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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화 〉도망자 (36/303)



〈 36화 〉도망자

사실은 그다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정착하고 싶기도 했고, 이제서야 만난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아직 글로타인씨의 집에 인사를 하러 가지도 않았고,
퓨어하트씨를 다시 만나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다시 올거라고 말하던 제임스도 기다리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이제 도망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처음에는 오히려 당당히 있어볼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위험 부담이 너무 컸으니까.
오히려 사람들과 더 친해지지 않아 다행일지도 모른다.


가방에 짐을 하나  챙기면서 정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마녀니까... 도망치는건 자신있는데...
억울하다.
괜히 원래라면 흘리지 않았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름 포커페이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봐."

[고생했다.]

체헤게는 짧은 대꾸 후에 내 등을 토닥였다.
짐을 빼낸 후에야 나는 가방을 들쳐메고 가게를 나왔다.
이미 12시가 한참 지났다.
괜히 슬퍼지는 건 아직 마을을 뜨지 않아서.
눈 앞에 아른거려서 보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새 부적을 꺼냈다.

집음부라고 하는 부적이다. 소리를 녹음할  있다.
그걸 들고 바르르 떨며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목이 멘다.


"마르...커스씨... 에리아에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게를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녹음한 것을 잘 붙이고 나서야 나는 눈물을 닦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내 발소리가 괜히 더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숲으로 도망쳤다.
 국가를 떠나기 위해서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 주제에 맞지 않게 너무 나섰다.


걷다보면 생각보다 금방 안카숲으로 가는 길목이 나타났고,
여전히 경계를 서고있는 경비병이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가 나를 막아섰다.

"멈추십시오. 이 앞은 통제되어있습니다.
허가 후에 정식으로 입장하실수 있으니 내일 오전중에 다시 오시...ㄱ...
에리아씨 아니십니까?"

"제가... 그새... 그렇게 유명해졌나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리아씨의 가게는 이미 콜린의 명물이라고요!"


"그래요... 이젠 아니에요... 비켜주세요..."


"안됩니다. 뭔가 표정이 어두우십니다.
상태가 안좋아보이시는데 이런 위험한 곳으로 가는 길목을 나와드릴수는."

"아..."


내가 멍하니 그의 대답에 멈춰있었더니 체헤게가 말했다.

[멈춰라! 정신이 나간거냐!]

갑자기 나의 손을 막는 그를 보고 이제서야 뭔가 잘못됨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공격용의 붉은 전격을 파지직거리는 손을 보고 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상당히 화가  것 같다.
정신을 차릴 쯤에는 이미 나의 손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경비가 한껏 경계하며
나에게 돌아가 달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 마을에 처음 찾아왔을때도 몰래 들어왔으니
나갈때도 몰래 나가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런데에 쓰려고 마법을 배운게 아닌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린다.
나는 경비를 손으로 밀치고 앞으로 달렸다.


"미안해요!"


경비는 내게 밀쳐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에리아...씨..?"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숲으로 달렸다.
이미 안카숲에는 누군가가 묶은 로프가 늘어졌고,
나는 그 줄을 잡고 앞으로 걸었다. 계속 걷다보면 결국 줄의 끝에 도달할거고,
그렇게 되면 이 콜린에서도 더는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테니까.


이번에는 넉넉한 준비를 마치고 들어왔으므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숲을 빠져나갔다.
숨이 차올라도 멈출 수 없는 다리를 억지로 앞으로 내딛었다.
그리고 마침내 매단 로프의 끝에 도달했을때, 나는 어느새 환각이 깊게 자리잡은
그 특수한 공간의 중심에  있었다.


기괴한 장소. 나무가 말라있고 땅이 오염된 듯한 느낌.
이게 환각이라는걸 알면서도 믿을 것만 같은 진한 음기에
나는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숨이 차다. 벅차오르는 것이 아니라, 목에서 느껴지는 공기가 차다.
다시 발끝을 적시는 묘한 감각에 발을 구른다.
나는 분명히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형용할 수는 없었다.

왠지 떠올려서는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깨가 간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린다.
그럼에도 머리는 아주 맑았고, 숨은 여전히 차가울 뿐이다.
요즘은 정말 오랜만에회로가 타도록 마법을 썼다.
그래서 몸은 상당히 삐걱이고 있었다.


