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태양을 피하는 방법 (38/303)



〈 38화 〉태양을 피하는 방법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생각같아서는 드러누워버리고도 싶었지만 그럴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바닥에 널린 과일들이 내가 누울  있는 공간을 남겨주지 않았다.

"잠깐만...쉴게..."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달빛이 좋았다.
옛 생각이 나는 것 같아 말 없이 앉아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어도 피로가 도통 풀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겨우 아른거리는 시야를 붙들어잡고 있을 뿐인 시간.
바람이  머리칼을 살랑이며 흩어가는 감각이 기분좋다고 느끼는 도중이었다.

[슬슬 저쪽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뭐?"

[마을쪽에서 빛이 보인다.]

"그게 보인다고?"

[아마 여기까지 도달하는건  오래 걸릴거다. 중심부기도 하고,
무엇보다 환각효과를 버티기는 힘들테니까. 내가 줄을  뽑아 놨으니
의지할 생명줄도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네."

[경비병을 처리하지 않은 탓이다. 뒷정리는 언제나 확실하게. 모르는가?]


"그런건 내 취향이 아냐. 그렇다고 경비원을 죽여버릴수도 없잖아.
오히려 저 사람들이 우리를 더 빨리 쫒기 시작했을지 모른다고."


[우선은 쉬고 있어라. 더 가까워지면 안내할테니.]

"아냐, 이제.. 일어나야지."


[무리하지 마라.]

"어쩐 일로 걱정이야?"

[지금의 내게 네가 필요하니까. 그것뿐이다.
내 흥미를 움직일 수 있는  안되는 존재잖나.]

"그럼 나도 너한테 흥미를 좀 느낄  있도록 말투를 바꿔보지 그래?"

[이렇게 몇십년을 살았는데 고작 며칠만에 그리 간단히 바뀔거라 생각하지 마라.
그래도... 노력은 해 보겠다.]

괜히 그렇게 말하는 체헤게를 보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슬슬 자리를 잡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일어나면 체헤게가 내 등을 받쳐준다.


[이쪽이다, 아니면, 업힐텐가?]


"됐네요. 너한테 업혔다가 허벅지 노릇하게 구워질 일 있니?"

체헤게는 그 말에 잠깐 머쓱한 듯 멈췄다.
그의 엔진은 피스톤엔진이었다.
당연히 고열로 달구어진 상태다. 불은 붙지 않겠지만 뜨거운건 사실이다.
영원히 타는 연료를 넣어두기도 했으니 조절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불이 꺼지는 건 아니다.

강철골로 이루어진 몸체에 섣불리 올라탔다가 살덩이가 구워져버리면 애먼 냄새를 저들에게 흩뿌리는 꼴이다.
환각을 이겨내는 수단을 굳이 늘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거 아나? 난 엔진 근처를 빼면 생각보다 차가운 축에 속하는 바디로 제작되었다.]


"그게 왜...어어..?"

[어느정도 열을 받아도 손과 팔 까지는 따뜻하다는 소리지.]


체헤게는 나를 멋대로 안아들고 달렸다.
이런 자세로 안길줄은 몰랐는데 내가 치마를 입는 성격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미쳤어? 성희롱에 드디어 뇌가 절여진거야?"

[가만히 있어라. 이미 근처까지 따라붙었다.
머뭇거리다가는 따라잡힐거다.]


그렇게 말하고  큰 몸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쿵쿵대는 소리가 들릴법도 했는데 바닥이 아직 촉촉하기도 했고,
영글어 터진 과실을 일부러 밟고 다니면서 물컹거리는 소리로 방음처리를 하고 있다.
생각보다는 머리가 좋은 모양이다. 그것도 마르커스씨가 마감처리를 깔끔하게 해주는 바람에
저런걸 밟아도 미끄러지지 않을 디자인, 육중한무게와 달릴수 있는 출력을 지닌 엔진까지.
내가 도망치는데 최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사실 편하기도 했고. 지금 나는 달릴 수 없어서 안겨가는게 최선이긴 했다.
다만 안긴 자세가 조금 불편했을 뿐이다.


