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낡은 십자가
죽은 테러보어의 맥이 뛰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와각수는 천천히 자리를 비켜섰다.
그리고는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울고는 조용히 등을 돌려 떠나갔다.
"결국 여신의 도움을 받았네."
[여신? 저건 그냥 짐승일 뿐이다. 네가 한거다.]
"어쩐일이야?"
[그냥 답잖은 소리로 자기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꼴보기 싫었을 뿐이다.]
"그런걸로 하자."
말은 그렇게 하고 나서 그제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주저앉았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겨우 머리만 보이는 테러보어의 머리에 꽂아넣은 십자가를 뽑아냈다.
아직 다 빠지지 않은 검은 피가 울컥울컥 간헐천과 같이 솟아난다.
그 아래로 매케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숨을 쉬기 답답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드디어 이 테러보어가 모험가를 놓아주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뿌듯하네."
[전리품에 대한 성취감이 아니라?]
"모르지 나야. 그래도 이 정도면 전리품의 성취감이든 뭐든. 적당히 기분만 좋으면 되는거 아냐?"
[쾌락 만능주의라고 하는거였던가?]
"잘 풀렸으니까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의미지."
그렇게 대꾸하고 뽑아낸 십자가의 피를 조심스레 닦아낸다.
십자가에 검붉은 물이 들어 보석이 빛이 바랬다.
20cm가 채 안될 것 같은 그 십자가는 마치 말뚝과 같이 뾰족하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원래는 처형도구였지?"
[처형도구...였지.]
"너는 말이 된다고 생각해? 처형도구를 신앙의 증거로 갖고 있는게."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그런게 보통 신으로 묘사된다고 했으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과거에는 해일이나 지진, 벼락같은 것들도 신의 벌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 실체가 없는 것들과 아르간티아는 본질적으로 뭐가 다른건가?
왜 이 세상에 아직까지 신으로 존재하는건지 모르겠군.]
"넌 신자 아니었어?"
[글쎄, 혹시 그런 속담 아나? 땅에 떨어진 눈은 녹기 마련이라고.]
"분명 하늘에서는 아름다워도 떨어지고 나면 아름답던 모습은 흔적도 없다는 이야기였지.
나중에는 어디에 눈이 내렸는지도 모른다고. 주변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 이야기.
그래도 나는 그게 위대하신 종교님도 부정하고 그러는 줄은 몰랐는데."
[알아서 좋을대로 생각해라.]
나는 가벼운 조롱의 의미로 그 일렁이는 아지랑이의 중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슬며시 올린 입꼬리에 그도 아마 내가 어떤 의미로 그렇게 행동한건지 느꼈겠지.
죽은 테러보어를 다시 파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곳에서 마력을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마력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해도
금새 원래대로 돌아오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곳의 위치조자 알 수 없는데
이런 돼지를 파내는데 시간을 소요하면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소재일텐데 아깝게 됐네."
[테러보어를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거지?]
"뭐든? 쓰려면 사용처는 얼마든지 있어. 내키지 않아서 놔두는 것 뿐이야."
[그럼 얼른 여길 빠져나가지 왜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거냐.]
그 말대로였다. 이미 안개가 자욱해서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주변이 밝아진 것으로 보아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은 분명했다.
아마 내 짐작대로라면 주변의 나무나 바닥에 표시를 해도 큰 의미는 없으리라.
"후우..."
가방을 다시 정리했다. 써버린 부적이나 부러진 칼 대신에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챙겨넣고
버릴 것을 버리고 나서 숨을 돌리기 위해 개울에서 몸을 씻어냈다.
물론 개울이 큰 것도 아니라 졸졸 흐르는 시냇물 정도였기에
가볍게 발을 씻어내고 베인 상처를 정리하는 정도였다.
손에는 이제 막 딱지가 졌고, 다리는 빠르게 아물어 걸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물론 출혈은 어쩔 수 없어 조금 어지러운 감은 있었다.
그러나 이게 출혈로 인한 것인지 혹은 무리한 때문인지 마력의 남용 때문인지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는것도 아니었다.
다만 알 수 있게 된 건 확실히 회복 속도는 느리다는 것이었다.
