, 축복이라고 생각할 정도의 회복력은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작은 십자가에 베인 상처가 내게 피를 흘리게 한다는건 익숙한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정말 이건 뭐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그 십자가는 왜 여기 있던거지?]
"글쎄, 그건 내일 일어나면 여기 누워계시는 금은방 언니를 찾아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걸 순순히 말해줄까.]
"말해주길 바라야지. 정 안되겠다 싶으면 자백제라도 만들어 먹이고."
[수단을 가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군. 최소한의 명예라거나 프라이드는 없나?]
"그게 밥먹여줘?"
[익숙해지려고 하면 자꾸 옛모습이 튀어나오니 이거 무서워서 말이라도 붙이겠나.]
"무서웠는데 맨날 따라다니길래 나는 혹시 성벽이 그쪽인가 했지."
[성벽? 아~! 마조히스트! 아니, 난 아주 로맨티스트라고. 맞고 때리는건 성미에 안맞더군.]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가자."
나는 적당히 쓰러진 남자의 윗옷을 벗겨 입고나서 바닥에 널브러진 채 타오르는 랜턴을 집었다.
나름 불이 튀지 않도록 설계된 랜턴이었으므로 화재의 위험은 없었다.
아마 간밤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길바닥에 널브러진걸 보면 마을에도 소동이 있겠지만
그건 내 문제는 아니었다.
옷이 상당히 헐렁해서 작은 내 체구에는 조금 맞지 않았지만 나름 어떻게든 팔을 걷어 붙이니 움직일 수 있었다.
[팔을 몇 번이나 접어 올린거냐?]
"그럼 어쩌라고! 맞는 사이즈가 없는데!"
[옆에 누워있던 여자도 있었잖나?]
"됐네요. 누구 좋으라고. 그리고 저 여자도 일어나서 창피할거아냐?"
[쳇, 그 여자 다른건 몰라도 골반 하나만큼은 괜찮았는데.]
"너는 골반이 상반신이냐? 윗 옷 벗기는데 무슨 골반?"
[골반은 이어지는거지 하반신에서 뜬금없이 나타나는 귀신 같은게 아니다.]
나는 적당히 그의 말을 무시하고 숲쪽으로 걸었다.
정말 옷이 컸던 탓에 헬렌의 옷 처럼 늘어지는 단을 말아올려 뒤로 묶어
아랫배는 드러나게 입었고, 팔은 3번을 감아접어 고정시켜 팔목이 드러나게 만들었다.
왠지 조금은 퀘퀘한 아저씨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탄내가 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옛 모습이라고 하지 마. 나 이제 이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졌으니까.
적어도 변화하려는 노력은 보이잖아. 높임표현 정도는 쓰고 있다고. 녹아들기 위해서."
[하긴, 자기 만족 치고는 조금 공들인 것 같았지. 그래서 말인데, 난 왜 네가 억지로 이 사람들을 따르게 하거나
공포로 굴종시키지 않는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흥미가 있다.]
"제약이 생긴거지 뭐."
[제약?]
"글쎄, 사람이 가여워보인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정이 붙었다고 해야하나."
[그런가.]
"쓸데없는 감정이라고 치부할 줄 알았어."
[사람은 누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마녀라고 해도 그건 같은 모양이군.
말했잖는가. 변하는 것들이 아름다운 거라고. 사람은 그렇게 변하는게 자연스럽다.
그건 너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지.]
"물론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 틀린 말이지만... 그냥 변덕이야.
나도 말했잖아? 변덕 정도는 있을 수 있어."
[이제 마녀 티를 떼는 것도 오래 걸릴 일은 아니겠군.]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짧게 대답하고 있으면 저 멀리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내가 불타면서 빛을 낸 것도 있고, 사람들이 사라진걸 눈치챈 것도 있으리라.
저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가까워오는 기척을 느끼고 나는 씩 웃고 외곽으로 달렸다.
점점 더 숲으로. 숲속으로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