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신부와 십자가 (31/303)



〈 31화 〉신부와 십자가

그래서 결국 기껏 쉬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놓은데 반해 아직 시간이 그리 지나지도 않아서
정상적으로 가게를 열기로 했다.
물론 시간이 상당히 지났으나 아직 가게를 열지 않은 시간이라는 의미다.
덕분에  서너시간 눈만 붙이고 휘청이며 가게 문을 열었다.
익숙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낯설어져 버린 공간이 다시 서서히 내게 드리워진다.

"좋은 아침이군."

그렇게 혼잣말을 해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문 앞에 손님도 보이지 않는다.
피곤함에 커피를 내린다. 아마 지금은 손님들이 몇 명이 찾아와도 내가 더 커피가 필요할 것 같다.
이상하게 목의 상처는 흉터가 지지 않는다. 아마 나중에는 나을거라고 믿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니까. 그래도 일단은 시각적으로 불편함을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카프를 목에 둘러 상처를 가렸다.

커피를 내리고 괜히 피로를 풀기 위해 타우린을 잔뜩 넣은 약품을 섞어 벌컥벌컥 마셨다.
억지로 눈에 힘을 줘본다. 그렇게 겨우 몸을 일으키면 가게 문이 열리고 로라가 찾아왔다.


"오, 가게를 열었구나. 이런 소란에 한결같구나 엘리아."

"고맙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이름은 엘리아가 아니라 에리아지만 노인의 기억력을 굳이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메뉴를 형식처럼 그녀에게 보여주고 자리에 앉아 커피잔을 비웠다.
손님 앞에서 내가 커피나 홀짝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 간밤에 별 일 없었니? 하긴 여긴 마을에서도 외곽이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요?"

태연하게 물었다. 에스테리카를 내려 그녀에게 전했다.
가볍게 웃으며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남들이 기억하는 사건의 내용을 들으면 내가 앞으로 취해야 할 스탠스를 알 수 있을 테니까.

"호호... 그런 사건을 모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은 한다만 궁금하면 이 할미가 알려주마.
듣고싶니?"


"네. 이야기 해주세요."

"그래, 간밤에 마을 청년 여럿이 길바닥에 쓰러져있었단다.
기절한채로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이유를 모르겠다고만 대답한단다.
거기까지면 그냥 이상한 소동이겠는데 말이야, 몇몇이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더구나."


"믿기 어려운 이야기요?"


"불타는 괴물을 봤다고 하던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구나.
솔직히 그다지 믿기는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생각을 해보렴. 불타는 사람형태의 괴물이 있을리 없잖니.
불에 타고도 살아있을 수 있는 생물은 없잖니?"

"그건 그렇죠."


"아무튼 마을 상인들이 단체로 그렇게 쓰러져버리는 바람에 오늘은 대부분의 가게들이 휴업이란다.
덕분에 자주가는 빵집도 문을 닫았어. 불길한 일이 있었으니 오늘은 다들 그냥 무사히 지나가길 바란다는 게지.

"그런가요..."

"그래, 엘리아. 너도 조심하렴."


"네, 로라할머니도 조심하세요."


"고맙구나. 그나저나 그 기절한 아이들은 왜 그시각에 거기에 나가있었을꼬...
낫이며 삽이며 바리바리 싸들고 있던데... 아까까지도 덜덜 떨면서 기어이 저주가 내렸다고 하는걸 보면
뭔가 그 아이들도 잘 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하나같이 상태가 이상해서 묻기도 그렇구나."


"그건 확실히 궁금하긴 하네요."


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란다. 듣는건 네 자유지만 말이야.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너도 가게 문을 닫고 쉬려무나."

"충고는 감사하지만, 어차피 가게 문을 열어도 사람이 그렇게 많이 오는 카페도 아니에요.
제발 저는 누가라도 좀 와줬으면 싶네요."


"그러니... 참 용감하구나. 오래 전에도 너 같은 아이가 있었는데 말이야..."

"저는 저에요 로라. 다른 누구와 비교하는건 아마 그 분과   다 썩 좋은 일은 아닐 거고요.
일부러 그러신게 아니라는건 알아요. 저는 에리아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요."

"아, 내가 실수를 하고 있었구나. 미안하다 에리아."


그녀는 나름 덤덤하게 커피를 마셨다.
그 어색한 침묵속에 누구도 말을 꺼낼 생각조차 못했고, 로라는 결국 커피를 마시고 나서 내게 말했다.


