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숲으로
한참을 달린 후였을까, 숨이 막 벅차오르고 있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잘 돌아다니지 않았던 몸은 제멋대로 삐걱이며 후들거렸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바닥을 바라보고 헉헉대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곧 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나면
다시 일어나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두려움을 자기방어의 기제로 사용한다.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생물군계의 최상의 위치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변화에 둔감해지게 된다는 의미이며, 더불어 현상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오만을 낳는다.
이는 단순히 위험이 곧 생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금을 산처럼 쌓아둘 정도로 부호인 사람이 있다고 했을때,
당장 이 사람의 수입이 사라지더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은 아무런 금전적 어려움 없이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남자는 가만히 앉아있지 않을 것이고 좌시하기보다는 일어서서 무언가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테다.
이는 즉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에서 오는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단순히 내 안전이 보장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니 또한 마찬가지다. 왠지 모를 꺼림칙함에 그들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느끼는 감정이
결코 잘못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땅을 파던 사람들이던, 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사람들이건
아직 내 얼굴을 확인한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국경을 갈라놓은 저 커다란 울타리를 앞에 두고 어둑어둑한 밤이었음에도
누군가는 망루 위에서 등대와 같은 서치라이트를 두고 마을을 감시중이었다.
[어떻게 나갈건가?]
[나가는데 다 방법이 있지. 일단 우리 집에 있는 전기제품은 다 꺼뒀으니까.]
심호흡을 짧게 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마력이 손끝에서 모이면서 따뜻해지는걸 느낀다.
본격적으로 마력을 운용하는건 오랜만이라 잘 될지 모르겠다.
천천히 손끝으로 힘을 모으듯이 끌어당기면 주변에서 툭툭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 둘 빛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건 마을의 빛이었다. 가정마다 존재하는 빛과 가로등, 그리고 탐색용 서치라이트.
그 빛들이 모두 뚝뚝 끊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하지 않았지만 임의로 근방에서 힘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그건 또 뭐냐? 이런 건 처음 봤는데.]
"다행히 좀 무리하기는 했는데 이런 범위로도 되네. 너 몰라? 에너지의 총량은 언제나 보존되는거야.
형태를 바꾸면서 계속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주변 에너지를 싹 끌어온거지."
[이런 것 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평소에도 자주 하잖아. 목욕물 데울때. 그냥 위력이 다른거지.
내 몸이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기는 했는데 다행히 무리 없는 것 같네."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쩌긴, 땅으로 흘려보내야지."
과거에 마법사들은 이걸 각자 보유한 마력을 이용해서 자연물의 에너지 형태로 변환했다.
나처럼 열로 변환하거나 혹은 충격으로 변환하거나. 물론 그런 마법사 대부분은 사라져버렸다.
체내의 마력을 운용한다는 것은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 인지하지 못한 새에 남발하면 수명을 깎는건 시간문제다.
체내에 마력이 고갈되어서 죽는 경우도 있었고, 아니면 마력운용한계 이상의 마력을 다루다가 체내에서 마력이 터지거나
막히거나 해서 혈이 뭉개지면 결국 팔다리를 경험과 교환하고 마법사를 강제로 은퇴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나중에 오랜 연구 끝에 마력은 정기적인 휴식으로 회복이 가능하다는 이론이 등장하고,
마력을 임의로 보충하는 포션이 등장했지만, 이미 마법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아직도 마법사가 어딘가에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분명 당당하게 사회에 이름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마법이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은 지금, 위험성은 기억속에서 삭제된 채로 사람들은 긴장을 놓아버렸으니까.
이런 시대에 굳이 마법사임을 자청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이들은 오크와 엘프를 상대로도 열을 올리고 배척했으니까.
나라고 이런 일을 하고 멀쩡하지는 않다. 적어도 일단 팔다리를 비롯한 혈관이 욱씬거리는 감각은
익숙해지지 않는 괴로움이다. 육체적인 통증이나 멘탈에 전해지는 충격과는 결이 다른 고통이기 때문이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괜히 맨 땅에 침을 퉤 뱉었다.
불이 꺼진 마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또 한번 들리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소리에
나는 감시탑의 불이 꺼진걸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그 너머로 넘어갔다.
불이 언제 켜질지 알 수 없었으므로 빠르게 숲으로 달렸다.
마을에서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았지만 금방 숲이 나왔다.
"이게 안카숲인가."
언제든 마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발은 생각보다 가볍게 떨어진다.
"가자."
[내일 가게는 안 열 생각인가?]
