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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테러보어 (29/303)



〈 29화 〉테러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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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행동과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대부분의 부적은 진흙이 묻어 질척해져  수 없게 되어버렸고
혼란스럽기도 했다.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페리페테이아."


[그게 뭐지?]


"그냥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작은 기적의 주문이야."


그렇게 대답하고 흙이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뇌에 잠깐의 환기가 찾아온듯한 느낌.


"제임스씨가 그랬었나? 인간이 의지하기 위해 신을 찾는다고."


[그랬지.]


가지고 있던 작은 칼을 다시 꼬옥 쥐었다.
숲 안쪽으로 나아가며 늘어진 넝쿨을 쳐냈다.
한참을 쳐내며 나아가다보면 상당히 내부까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매캐한 감각이 목구멍 안쪽까지 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직 숲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나무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어느새 신발 사이로 흙이 섞여 들어오면 나는 질척한 진흙과 조금은 거슬리는 가는 이파리를 빼내야했고
지나다니면서 보이는 새와 나무들이 내게 더 멀게 느껴졌다.


여전히  뒤에서 들리는 것 같은 테러보어의 울음소리가 맴돈다.
떨어지지 않는 그 소리가 날 불쾌하게 만든다.
꺼림칙함에 뒤를 돌아보고 나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분명히 칼로 덩굴을 자르고 잔가지를 쳐내면서 나아왔는데도
뒤돌아본 풍경은 여전히 아까 내가 몸을 숨기고 기어오르려 했던 진흙이 묻은 나무,
그리고 작은 개울과 와각수, 그리고 테러보어가 여전히 있었다.

"분명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았는데..."


묘한 불길함에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면 내가 나아갔다고 생각한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잘라낸 나뭇가지와 덩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라 있었다.
나는 아까 그 테러보어를 겨우 떨쳐냈다고 생각한  장소에 갇혀있었다.
어느새 하늘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내가 나무에 묻힌 진흙도 말라 굳어있었다.

"이러니 국경인데도 군사 배치가 없었군."

[이런 지역은 나도 처음 봤다. 아예 불이라도 질러서  태워버리지 않으면 쉽게 지나가는건 불가능하겠군.
왜, 이번에도 태워버릴건가?]


"나를 무슨 방화광처럼 말하지 말아줄래?"

이런 숲이라면 분명 기록이 남았을텐데 이런 숲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내가 그렇게 주저앉았을 때 체헤게가 말했다.

[그래서, 이 숲에 와서 확인하고 싶다고 한게 대체 뭐였나?]

"콜린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알고 싶었어. 비밀같은 것들.
그리고 슬슬 개인 연구용으로 쓰던 재료들도 부족해진게 있어서."


[그럼 이런데서 주저앉지 마라. 나이는 나보다 몇배는 많은 주제에 징징대지 말고.
여자는 여자다 이런건가. 아쉽지만 여기 네 투정을 들어줄 사람은 없다.]


"후, 그 말이 맞네. 살다살다 유령한테 위로를 들을 줄이야. 하하..."

[웃지 마라. 정든다.]

가만히 보니 테러보어는 그렇다 치고 와각수가 유난히 움직이질 않는 것 같았다.
분명 저 크기면 테러보어에게 밀릴 정도는 아닐텐데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 테러보어는 엄니를 와각수에게 들이박으려고 하고
그걸 와각수가 뿔로 막아낸 상태였다.
이상하게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놀라운 것은, 분명 마을에서 여기까지  때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당장 뒤로 몇 걸음만 돌아보아도 마을이 보일 정도였는데
지금은 빽빽한 숲 어딘가에 막힌 것 같았다.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나가지도 못한다.


"체헤게, 와각수는 여신의 손톱이라고 했나?"


[그랬지.]


"아무래도 저 와각수를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와각수를?]


"와각수가 분명히 뭔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일단 나는 신이라는 것들이랑은 그다지 친하진 않으니까 말이지.
쪼잔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정도일줄은 몰랐지."


[그래서 어떻게 잡을건가?]


"한번 더 해봐야지."


나는 다시 집중을 하고 손끝에 힘을 모았다.
손끝으로 천천히 몰리는 따뜻한 기운이 막 뜨거워지려고 할때
몸에서 마치 전원이 내려가듯 힘이 풀리고 나는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히도 손끝으로 모았던 마력도 모조리 흩어졌다.


"하아... 일났네. 몸 쓰는 일에는 자신 없는데."