"나는 주의한다고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다보니 실수를 하는구나.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버려서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늙었다는걸 깨닫곤 하지."

나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녀와 늙는다는 개념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기에
어색하게 긍정하는  외에 별다른 말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래, 오늘도 커피가  맛있구나."


"감사합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머니를 잠시 뒤적이더니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민다.
커피 값보다 명백히 많은 금액이었다.

"받으렴. 내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잔을 내려놓고 눈인사를 보내며 조용히 걸어나갔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체헤게에게 그녀의 에스코트를 부탁할 수 없어 그냥 앉아있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점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수척해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더럽혀진 얼굴에 옷이 투박하게 찢긴 그는 얼마 전에 가게를 찾았던 제임스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옷을 정돈했다.
이미 상당히 찢어진 옷이었지만 그는 임시로 수선하는 것 처럼 얼기설기 엮은듯한 옷을 입고
조금 피로한 얼굴로 테이블에 앉았다.


"하아... 오랜만이네요. 어제 봤지만요."

"아, 어서오세요 제임스. 반가워요."

"반갑다...  꼴을 했는데도 환영해주는 건가요?"

"당연하죠. 모토니까요. 저희 가게는 돈만 내면 모두 손님이에요."


"돈만 내면 된다...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좀 당황했네요."


"보통은 어디서 들으시는데요?"

"뭐, 교회 단속차 나간 홍등가의 창녀들이죠. 그 사람들의 서비스 정신은 알아줘야 해요.
물론 제가 거길 이용한 적은 없지만요. 참 개방적인 사람들이에요.
자기들 앞에서 가게를 철거하려 하고 영업을 방해하는 사람들의 팔을 잡아끌면서
돈만 내면 모두 환영한다고 쉬어가라며 웃는 그 얼굴은 가히 교회보다 차별없는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진짜 신부 맞아요? 점점 의심스러운데. 신부가 창녀를 옹호한다고요?"


"옹호한건 아니에요. 그 차별없는 자세만은 인정할만 하다는 거죠.
솔직히 저는 그 사람들에게 썩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굳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아요.
교회는 교회의 위치에서 사람들을 받아주면 되는거죠.
굳이 그런 사람들을 교화해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들 권한도 능력도 없어요.
아마 일시적일거고요."

"이해하기 어렵네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뭐 그런겁니다. 그 사람들이 팔던게 섹스가 아니라 다른 상품이었다면
아마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제일 건전했을 편견없는 사람일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단속하신다면서요?"


"일이니까 해야죠. 저는 그런 사람들을 방해하고 싶은,  정확히 말하면 마주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성적인 부분에 흥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적어도 자기의 몸을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내면서 같은 부류로 떨어지고 싶지는 않은거죠.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제가 더 꺠끗해진다거나 하는건 아니지만."

"세상에는 여러 부류가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기 걸린 십자가는 어디서 얻으신거죠?"


그가 내가 주운 불그레한 빛으로 물든 십자가를 가리켰다.
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주웠습니다."


"주워요? 그런걸? 흠... 그건 아마 교회에서 발행한 성물의 한 종류일겁니다.
주로 저런 성물은 악을 정화하는 계열의 주문을 걸어놓죠.
지금은 교회가 이전만큼의 신성력이 없어서 저런 도구 자체를 만들지도 못하니만큼
이제는 희소성이 높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건 좀 많이 얼룩덜룩하네요.
붉은 것도 묻었고. 저거 피는 아니죠?"

"피에요."

"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네요. 절차상 묻겠습니다.
누구 피죠?"

"제 거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스카프를 벗어보였다.
목에 뚫린 큰 구멍이 십자가의 말뚝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는 이마를 짚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걸 목에 찔리고 잘도 일을 하시네요."


"다행히 죽지는 않아서요. 다만 치료가 더디더라구요."

"그럴거에요. 정화라는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게 아니니까요.
나쁜 효과든 좋은 효과든 모두 초기로 되돌리는 것. 그리고 없었던 것으로 하는것에 조금 더 가까우니까요."

"아..."