나는 오랜 시간 살면서 어지간한 경험은 다 해봤다고 생각했었는데,
2M에 가까운 거대한 강철 로봇의 품에 안겨서 엉덩이를 밑으로 빼고
등허리와 다리, 허벅지를 받쳐주는 독특한 자세로 달릴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세가 좀 창피한데."

[다른 자세는 안된다. 시야를 가리거든.]

그렇게 말하고 달리는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앞으로 절벽같은 공간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지나갈  없었고, 더불어 그 밑으로는
큰 강이 앞에 흐르고 있었다. 계곡? 개울?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교량하나 없는  절벽을 지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금방 따라잡힐 거라는 것.

[방수처리는 되었다고 들었다. 뛰어넘지.]


"침착해. 네 무게로 뛰어서 여길 넘을  있어?
빠질 생각을 먼저 하지 말고 일단 넘어갈 수 있는지를 먼저 봐."

[머리에서 피가 빠지더니 상당히 차분해졌군.
그거 아나? 지금 너는 상당히 가벼운 상태다.]


"누가 내 몸무게 물어봤어?! 나 원래 가볍거든!"

[더 정확히 알려줄까? 지금 몸무게는 37킬로다.]

숨이 턱 막혔다.
당황했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미...미쳤어? 그걸 네가 왜 알고 있는데!!"


[감각센서가 생각보다 정확하더군. 그랬으니까 커피 서빙도 하고 그러지 않았겠나.
안그랬다면 지금쯤 가게에서 깨먹은 잔이 수입을 웃돌았을거다.]

"어으으...."

[그래, 계속 그렇게 있어라. 차라리 조용하니까  봐줄만도 하군.]


"시끄러어...그리고 은근슬쩍 허벅지 만지지 마!"

[너같은 꼬마의 허벅지에 흥미가 동할리도 없다.
이제와서 세울 것도 없잖나.]


체헤게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뒷걸음질을 치더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붕 뜨듯 뛰어 반대쪽 절벽으로 착지했다.
아무리 땅이 습기가 충분했다고 해도 큼직한 쿵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발목까지 쿵 찍히면서 족적이 남아 땅이 파였다.

"소리가 컸어. 금방 몰릴거야."


[안다. 빨리 가지.]

그렇게 짧은 대화 후에 우리는 또 며칠을 달려야 할지도 모른 채로 숲을 지났다.


[피곤하면  자라. 무리했으니까.]

"센스는 있는데, 너무 추워. 그리고, 딱딱한 곳에서 잠자리를 가진 적도 없어.
무엇보다 엉덩이에 바람이 자꾸 스친다고. 게다가 덜컹거려서 멀미나."

[한번에 하나씩만 불평하지 그러나? 그래서야 꼭 집어던지고 싶으니까.]

"미안해...부탁  하자."

나는 손끝으로 습관처럼 마력을 모으다가 실패했다.
역시 금방 마력이 흩어져버렸다.
게다가 몸에 힘이 없어서 제대로  것 같지도 않았다.
덕분에 피로도만  늘어난 것 같다.


[마법도 별 것 아니구만. 기술이 마법을 추월한  같다.]

"너 기술자도 아니면서 그런데 자부심 가지지마. 재수 없으니까."

[지금의 나는 기술의 집합체다. 화려한 기술의 메카!]


"구닥다리 기술이야."

[구닥다리 마법보다는 구닥다리 기술이 더 나은 것 같은데?]

"하아...."