안카 숲 밖에서는 불에 타던 중에도 살이 돋아날 정도로 빨랐으니까.
평소같으면, 아니 평소라는 말 자체도 우습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소하고 나서 숯덩이가 떨어지는 정도면 미백도 깔끔히 된 새 피부가 자랐는데
이런 어색한 통증은 오랜만의 충격이었다.
"이렇게 상처가 안나으니까 좀 이상하네."
[그것도 그렇군. 불에 태우면 새살이 돋아나고, 목을 치면 칼이 투과하고,
총을 쏘면 총알이 박히는 일도 없었지. 불사의 존재였잖나?]
"지금이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거 좋네."
[관둬라. 정말 죽을 생각이었다면 아까 테러보어의 박치기를 피했을리 없지.]
"아 그런가... 본능의 문제일까 의지의 문제일까... 참... 아이러니 하네.
나를 제일 죽이고 싶어했던건 너 아니었어?"
[내가 그렇게 죽이려 들었는데 실패한 일이 눈앞에서 너무 간단히 이뤄지면
내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것 같지 않은가.]
가만히 쥐고있던 십자가의 말뚝을 들어 목에 가져다 댔다.
서늘하고 뾰족한 감촉이 목에 닿고, 조금 찔린 목에서 비릿하게 피가 흘렀다.
천천히 힘을 주고 밀어넣듯 목을 찌른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부드럽게 들어갈 정도로 말뚝은 예리했다.
십자가를 박아넣으면서 픽 웃음을 지었다.
"마녀는 역시 십자가에 찔려 죽어야지."
[하... 허무한 죽음이군.]
눈을 꽉 감고 목으로 팍 십자가를 박아넣었다.
고통이 물 밀듯 몰려왔다.
그러나 목이 찔려서인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목너머로 한껏 넘어가는 피맛이 비렸다. 덕분에 정신을 차리기 전에 꿀꺽이며 그 피들을 마셔야 했다.
눈을 감고 그 자리에 누웠다.
차라리 이런데서 죽으면 아무도 내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 막 기분이 좋아지려고 했을 때,
묘한 어둠이 찾아왔다. 눈 앞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그러나 이상하다. 편안하다거나 괴로움으로 죽어가는 것이 아닌,
물리적 어둠이. 그리고 작은 반짝임이 아른거렸다.
[체헤게, 난 죽은거야?]
[지금 하고있는 꼬라지를 보아서는 그런건 아닌 것 같군.
그냥 피흘리며 누워있다. 이걸 어떻게 더 현명하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제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은 여전히 아팠고 등에 느껴지는 축축한 흙의 질감과 까슬한 풀잎,
그리고 팔위에 기어올라온 작은 벌레들이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목에 여전히 박힌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밤이잖아?]
[밤이라고?]
그제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외에는 모든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안개가 걷히고 어느새 밤이 된 하늘에 별이 새롬히 박혀있다.
그제서야 둘러보니 상당히 가운데까지 들어와 있었음을 느꼈다.
내가 잘라낸 덩굴과 나뭇가지는 내가 여기까지 들어온 길 뒤로 나 있었다.
분명 앞으로 냈다고 생각했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느꼈었는데 말이다.
[가자 체헤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네.'
아무래도 이 숲은 내게서 빼앗은 마력을 바탕으로 환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십자가의 효과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로서 추정하기로는 이 십자가는 마력이 원인인 효과를
그대로 정화해버린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이 상황이 어색하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마 오래 전에 아직 교회에서 정화마법이 활발히 시전되던 시대에 만들어진 물건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마력을 일상생활에서 쓰는 일 자체가 더 드물어져 버려서 사용처가 불분명했을지도 모른다.
정화마법이라고 생각해서 테러보어의 머리에 박아넣었던 것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내게 숲이 걸던 환각에는 시간 감각을 흐리게 하는 것도 있었나보다.
아직 밤이라는 것을 알고난 지금은 숲길을 헤멜 일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돌아가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졌다.
