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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그래서, 모험가는 어떻게 하는 거라고? (40/303)



〈 40화 〉그래서, 모험가는 어떻게 하는 거라고?

초원을 따라 걸어가는 와중이었다.
앞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 것은.
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과 부딫혀 뒤로 나자빠진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잿빛 바지에 녹색 풀물이 배었고, 짓이겨진 풀과 흙이 내 아래에 깔린다.

"아이씨, 뭐야?"

그렇게 내가 일어나면 한 소녀가 엎어져 있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깡마른 소녀의 얼굴은 이미 많이 굶은 
뼈가 앙상하게 보였다.
살짝 기절한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던 아이는 흠칫 놀라 깨어나며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봐도 노예군.]

[그러게. 이런데까지 도망친걸 보니 상당히 노력한 모양이네.]

몸 군데군데 찢긴 상처가 있었던 소녀의 종아리는 걷는게 용할 정도로 헤져있었고
등은 채찍으로 맞은듯 붉게 피멍이 터져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아..아... 앤이에요..."

"앤...그래, 너 어디서 도망친거야?"

"죄송해요..! 죄송해요!! 죽이지 마세요!!"


"죽이려는거 아니니까 어디서부터 도망친건지나 말해봐."


"그... 노예상점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보아하니 여기저기 얻어맞은 걸로 봐서 상품성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그럼 광산 노예라거나 개인 노비로 쓰겠지.
성노예같은 종류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래, 알겠어. 그런데, 이쪽은 막다른 길이니까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걸 추천할게."


"아...아.... 유레크로스로  수 있다고 들었는데...."


"네 몸으로는 무리야. 안타깝지만. 그래, 고생해."


내가 그 옆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면  소녀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그마저도 힘이 미미하여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와주세요... 저.... 죽고싶지 않아요..."

내가 다시 앤을 돌아보면 앤은 작은 눈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보고
빌다시피 애원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거야.  뭘 줄 수 있어?"


[에리아! 소녀를 상대로 무슨 소릴 하는거냐!]

"뭐든지요... 뭐든지 할게요..."

"뭐든지? 책임질 수 있어?"

내 말에 앤이 짧게 경직한다. 그리고는 침을 꿀꺽 삼킨다.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뭐든 할게요. 언니를 믿어볼래요."


"나? 나를 믿지 않는게 좋을걸. 이래뵈도 사람을 죽였거든."

"괜찮아요... 제국에는... 훨씬 더 많으니까...
언니는 분명 무슨 사연이 있던거죠? 저를 도와주실 수 있잖아요!
그런 커다란 로봇... 메카닉 맞죠?"


"아냐. 나는... 그냥 카페 사장일 뿐이야."


"카페...사장...?"


"그래, 이거라도 마시면서 진정하렴."

내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건네면
앤은 그 안에 있는 커피를 잠시 킁킁대더니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으니까 도와주는거야.
너, 낙인은 어디있어?"


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깨를 걷어올린다.
아이의 작은 어깨에는 인두로 지진 것 같은 자국이 남아있다.
시간이 꽤 지나 태운 모양 그대로 색이 정착해버린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앤은 나의 시선을 어색하게 받았다.

"나는 말이야, 신을 져버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이야.
호기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교단의 가르침을 읊어주는 사람이고
작은 절망에 그 몸을 담구는 사람이야. 영원히 슬픔을 남기는 사람이란다."

"네?"

앤이 어색하게 내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력을 담아 그 어깨를 쓰다듬었다.
붉은 빛을 내면서 인두로 새겨진 낙인이 지워지고 살이 돋아난다.
아직 나도 완전히 쉬지 못했으므로 상당히 피곤했지만
여자아이 하나 정도도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앤이라고 이름을 댄 소녀의 머리가 검게 물들어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색이던 머리가 검게 변하고 나서
바르르 떨어대기 시작했다.

[뭘 한거냐?]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이에게 한 일은 하나였다.
 피를 한 방울 넣어준  빼고 변한 것은 없었으니까.

"살아남으렴.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 없지만,
도망치지 않는 인생이 지옥일 너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호흡이 가빠진 앤을 바닥에 곱게 눕혀주었다.

"가자."

[가자고? 저 상태로 놔두겠다는건가?]


"뭘 더 해줘?"

[저대로 놔둬도 되는거냐?]

"죽을 수도 있지. 그래도, 뭐든지 한다고 했으니까 버텨내겠지.
그정도 각오라면 죽더라도 내 원망은 하지 않을걸."

[살려달라고 했다.]


"살 확률. 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늘어났잖아.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어."

[괴로워하고 있다!]

"원래부터 괴로워하고 있었어."