"마력으로 인한 치유에는 아마 그만큼 저항이 있을거고요.
그런데 요즘 시대에 마력으로 치유하는 사람은 교회말고는 잘 없을텐데요.
그마저도 어지간한 교회에서는 잘 못해요. 그것도 저는 교회에서 오래 일했으니 알고 있다고 하지만,
절대 아무나 알만한 정보도 아니거니와, 아무에게나 무턱대고 해줄만한 일도 아닐텐데, 어떻게 그걸 아셨죠?"

"음... 굳이 알려드리고 싶은 정보는 아니네요."

"그럴 수 있죠. 크게 문제되는 일도 아닐거고요. 교회에서도 아무에게나 회복이나 정화를 걸어주는건 아니니까요.
남을 해치는 일도 아니니까. 다만 당신이 이런 곳에서 카페를 하고 있을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혹시 괜찮으면 이름을  들을  있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에리아에요."'

"에리아.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신과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랑 친구... 괜찮겠어요?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이미 생각보다 많은걸 지고 있어요. 하나 정도 늘어난걸로 동정받을 정도는 아니죠."

그는 그렇게 말하며 수염을 메만졌다.
그 표정에는 묘한 자신감이 있어서 내가 그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요, 잘 지내보죠. 종종 오세요. 서비스 정도는 드릴테니까."

"그래, 기회가 되면 자주 올게 에리아."

"이렇게 바로 말을 놓는거에요?"


"친구."

"그래, 친구. 알겠어. 네 마음대로 하라고.
그러면 이제 나도 들어야겠는데, 옷이 왜그래?"

"음, 어디부터 말해야 하려나. 알다시피 나는 얼마전에 여기로 파견을 나왔어.
오크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더 정확히는 동료가 실종된 이후에
우연한 시기에 오크가 출몰했다는 교회로의 편지에 스승님이 나를 보내는 바람에
등쌀에  이기듯 나온거지. 그래서  임무는 정확히 말하면 동료를 찾는 일이야.
혹시 알고 있으려나, 젤렌지라고 하는 녀석인데."

"젤렌지? 그런 이름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렇겠지. 역시. 아무튼 그 녀석이 혹시 오크와 관련이 있을까 해서 찾아왔어.
성격이 너무 착해서 남한테 싫은 말 한번 제대로 못하는 아이라 말이야.
걱정이 안될수가 없었지."

"아, 그거라면 네가 찾던 오크도 비슷한 성격이던데?"


"오크, 아... 만나봤어. 모라프루사 데 브라기아타선생 말이지?"

"어, 퓨어하트라고 불렀지."

"퓨어하트라, 좋은 이름이네."

"그렇지. 성격에 맞는 별명이었어. 덩치에 맞지 않게 순수하고 착해서."

"아무튼 나는 제대로 헛걸음을 했다는 의미였지.
이 마을 사람들에게 젤렌지를 보지 못했냐고 물어보고 다니기야 했어.
물론 사람들이 젤렌지를 알리가 없으니 교회에서 나온 신부라고 말했고
사람을 찾고있다는 정도로만 말했어.
인상착의를 가볍게 이야기해 줬었고. 그런데 나를 썩 달가워하는 눈빛은 아니더라고.
별 수 없이 근처 여관에 묵기로 했는데, 갑자기 잠이 쏟아지는거야.
살짝 탄내가 나기는 했는데, 불안함을 신경쓰기도 전에 곯아 떨어졌지.
자고 일어나보니 여관 주인이 불안한 눈초리로 나가라고 하더군."

"결국 쫒겨났구나."


"문전박대보다는 나은것 아니겠어? 하루  자고 나왔으니 상관없어.
자고 일어났더니 어딘가 꺼림칙하던 불쾌한 느낌같은게 사라졌거든.
그리고 마을을 둘러보던 중에 강이 보인거야. 그 강에서 쉬고 있었지.
수영을 하면서 말이야. 나중에 담배를 피우려고 보니 라이터가 사라졌더라고.
하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잃어버린 라이터를 찾고 있는데 혹시 보신 분 없으시냐고."

"그랬더니 혹시 너한테 어젯 밤에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느냐고 물어봤다거나 그런거야?"


"비슷해. 이 라이터가 네 것이냐고 묻더라고.
왜 그게 거기 있냐고 대답하자마자 두드려 맞았지 뭐야. 하하하!"


"그런 사람이 잘도 여기까지 태연하게 왔네?"

"여기는 왠지 평화로우니까. 촉이 좋았지. 아니 운이 좋았나?"

"그래, 편히 쉬다 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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