쿵쿵대며 체헤게는 계속 달렸다.
고작 기계인 그가 이렇게 달리는 이유는 하나다.
내가 저들에게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그의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상황을 너무나  말해주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몸에서 힘을 빼지 않았음에도 점점 몸이 무겁다.
눈이 감긴다. 이건 죽음이 아니다. 그래도, 왠지 거부하고 싶다.
눈이 감기는 것을 참지 못한 적은 몇  없었는데,
138일간 잠을 자지 않았던 날도 고통으로 잠을 이겨냈는데,
이건 왠지 그렇게 쉽게 이길 수 있는 잠이 아닌 것 같았다.


"아, 십자가인가..."


[십자가? 아. 그러고 보니 그거 들고왔나?]

"아...니...."

[....그걸....고....오다.....정말....]


눈이 감긴다.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눈을 다시  하는 독특한 느낌이 든다.
뭔지 모를 불안한 느낌, 그래도 몸에 닿는 시원함.
뭐지... 왠지 신이 나는 것도 같다.

[.....어나.....]

"뭐..?"


[...어나라....]

[일어나라!!!]

 말에 내가 눈을 부스스 떴을 때는 어째선지 아까의 그  나무에 돌아와 있었다.
체헤게가 내게 십자가를 건넸다.

"이건..?"

[연구하겠다고 했잖나. 놈들이 주워가기 전에 다시 챙겨야지.]


"그런다고 여길 다시 왔다고..?"


일단 주워주는 십자가를 다시 챙겨 가방에 넣었다.

[저기 보이나? 저 멀리 밝은 불빛들. 이미 숲 어귀에는 잔뜩 퍼진 모양이다.]


그때였다.

"찾았다."

멀리서 들린 것 같은 소리가 바로 앞에서 이어진다.
귓전에 대고 말한 것 같은 어딘가 소름끼치는 위협적인 목소리.
그 앞에는 독특하게 생긴 쌍검을  성제가 있었다.


"도망갈거라면 오늘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돌아오는게 아닌데..."

그렇게 말하고 성제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검이 이쪽을 향했다.
칼이 어깨를 찍었다.
쓰라린 통증이 어깨에 퍼진다.
아무 말도 할  없었다.
이미 피가 상당히 빠진 몸은 그렇게 큰 출혈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도망쳤다는건 마녀라는 뜻이잖아?"


"뭐해, 마녀사냥은 그렇게 입을 놀려서 되는게 아냐."


나는 그렇게 말하고 들고있던 십자가로 그의 팔을 찍었다.
마력을 빨아들이는 감각. 그 어딘가 뽑혀나가는 감각을  남자가 느낄 수 있길.


"아악!!"

그가 멈칫했다.
효과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에너지가...팔이 무겁다..."

"마력은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니까. 그건 운용하지 못할 뿐이지, 몸의 운동을 도와.
더욱이 신체능력이 뛰어날수록 마력이 보조하는 부분이 크기 마련이지."


"이...마녀가...!"

그의 칼이 다시 내게 다가온다. 휘두른 칼에 나는 가슴 아래를 크게 베였다.
칼에 베여 검날에 묻은 피가 바닥에 튀었다.


"그리고, 마녀 사냥꾼도 노하우가 있어야 날 잡는거라고.
그치? 멍청한 깡통사냥꾼씨?"


그 말에 팔을 부여잡고 나를 노려보던 성제가 뒤로 한걸음 물러선다.
체헤게의 큰 팔이 그 앞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호오...이게 믿는 구석이었다 이거지...? 하아...하아..."


"숨이 가빠보이는데?"

그 말대로였다. 성제의 얼굴은 이미 상당히 창백했다.
십자가에 찔렸다고 저렇게 될 정도는 아닐텐데.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나는 뒤로 물러나 체헤게를 불렀다.

[체헤게, 너 저거 이길 수 있어?]

[아마 불가능하다. 피지컬이 차이나기도 하고, 녀석은 1급 모험가니까.
단순 근력은 몰라도 여러가지면을 종합하면 질수밖에.]

[그래, 그럼 하나만 부탁하자. 못이겨도 되니까 여기에 딱 10분만 묶어놓자.
가능하겠어?]