의도적으로 무언가가 방해하듯이 힘이 사르르 풀려버린  같았다.
숲은 그런 나를 비웃듯 주변으로 켜켜이 안개를 둘렀고
시야는 그렇게 천천히 좁아졌다.

"이거 뭐 여기서 신자 하나 늘려보겠다 뭐 이런거야? 어림도 없어.
나는 절대 안굽힐거니까."

침을 삼키고 테러보어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부디 녀석이 날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아마 테러보어도 와각수의 뿔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같았는데
꾸륵대는 숨소리와 함께 그 거대한 엉덩이가 울긋불긋한 근육을 부풀리며
툭툭 꿈틀대고 있었다.  맥을 바라보며 나는 그 거대한 돼지의 다릴 노렸다.
기어이 단번에  커다란 발목의 혈을 노리고 칼을 휘둘렀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듯 보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부분에 칼날이 박히고
 커다란 다리를 단번에 잘라내진 못했지만 녀석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꾸에에에엑!"


 소리는 어딘가 돼지라기보다는 공포와 슬픔이 한데 섞인 울음과도 같은
괴상하고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녀석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통나무에 발이 걸려 넘어졌고,
내 칼이 아직 박힌 다리가 삐끗한 듯 보였으나 발목이 부러진 것 같은 자세로
기이하게 중심을 잡고 서서는, 통나무를 무게로 우지끈 하고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뒷다리 근처에 있던 나는 그 다리에 치여 뒤로 튕겨 날아갔고
2M 정도 지난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가 아프긴 했지만 바닥이 축축하던 탓에 꼬리뼈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등이 쓸리고 걷어올린 팔이 따가웠다.
아무래도 나뭇가지에 찢긴 것 같았다.

테러보어가 자리를 돌리면 순간적인 힘에 뜯겨나간 것으로 보이는 와각수의 뿔조각이 부러진 채로
두 엄니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제서야 본 와각수는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채로 숨을 내쉬고있었고
테러보어는 내게로 목표를 옮긴  같았다.
내가 조금 긴장하고 침을 삼키는 순간
 꿀꺽이는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 것 같았다.
테러보어가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최대한 녀석의 돌진 범위에서 벗어나는게 최선이었다.
겨우 지친 다리를 억지로 들어 달려야 했고 반쯤 굴러뛰느라 바닥에 얼굴을 쳐박고 진흙을 퍼먹어야 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내가 기대있었던 나무에 들이박혀 엄니를 쳐박은  야생 돼지는 그대로 반쯤 썩은 밑동에 박힌 머리를 흔들었다.
쩌저적 하는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커다란 나무가 그대로 기울어져는가 싶더니
돼지의 머리를 내리 찍었다.

[진짜 저런 돼지가 존재하는군.]

"그러게.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저기 들이받혀서 묵사발이 됐겠는데."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져 바라보면 진흙칠이  다리가 크게 찢어져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벌어진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서 빨리 치료를 해야 할  같은 상태였다.

[그 다리로 뛸 수 있나?]

"괜찮아. 아픈건 익숙하니까. 금방 나을거야."


나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와각수에게 향했다.
저 멀리서 다시 들려오는  괴물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칼은 아직도 테러보어의 다리에 박혀있었다.
난동을 부린 돼지때문인지 부러진 칼자루는 주변에 내동댕이 쳐져 있었고
생각보다 길쭉한 날만 돼지의  다리에 박혀있었다.


"아끼던 칼이었는데."


[그 칼이 말이냐?]


"주술용 칼이라서 좀 비싸게 사왔거든. 저거 하나 만드는데 까다로운 의식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를걸."


[그래봐야 돼지 한마리 못 잡는 칼 아닌가? 바가지가 비싸군.]

"저게 내 피 하나는 정말 많이 본 칼이거든. 뭐가 됐건 일반 칼보다는 잘들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의 피부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부드럽다.
강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이지. 내가 말하는걸 꺼리긴 했는데,
넌 얼굴도 너무 순해보인다. 마녀라는걸 몰랐다면 상당히 신뢰했겠지.]

"갑자기 칭찬이야?"


[나도 칭찬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다.]


"후... 그래, 알겠어. 그래서, 네 오랜 사냥꾼 경험상  돼지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해?"


[방법은 네가지다.]


"생각보다 많은데?"

[죽기를 기도하고 체념하거나 한번이라도  덤벼들었다가 밟혀죽거나,
발목을 공격해서 도망치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직 저기 누워계시는 여신님이 우릴 도와주길 바래야지.]