그너나 이제는 작은 주먹칼도 없었으므로 결국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우거진 숲과 멀리 보이는 산짐승의 그림자를 피해
더 나아가기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이 숲 안에 카페를 만들었으면 상당히 재미있었겠는데.]
[그래서는 올 사람도 못 오지 않나?]
[뭐 도시 전설같은 느낌으로 존재하는 카페. 흥미롭지 않아?]
[너의 흥미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거냐. 모든걸 흥미롭다고 말하면서
사고를 더 크게 만들 생각이라면 나는 이쯤에서 동참하는건 그만두겠다.]
[그건 너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게 아니라고 보는데.]
[피곤하군. 언제 돌아갈거지?]
[지금 돌아가도 의심을 받으리라 생각은 하는데, 그래. 일단 돌아가자.]
나는 숲길을 돌아나왔다.
다행히 내가 쳐놓은 길이 있어서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어렵지 않다는 것은 시간이 얼마 소요되지 않았음과는 다른 이야기다.
콜린의 부지가 멀리 보이고, 높은 울타리와 감시탑, 그리고 그 옆으로 보이는
작은 부두. 겨우 쪽배 한 두대 정도 띄울 것 같은 좁은 공간을 보면서
마을 내부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했다.
지금 시간을 모르니 확실히 대처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체헤게, 지금 시간 알아?]
[아직 밝아서 모르겠지만 오후 3시 정도 되지 않았을지 생각한다.]
[아, 너 아직 제정신 아니었지. 그래. 알겠어.]
나는 우선 숲을 벗어났다. 저 멀리 보이는 서치라이트 옆으로 돌아 나오면서
오래 전에 배운 마법의 계열에 대해 복기했다.
마법의 종류에서 분명 정신계 마법이 따로 분류되던 것이 생각났다.
보통은 저주의 주술같은 계열 외에 정신계 마법은 그닥 유명한 장르가 아니라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에 살짝 후회했다.
내 목에 박힌 십자가를 꾹 부여잡고 천천히 뽑아낸다.
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떡진 핏덩이를 토했다.
"커헉! 쿨럭 쿨럭..."
엄지 손가락 마디 정도의 피떡이 짧은 시간에 토해져 나오고,
토사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시뻘건 핏물이 입안에서 여실없이 쏟아진다.
"어으, 거지같네."
구멍이 뚫린 목을 조금 더듬기도 전에 목에 난 말뚝으로 찍힌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갔다.
그러나 아무래도 십자가에 찍힌 탓인지 상처가 회복되기까지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큰 흉터와 굳은 피가 그 자리를 애매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부상을 감내하면서 그 고생을 할 필요가 있었는지 생각하면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도
내가 스스로 낸 상처였기에 누구를 탓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숲에서 얻어낸 거라고는 이 십자가 뿐이었다.
그마저도 테러보어의 머리 위를 찍어내고 검붉은 색으로 물든.
보석이라고 붙어있던 화려한 치장은 칙칙한 돌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내 개인용 단도를 잃은 것과 생각하면 영 수지타산이 맞질 않았다.
칼 뿐인가? 스트레스나 피로도의 경우에도 큰 차이가 났음은 명백했다.
"손해를 봤네..."
[어, 아직 밤이었군... 아, 그래서 아까...]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 체헤게는 내게 한마디 덧붙였다.
[네가 애써 숲에 들어가겠다고 설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거다.]
"숲에 들어가보고 싶었다니까."
[그런 형편 좋은 기대는 혼자 있을 때 하시지.]
"혼자잖아?"
[하아...]
결국 주변을 둘러보다 마을로 들어가는 강을 따라 흘러가기로 했고,
강은 내 피로 조금 불긋해지는가 싶더니 곧 투명한 모습을 되찾았다.
혹시 피로 얼룩져버리면 발뺌하기도 어려울테니 걱정을 했었는데,
선착장으로 조심스레 올라서서 젖은 몸을 부여잡고 도망치듯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는 조용했고 문도 굳게 닫힌 것으로 보아 아무도 손님은 오지 않은 모양이다.
열린 흔적도 없어서 그새 바닥에 쌓인 먼지가 가게의 인기를 반증하는 것 같아서
왠지 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