나무에 기대 내가 말했다.

"체헤게, 나 퀘트로네스로 갈거야."


[퀘트로네스?]

"응, 거기로 가서 제국의 삶을 경험해 볼거고, 모험가가 될거야.
모험가가 되어서 나도 자유롭게 모험을 떠날거야.
그리고 나서 나중에, 정말 지치게 되면 그때, 다시 자그마한 가게나 열어볼까."

[모험가라...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괜찮겠나?]


"모험가는 직업 선정의 기준이 낮으니까.
그리고 쉼없이 돌아다니는 역마살이 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천직이지.
어차피 돌아다닐거라면 말이야."


[알아서 해라. 어차피 난 도망칠 방법같은건 없는 거잖나.]

"나중에 내가 정말 질리면 풀어줄게. 근데..."


[그런데?]

"아냐..."

차마 입밖으로 내기가 어려웠다.
아직도 내게서 도망치고 싶은거냐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아직도 그에게는 마녀 이상의 가치가 없는지.
그러나 현실은  냉정한 것이고, 그는 이미 내게 말했다.
언제 풀어주는 거냐고. 도망칠 방법은 없는 거 아니냐고.

짧은 감상은 후회밖에 남기지 않는다.
어설픈 동정보다는 차라리 그가 싫어하는 나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이
우리 둘에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아마 나도 그도 도망자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나는 도망쳤고 그는 실패했을 뿐이다.
그의 오랜 기억이 내 손아귀에 묶여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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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헤게>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내가 아직 젊은 사냥꾼이었을 시절의 일이다.
그날 몬갈리오는 내게 말했다.
이 소녀는 우리가 맡아서 키우자고.
처음으로 나는 누군가를 담당해 키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나 외에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울기도 금방 울고, 먹기도 많이 먹으며 쓸데 없이 까탈스럽고 예민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금방 정이 들었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날 내 곁을 떠났다.
더 정확하게는 몬갈리오의 곁을 떠난 것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떠나야  거라는걸.


하지만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건 아마 몬갈리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데도 외로웠고 그리움에 익숙함이 무뎌져간다.
함께 하던 것으로 변해버린 고독이 자꾸 가슴을 찌르기 시작했다.
시큰거리던 가슴이 눈물로 메워지고 나서야 나는 공백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직 몬갈리오에게는 그건 벅찬 일이었다.
상대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걱정을 하는 말투가 모두,
내가 마지못해 수긍한 이별과는 정 반대였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싸우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돌아온다면 받아줄 집을 제시했고
그는 떠난 그녀를 품어줄 사람이 되려고 했다.
누가 틀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당시의 우리에게 그 소녀는 딸과 같았으니까.

아마 소녀는 몬갈리오를 아버지처럼 여겼을 것이다.
몬갈리오도 그녀를 찾겠다며 집을 나섰고  길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결국 그  중 누구도 지키지 못했지만 말이다.
친구는 병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소녀는 공포로 패닉상태가 되어
몬갈리오의 무덤을 배회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걸.


나도 아는데, 그녀는 몰랐다.
모두가 그걸 그녀의 잘못이라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녀의 잘못이라고 해버렸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나도 있었다.
내 짧은 가방끈으로 생각해도 분명했다.
둘을 죽인건 나다.
무덤을 파헤치는 소녀를 처음 보았을때,
나는 안타까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동시에, 어딘가 불안하고 매스꺼웠다.
그냥 그녀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고 여겨서인지도 모른다.
얼음은 결국 녹아 물을 만들수밖에 없다.
얼음이 아무리 죽고싶지 않다고 발악을 하며 몸부림쳐도
결국 그 밑에는 얼음이 남긴 피만 남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얼음이 끝까지 녹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가능한 것도 없으면서 희망을 제시했고 결국 녹은 얼음이 술 맛을 망쳐놓았다.
내 위스키는 거기서 가치를 잃었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 내 총이 처음으로 인간을 쏘았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으니까. 그녀는 인간이 아니라고. 괴물이다.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거기에 있다고.

소녀는 내 총에 죽었다. 내 총은 괴물을 잡는 총이고 짐승을 죽이는 총이다.
그러니 소녀는 괴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오히려 선명하다.
아직도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소녀가 내게 했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고마워요."