"여신이 저렇게 게으른 생물이라는 것도 우습긴 하네.
포션만 적당히 가져왔으면 저런건 금방 잡을 수 있겠는데."

[포션?]

"독이든 고통이든 저주든 방법은 많으니까."


[독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건 없나?]


"찾아볼만한게 모험가 시체 말고 뭐가 더 있겠어?
해피가 그랬잖아. 모험가들 시체라면 널렸을거라고... 잠깐."

[잠깐?]

"저 테러보어가  여기 있는거지? 내가 알기로 테러보어는 분명 무리지어 생활하는 동물인데.
산이나 숲에 테러보어가 발생하는게 드문 일은 아니다.
그래도 보통은 돼지들이 단체로 테러보어가 되거나 하는 바람에 상당히 애를 먹는 존재인데.
게다가, 테러보어가 이 마을에 목격되었다는 것도 이상해. 마을 외곽이라지만 여기에 오염된 정령은 없으니까.
그럼 뭔가 부패한 마력을 먹었다는 건데..."

[.....]

"저 돼지새끼... 대체 여기서  주워먹은거지...?"

느낌이 왔다. 내가 느낀 불길함의 정체를 조금은  것같았다.
테러보어 주변에서 느껴지던 묘한 불쾌함은 냄새였다.

"시취가 풍기는 거였어."

[그게 지금 상황을 바꿔주는 무언가가 되나?]

"당연하지. 저 돼지가 마력을 토해내거나, 부패한 마력의 원인을 토해내거나,
부패한 마력을 없애버리면 되는 거잖아."


[그게 다 다른 말이냐?]

"아무래도  숲에는 마력의 운용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어.
마력을 모으면 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것 같아. 더욱이 이 숲이 모습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는거고.
그렇다는 말은, 마력을 이동하지 않고 원래  자리에 있던 마력을 폭발시키면 뭔가  수도 있다는거지."


[확신이 있나본데.]

"원래 마녀는 호기심에 투자하는 사람들이거든."

나는 주변에서 뾰족한 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작은 사각형을 그리고  위로 내 머리카락과 핏방울,
각종 주문을 간략히 적었다.
아직도 테러보어는 나무에 머리가 끼어 바둥거리고 있었으므로 기회는 지금이었다.
내가 다행히 마법진을  그리고 나서도 녀석은 계속 버둥거렸기에
나는 손에 힘을  쥐고 돌을 던졌다.
돼지의 큰 등판에 돌이 맞은 후에 녀석은

"키에에에엑!!"


하는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앞도 보이지 않는 주제에 다짜고짜 덤벼들었고
나는 곧장 그린 마법진을 발동했다.
잠깐 반짝이는 빛이 생기더니 안개가 피어오르고 효과는 금새 사라졌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이건...]


"순간적으로 바닥의 진흙의 수분량을 늘렸어. 마치 늪같은거지.
달려오던 와중에 그대로 빠져서 네 발이 다 묶여버렸어.
어차피 마력은 금방 흩어질테니 다시  진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적어도 늪에 빠져버린 채로 온 몸의 진흙이 굳어버리면 움직이긴 어려울걸."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녀석의 머리가 든 땅이 조금씩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잘 챙겼네. 무기로 쓸게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십자가를 꺼냈다.
끝에 달린 날은 아직 날카로웠고
내 피가 여전히 묻어 붉게 물들어있었다.


"당분간 저녁상엔 돼지를 올려야겠어."

내가 힘껏 십자가를 내리찍으면 돼지의 머리에  소리가 나듯 박히고는
검은 피가 분수처럼 튀어올랐다.

[이런건 예상 못했는데..!]


"마녀 손도 베는 물건인데 당연히 그래야지.
회복도 못하게 만들던데. 아직도 상처가 낫질 않아 쓰라리다고.
돼지 머리에는 얼마나 듣나 볼까?"

땅 속에서 울리는 비명소리에 나는 귀를 틀어막았고
조용히 와각수가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더니 몸으로 테러보어를 지긋이 누른다.
꿈틀거리던 테러보어를 꾸욱 눌러대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눈은
어쩐지 내게 수고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꿈틀대던  거대한 몸집은 기어이 사그라들듯 가라앉았고
마치 죽어가는 병자가 마지막 숨을 끌어내 상한 폐를 부여잡고 쿨럭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 거대한 괴물은 숨을 거두었다.
바닥에서 몸부림치다 숨이 막혀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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