[정말  아이를 챙길 생각은 없나?]

"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니까. 그럴 의리도 없고.
만약 저 아이가 정말 내 피의 저주를 이겨낸다면 저런 정도로는 죽지 않아."


[그래도...!]

펑..!

등 뒤에서 들리는 무언가 터지는 소리.
폭발과 함께 튀는 육편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졌네. 안타깝게도."

[에리아...]

"내가 여기서 저 아이를 살려줬어도 얼마 못갔을거야.
적어도 그런 광경을 보기 전에 빨리 가자고 했잖아.
아무래도 사람이 폭사하는 장면같은건 봐서 좋을게 아니니까."


그리고 자세를 정리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너도 빨리 와. 꾸물거리지 말고."


[뭐?]

펑 하고 터져버린 앤의 잔해물 속에서 무언가  튀어올랐다.


[ㅁ...뭣...?!]


그건 작은 고양이였다.
아주 검은 털을 지닌 새끼고양이.
노란 눈을 한 검은 고양이는  어깨에 앉아서 짧게 울었다.


"야옹."


[뭐냐 이게.]

"말했잖아. 피의 저주야. 사역마의 저주."

[사역마?]

"마녀는 검은 고양이. 몰라?
주접 다 떨었으면 가자."


체헤게는 꿀먹은 벙어리가  것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제국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불어오는 바람이 너른 들판을 쓸고 지나간다.
저 멀리 보이는 메마른 땅과 어딘가 음침하게 선 높은 철탑들.
그리고 불길한 성벽.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개란다. 이제 널 함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거야.
피의 마녀의 이름을 걸고 너를 죽인 사람에게 6배의 저주를 내릴거니까.
부디 이번 생에서는 편안하길 바라."


앤은 대답 대신 뺨을 내게 부벼댔다.
털의 감촉이 매끄럽게 볼에 닿았다.
어딘가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성벽 앞에 도달해 우리는 그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드르륵 울리며 돌아가는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성문때문인가, 제국은 이탈자가 없다는 의미는."


순순히 퀘트로네스로 진입하고 나면 퀴퀴한 담배냄새, 길바닥에 흩어진 가래침.
그리고 어딘가 뿌연 연기가 풀풀 날렸다.
퇴폐적인 사창가가 만연했고 술집이 오전임에도 성행했으며,
거리에서도 폭력과 유흥이 가득했다.
이곳에 찾아온 낯선이를 그냥 보내줄 만큼 친절한 공간은 더욱 아니었다.

다행히도 체헤게의 거구는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을 막아내기에 적합했다.
결국 나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닿은 이들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나를 성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거라 말했던 체헤게의 발언을 전면으로 부정당했다.
이 도시의 인간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욕망에 충실했다.


"어이, 거기 너. 이 도시는 처음인가보지? 안내해줄까?"

"됐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이리 오라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앞을 체헤게가 가로막았다.
남자는 체헤게를 무시하고 내게 진입하려다 그에게 붙들렸다.


"씨발 뭐야  깡통! 메카닉인가...! 이...씨발....좆만한년이!!
안내해 주겠다고!! 야!"

덕분에 길거리에 오래 머물러 좋을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시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과 그 주변을 두르고 있는 사창가와 유흥가.
콜로세움과 노예시장, 각자 연합해서 시민들을 털어먹는 강도단들도 있다.
빠르게 길드마크가 붙은 건물로 들어간건 필연적 수순이었다.


길드 내에서는 조금 조용할 거라고 생각한  내 착각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접수처에 앉아있던 남성이 일어나서 말했다.

"길드 내부에 그런걸 데리고 들어올 셈인가?
 로봇은 밖에 놔두고 와. 털날리니까 그 야옹이도."


정상적인 반응임에 분명하지만 어째선지 불안한 표정에 나는 마지못해 수락했다.
지금은 길드에서 모험가로 등록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체헤게를 놔두고 길드로 다시 발길을 옮긴다.

"그래, 메카닉. 무슨 일로 온거지?"

"모험가 등록을 하고 싶은데요."

"모험가 등록? 하, 시발 요즘은 진짜 개나 소나 등록이 만만한 줄 아나..
아니, 안되는건 아니지. 나랑 위층에서 찐하게 한번만 뒹굴면 말이야.
하하하하!!!"

"농담이 아닙니다."


내가 그의 농담을 받아주지 않자 그는 자리에 다시 앉아서
펜을 입으로 물고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그래, 그건  맘이지. 네가 노예가 아니라면 말이야.
 국가는 너같은 애새끼들한테는 살기 좆같은 곳이거든."

"저는 노예의 신분이 아닙니다."