[해보지.]

다시 성제는 자세를 고쳐잡고 내게 달려왔다.
쌍검은 날카롭게 내 몸을 베었다.
복부를 크게 가르며 찢어지는 검에 다시 크게 피가 휘날렸다.
겨우 배를 부여잡고 버텼지만 까딱하면 내장이 쏟아질 것 같았다.
통증도 통증이었는데,  분위기가 두려웠다. 고통스럽고 소름끼치는 감각.
방금 그 칼에 찢어진건지 가방의 끝이 잘려나가는 바람에 내용물이 쏟아져나온다.
모두 부어버린건 아니지만 후두둑 쏟아진 로프와 대못을 바라보았다.

"후우...이래서 마녀같은거 하고싶지 않았는데."

"마녀는 하란다고 하는게 아니다! 너는 마녀일 운명인거야!"

나는 침착하게 거대한 나무를 등지고 섰다.
침을 꿀꺽 넘겻다. 전혀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아직 나를 발견한게 이 모험가 뿐이라는게 그나마 다행이다.


"여기가 최적의 묘 아니냐?
이 숲에서 죽으면 콜린 놈들 짓으로 기억될테니까 말이다!"

성제는 내 양 팔에 검을 찍어넣고 나무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힘이 상당히 풀린듯 땀으로 흥건해진 머리를 넘긴다.
그러다가  쿨럭이며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그 동시에 뒤에서 거대한 철인이 그를 붙잡았다.

[상당히 몸이 둔해졌군.]

"아무래도 이 큰 나무말인데, 독성이 식물에만 드는건 아닌 모양이야.
호흡기로 침투하는 것 같던데. 너 기계도 아니고 불사도 아니었지?
모험가라고 해도 언젠가는 죽어. 치료 없이 여기서 그러고 있으면 더욱."

"닥쳐!!"

그가 손으로 팔을 찍었던 검을 움직었다.
이미 많이도 썰려 너덜거리는 배를 다시 베어댔다.
오른팔도 방금 공격으로 깔끔하게 잘렸다.


"그래도, 잡았다."


[확실하지.]

나는 붙잡힌 성제를 떼어낸 체헤게를 보고 왼팔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리고 체헤게가 그를 나무에 밀어붙였고  소리가 나며 그가 나무에 거칠게 부딫혔다.

나는 그의 손끝에 쇠로 된 대못을 박아넣었다.천천히 손끝에 대못을 대고 천천히 밀어붙였다.
힘이 부족해 결국 몸으로 눌러야 했다.


피냄새인지 쇠냄새인지 모를 냄새가 난다.

"그렇게 해서 될  같으냐...! 쿨럭...!"


이미 내 배를 막기에는 글렀다.
피는 아까보다  많이 쏟아진다.
일부러 못을 꾸욱 박아넣자
체헤게가 몸으로 성제를 누른채로 큰 손을 뻗어 단번에  찍어 못을 박아넣었다.
나는 그렇게 성제의  팔과  다리를 모두 나무에 박아넣었다.


그리고 나서 천천히 심장에 대못을 대고 눌렀다.


[죽일건가?]

"죽일거냐...날..?"

[이대로도 충분하다.]


"죽여라!  손에 피를 묻힐 각오가 있다면!"


"하...내 취향은 아닌데, 살려둬야겠네. 어차피 놔둬도 죽을거고,
너만큼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너를 구하지도 못할걸.
분명 나무에서 나오는 독기를 빨아들이고 금방 쓰러질테니까."


[잘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그래도."


콰직. 대못을 그의 목에 박아넣었다. 목뼈를 부수듯이 꽂아넣은 대못에
성제는 그대로 말을 멈췄다.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가자. 미안한데,   안아줄 수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잘린 팔을 들고 쓰러졌다.
체헤게가 나를 안아드는 느낌이 들고 나서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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