그게 여전히 머리에 박혔다.
소녀는 인간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괴물을 죽인 것이어야 했다.
 빈자리는 착각이어야 했고, 나는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메워야 했다.
대체제로 만난 사람은 내 공허함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내 공허를 먹고 점차 커져갔다.
내 빈자리를 후벼파며 자라났고, 기어이 상처로 만들었다.

나는 그 공허함을 없애고 싶었다. 더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고
내 과거를 받아들여주길 원했다.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매일 밤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내 아래 깔아뭉개면서 나는 이루지 못할 공허를 마른 잎으로 덮었다.
나는 좋은 남편이었고 좋은 친구로 기억되었으며 위대한 사냥꾼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것들  무엇 하나 나를 표현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나를 긍정했고, 나는 그 기대가 영원하길 바랬다.
그래야 나는 살인자가 아닐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많은 마녀를 찾았다. 점점 손가락은 무뎌져갔다.
떨리던 손가락과 울림이 잦아들면 새로운 총알을 억지로 우겨넣었다.


내가 죽인건 괴물이었나?
아니라면... 이제 괴물만이 남았나...
나도 잘 모르겠다. 매일 그런 날이 이어졌다.
아내는 이제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남편은 훨씬 전부터 아내의 몸밖에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 사이에 흥분이나 애정은 없었고 더 큰 쾌락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쾌락을 추구했다. 내 죄책감을 잊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이상한 마녀를 발견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키에 얼굴은 곱상했으며 상처 하나 없는 고운 피부에
나를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얼굴.
내게는 신비로웠던 그 여자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내가 그녀에게 여느때처럼 총을 발포하고 나서도 그녀는  없이 자신의 일을 했다.
있을 수 없다. 죽지 않는 여자라니. 내가 이제껏 찾던 마녀에 제일 근접한 자였다.
나는 그녀에게 반했다. 말 그대로 내 오랜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저 마녀를 잡는다면 나는 마녀를 잡은 사냥꾼이 된다.
내가  일은 옳은 것이 될 터였고 마녀를 죽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게 될 터였다.
그런 그녀는 절대 죽지 않는 존재였다.


흥분했다. 내 삶의 최고로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날마다 그녀를 사냥하려고 했고 기어이 그녀의 집에 불을 놓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나를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마녀에 그녀가 근접해가고 있었다.
나를 보고 마녀는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결국  총에 맞아 죽어야 했다.
그러면 나는 마녀사냥꾼이 될테니까. 그게 당시의 나에게 익숙했다.
그건 분명히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의 쾌락을 위한 폭력적인 자위행위였다.


나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목표가 나를 찾아왔으니까.
괴물이었던 여자가 나를 보고 인사하고
나와 함께 지내고, 내게 일을 시키고, 내 몸을 구입했고, 함께 이야기하는 모든게
내게 불완전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일그러진 쾌락은 이제 흩어졌고 메말랐다.
속죄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한 일을 깨달았지만 후회할 수도 없다.
이제 오직 나의 존재는 저 영원한 소녀에 의해 정의된다.
나는 에리아를 그저 따라다녔고, 지금 그녀가  앞에 있다.
이젠 알고 있다. 저 얼굴은... 내가 그리워하던  소녀의 얼굴이다.
내가 지켜줘야 했을, 그리고 내가 배신했던, 그리고 마지막에 끝내 무너진.

"나중에 내가 정말 질리면 풀어줄게. 근데..."

끝내 말을 흐렸다.
내게 어떤 대답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결정에 나를 맞추라고 하고 있었다.
상관 없다. 다만 마녀라는 이름은 모두 그 끝없는 외로움을 담고 있다는걸
나는 안다. 모를 수가 없다.

"나는 말이다..."

그런 말이 괜히 목 아래까지 차고 올라왔다.
나는 꾸역꾸역 그걸 삼켰다.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 이제는 정말 확신할  없는 두려움이었고,
떠나지 않겠다는 말은 내 속죄일 뿐이지 마녀를 위한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내 속죄에 그녀를 이용할  없다. 그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도망치고 있다. 내 친구와 오랜 기억의 소녀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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