"아, 말 안했던가? 우리 가게는 주일에는 쉬어."
[주일? 그런걸 마음에 두는 타입이었나? 언제부터?]
"오늘부터. 괜찮아. 신은 자비로우시니까 내가 좀 멋대로 싫어해도 용서해주시겠지.
그런 것도 용서 못하는 쪼잔한 존재일리 없잖아. 그렇지?"
[하아... 용서해주소서...]
"아 혹시 독실한 신자라던가 그런거야?"
[의지할 존재는 언제나 존재하는 편이 좋지.]
"다들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가방에서 미리 챙겨온 작은 칼을 꺼냈다.
나무가 울창하게도 우거져서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무를 쳐내며 나아가기로 했다.
한발을 내딛을 때마다 찰박이는 진흙바닥이 질척하게 발을 잡아끌었고
바지에는 반쯤 머드 상태가 된 흙이 묻는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은지 오랜 땅은 이끼로 미끄러웠고
랜턴으로 비춰보아야만 겨우 보일 것 같은 공간들 사이로 희끗거리는 짐승의 흔적.
[이건 오소리인가.]
"오소리가 숲에 살아?"
[못 믿나? 발자국만으로 봤을때 저건 오소리고 저 구석에 놓인건 뱀이 쓸고 지나간 흔적이지.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차분히 보았겠지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분명히 나올거다.
아마 길을 잃어 근처까지 헤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안쪽은 더 위협적인 상위 맹수에게 자리를 빼앗겼던지.]
"그래 그게 차라리 더 위협적이네."
그렇게 한참을 더 나아가면 저 멀리서 꿀렁이는 액체같은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단순히 액체라는 느낌에 계곡같은 이미지를 생각했었다.
[멈춰라. 와각수다.]
"와각수?"
[나도 실제로 보는건 처음인데, 아마 오랜 기간 왕래가 없어 자리잡은 모양이다.
저 커다란 배를 보면 분명하지. 뿔도 상당히 크고, 잘도 이런 숲에서 뿔이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았군.
아마 잘못 보이면 그대로 우리쪽으로 돌진할거다. 들이받힌다고 죽지는 않겠지.
그래도 섣불리 나서는건 좋지 않아 보인다.]
"뱃가죽 두터운것 좀 봐. 분명 포유류일텐데 배는 파충류같아."
[어린 와각수는 배에도 털이 나있지. 나이를 먹으면서 뿔이 커져 서서는 온전히 돌아다니기 어렵다.
뿔이 나뭇가지에 걸릴테니까. 덕분에 녀석들은 점차 엎드리는 쪽으로 진화하는거다.
그래서 배를 결국 바닥에 쓸고 다니면서 점차 배에 있는 털이 뽑히고 파충류같은 굳은살이 박히게 되지.
저런게 여신의 유산이라는건 믿을 수가 없다.]
"여신? 무슨 신이 그렇게 많아."
[그런것도 모르나? 신은 역사 같은거다. 권력을 잡는 신은 끊임없이 변하게 되어있다.
다르말록이 우세하던 시기 이전에 테라지아라는 이름의 여신이 있었다고 하지.]
"아, 그거라면 알아. 고서적에 산맥들을 테라지아의 척추라고 적은 기록이 있으니까.
아마 죽은 테라지아의 몸이 세계가 되었다고 했었나?"
[그래, 아예 모르는건 아니로군.]
"그래서 저게 왜 여신의 유산이라는거야?"
[자세히는 나도 모른다. 다만 저 커다란 짐승이 가진 뿔은 여신의 손톱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 당시에는 나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이젠 알겠군. 사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웅장한 뿔이다.
뭐 저런 생물이 있는건지.]
"그래, 그럼 조금 돌아가자고."
[돌아간다고? 마을로 말이냐?]
"아니, 빙 에둘러 지나가자고."
살짝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와각수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가만히 이쪽을 노려보던 괴물은 잠시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더니
커다란 배를 쓸며 방향을 돌렸다.
팔다리는 사실상 균형을 잡고 몸을 지탱하는 용도 외로는 사용할수도 없다는 듯
꼬리로 바닥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온다.
[걸렸나, 낭패로구만. 싸울 수 있겠나?]
"싸우기는 좀 그런데, 도망은 안되려나? 느려 보이잖아."
[아마 느릴거다. 성격도 둔하고 게으른 편이라 그렇게 크게 위협적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일단 조심해야 하지않겠나?]