"그거야 네가 정하는게 아냐.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서는 대가리는 안굴러가나봐?
난 좋아한다고 그런거. 푸흐흐...."


나는 가방에서 금화를 꺼내 남들이 보지 못하게 내밀었다.

"처리나 해주세요."

그가 내가 내민 금화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주변을 슬쩍 둘러본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슬쩍 챙긴다.

"안되지, 안되고 말고. 이 국가에서는 힘이 전부야.
이방인은 모두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게 법이지.
콜로세움에서 우승하거나 하면 또 모르지만,
그렇잖아? 누가 노예한테 모험가를 맡기겠어?"


"그럼 제 금화를 돌려주시죠."

"금화? 무슨 금화? 맡겨뒀냐?"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공간에서는 길드 하나도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멈춰, 뭐하는거냐 여자한테."

누군가  앞을 막아서고 접수원에게 말했다.
 보더라도 등이 상당히 넓은 남자였다.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이었는데,
두건으로 머리를 둘둘 감고 있었다.


"아~ 이게 누구야. 맨데일이냐."

"알면 순순히 이 여자가 원하는걸 해줘."


"크... 씨발놈... 왜 이런 퀘트로네스까지 쳐 기어들어와서 지랄이야...
 동네는 너같은 새끼는 환영 안해."


"잘됐군, 환영 필요 없다."

"칫... 좆같은 새끼...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그 여자가 콜로세움을 우승한다면 모르지만.
시민권이 없는걸 누구한테 걸려서 노예로 팔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 마을에 그런 새끼는 없는거 알잖아?"


맨데일이라는 남자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으면 콜로세움 정도는 스스로 처리하고 와라."


"고맙습니다."

"돈은 있고?"


"네. 있어요."

"없으면 말해. 좋은 숙소를 아니까."


누구이길래 내게 이렇게 친절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섣부른 방심은 금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을 삼키고 길드 밖으로 나왔다.
체헤게와 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이야기는 잘 했나?]

[완전히 실패했어. 콜로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라던데.]


[하아... 혼자서 가능하겠나?]


[글쎄. 이 나라가 아니면 내 출신에 등록가능한 모험가길드가 있을까.]

[아마... 없겠지.]

[그럼 방법이 없네.]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 앤이 쪼르르 달려와  바지를 부여잡고 기어올라
내 옷위로, 어깨에 안착한다.
그리고 얼굴을 할짝할짝 핥아댄다.

"됐어, 너도 이제 가야지.  너를 챙길 여유가 없어."

앤은 말 없이 얼굴을 내게 비벼댔다.
가르릉대는 소리를 내면서 고양이답지 않게 꼬리를 살랑대며 비빈다.

"뭐든 하겠다며. 혼자서 해내야 해. 나랑 같이 있어서 좋을게 없어."


앤은 그대로 뛰어 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애옹 애옹 울어대며 내 머리를 발바닥으로 꾹꾹 눌러댄다.
내가 그렇게 하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걸까.

"검은 고양이는 저주의 상징이야. 그만해."

그 말을 듣자 휙 뛰어 바닥에 착지하고는 체헤게에게 쪼르르 달린다.
체헤게가 앤을 들어 어깨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차분하게 앉아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앤을 보고 체헤게에게 물었다.

[어쩌자고. 데려가자고?]


[네가 만든 결과 아니었나. 혹시 책임지기싫다는 건가?]


[엄청 싫어.  이제 콜로세움에도 도전해야 한다고.]


[외롭지 않겠나?]


[너 하나도 벅차다. 밥도 안주고 털도 안갈고 말도 알아듣지.
키우기는 최적의 조건인데도 벅차다. 하나 더는 안돼.]

[일단 자리를 옮기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숙소를 잡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숙소는 거체의 로봇과 신원미상의 여성에게 방을 내주지 않았다.
결국 모든 숙소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노숙은 더욱 어렵다. 노숙인들이 이미 많은데다가 치안도 좋지 않았다.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소매치기 피해가 발견되고 있었고,
나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불쾌한 인간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아...."


[아까 그 맨데일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해봐야했나.]


"어디로 갔는지 모르잖아."


"야옹"


앤이 앞장서서 어디론가 걸어간다.
마치 따라오라는  같은 자세에 앤을 따라가면  술집으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하고 터덜대며 걸어가는 맨데일이 보였다.

"저기요."

 부름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실제로 마주하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숙소가 없어?"

"네.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까는 괜찮다며?"

"돈은 있어요. 여관이 없어서 그렇죠.
부탁드립니다. 대신 방하나만 잡아주시겠어요?
요금은 지불하겠습니다."

"흐음...."

그가 옅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러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딸려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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