"아, 마력 부족해서 어지러운데 또 뛰어야 한다니."
지금 뛰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로 돌아가기도 꽤나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잠시 숨을 죽이고 근처 썩어서 쓰러진 통나무 뒤로 숨었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숨었다고 했는데도 시선은 흩어지지 않았다.
"안카숲에 오는 사람들은 저런걸 잡겠다고 오는 거겠지?"
[아마 그럴거다. 알기로는 안카숲 중심부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수라고도 한다는데, 그런 애들 장난 말고 제대로 된 이름은 아르간티아의 나무라고 하지.]
"또 아르간티아야?"
[별 수 없다. 전설에 따르면 아르간티아가 걸어가던 중에
나무 한그루를 심은 것에서 출발해서 이렇게 숲이 만들어진 거니까.
이 세계는 아르간티아와 그 결을 같이하지. 최초의 인간이라잖은가.]
"그 양반은 죽지도 않는다니?"
[듣기로는 불로불사라고 하더군.]
"기분나빠. 나같은게 또 있다는 이야기잖아?"
[하긴, 아르간티아도 너같은 존재가 있다는걸 알면 꽤 불쾌할지도 모른다.]
"해보자는거야?"
[아니, 사실을 말한거다.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주제에 신이 가진 축복을 받은 여자라니.
그런 주제에 선과는 거리가 멀지.]
"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나도 썩 달갑지는 않네. 그리고 마녀한테 무슨 도덕을 바래?"
[혹시 모른다. 아르간티아가 너와 무슨 관련이 있을지도.]
"됐네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살짝 고개를 내밀면 여전히 우리를 보고 있는 와각수가 어느새 꽤 가까워져있었다.
그러나 해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보려고 하는 것 같았기에
나는 그대로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가방을 뒤적여 부적을 찾아내려고 하다 당황해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꺼내려던 부적이 흩어지고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든 것은 보온병이었다.
꺼내려다 잘못 해서 내던져버린 보온병이 나무 그루터기에 맞아 뚜껑이 열리고
차갑게 식은 에스테리카가 바닥에 뿌려진다.
이끼와 진흙이 묻어 더럽혀진 보온병에 시선이 끌린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과 동시에 와각수는 천천히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 나아갔다.
기회는 그 짧은 순간 뿐이었다.
재빨리 짐을 챙기고 부적을 긁어모아 내달렸다.
그러나 마을쪽으로는 도망치지 않았다.
날이 밝고 해가 뜨면 분명 더 멀리 돌아다닐 수 있을 테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개울에 발이 빠지고 축축한 바지에 풀이나 마른 잎 등이 붙었고
싸리에 베인 발목에서 피가 났다.
뒤를 돌아보면 와각수는 바닥에 떨어진 에스테리카를 핥는 것 같았다.
이미 땅에 다 스며들었을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진흙을 핥는지 퍼내 씹는지 모를 정도로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별 희한한 녀석을 봤군. 이제 저것보다 독특한건 안나올거라 믿어야지.]
"그런 소리 하면 꼭 나오던데."
[아마 와각수보다 위협적인건 없을거다. 끽해야 테러보어 정도?]
"그런게 있을리가 없지."
"꾸에에엑"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 불길함은 확실히 전해졌다.
"씨발."
등 뒤에서 어딘가 습하고 퀴퀴한 숨이 뱉어졌다. 불쾌하고 축축한 입김.
그리고 쿠륵대는 불길한 소리. 조심스레 고개를 돌리면 족히 2M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테러보어가 서 있었다.
다행인건 우리를 발견했다기 보다는 저 멀리 보이는 와각수에 더 관심이 있어보였다는 정도.
나는 포기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주변의 흙을 퍼 몸에 발랐다.
적어도 냄새를 숨기고 의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치덕치덕 진흙을 바른 후에 겨우 조심스럽게 기어 포복으로 이동하면
테러보어는 별안간 괴성을 내더니 뒤틀린 엄니를 위로 치켜들더니 와각수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 덕분에 오늘 신기한 경험 많이 하는군.]
"오늘 한 결정중에 최악이었나본데. 아니, 확실히 최악이야."
[축하한다. 보통 이런 경험 살아서는 못하거든. 하하하!]
"정말 죽여버리고 싶다..."
조심스럽게 시야에서 벗어나 나무를 타려고 했지만 이끼가 잔뜩 슬어버린 나무에
진흙바른 상태로 올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톱 사이로 이끼와 진흙이 끼고 나서 체념하고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지네."
"동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