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콜로세움
헌터에 대한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나는 거리를 걸었다.
아직 콜로세움 경기 시작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콜로세움은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그, 3일간 치뤄지는데요,
헌터님이라면 아시겠지만... 패배는 죽음이거든요... 상대를 죽여야 올라갈 수 있습죠.
높으신 분들이 보고싶어하는건 그런거니까요...
그 황제님도 오신다고 하시니까... 아마 어려우실겁니다.
지금이라도 취소하시는게 어떠십니까..?'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차피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바뀔건 없다.
모험가 등록을 하려면 어쩔 수 없으니까.
다만 불안한 것이 있다면 내가 여자라는 것이었다.
여자가 콜로세움을 승리한 전적은 잘 없다.
콜로세움에 도전하는 여자가 원체 적기도 하고.
근력의 싸움으로 승부를 보는 장소에서 싸움을 업으로 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생존하기 어려움을 생각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끔 부족에서 전사로 키워진 무투파 여장부를 잡아와 강제로 참여시키기도 한다는데,
그런걸 보고 도전할 만한 만만한 바닥이 아니니까 절대적으로 여성은 부족하다.
콜로세움의 뒤틀린 성비의 원인은 그것이다.
대다수의 여성들은 도전을 포기하고 사창가로 흘러가거나
개인노비로 들어가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객사하거나 걸인이 된다.
결국 이 기형적인 사회에서 태생적으로 지위를 보장받는 여성이 아니라면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일부 노예계층의 여성은 결이 다른 대우를 보장받는데,
이는 결국 욕망에 기인한 결과물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이었다.
사창가에서 지명이 많은 여성은 따로 가게의 간판으로서 관리된다.
그러면 점차 몸값이 오른 만큼 업소에 매출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업소에서 비싸고 좋은 음식을 받게 된다.
결국 살이 잡히고, 외모가 물이 오른다. 점차 숨어있던 미모가 피어오르게 되고
그에 따라 투자가 늘어 옷가지, 장신구 하나하나가 그녀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면
결국 다시 그녀의 지명도가 높아지게 된다.
결국 그녀는 다른 사창가의 여성보다 높은 지위가 된다.
계급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인간의 욕망이 그 사이에서도 층을 만드는 것이다.
아마 어제 여관의 그 여자도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의 위치가 나보다는 높다고 판단했겠지.
이 시스템에 관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럴 가치도 없고, 나 혼자 바꿀 수 있는 간단한 일도 아니니까.
그러나 내가 그 밑바닥에서 노예라는 신분을 가지게 된다면
적어도 발버둥쳐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콜로세움은 국가에서 장려하는 컨텐츠로 자리잡았다.
제국의 명물이라고 평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귀족들과 왕이 모두 관객으로 참여하는 유흥이다.
내가 거기서 우승하고 나면 모두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생각에 빙그레 웃음이 나온다.
시스템에 거스르지 않고 내 위치를 사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안다.
스스로 알고 행동하는 것은 모르고 저지른 것과 큰 차이가 있다.
같은 행동이라고 해도 나중에 어떤 쪽으로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틀은 최대한 눈에 나지 않도록 지낼 생각이었지만 이미 그건 실패한 것 같다.
콜로세움 자체가 이미 나를 이방인, 혹은 이레귤러로 규정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해야하는 일이기에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수가 없었다.
다만 새로운 상황이 나오지 않길 바란 것이었다.
이렇게 돌아가서 숙소에서 푹 쉬고 나서 만전의 컨디션으로 경기에 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게 고작이었다.
돌아가던 길에 내 앞에 나타난 것이 맨데일이었다.
"여어, 에리아. 마침 잘 만났다. 찾고 있었다고."
"네? 저를요?"
"그래~ 우리 아직 할 말이 남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의 시선을 살펴보는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내가 무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체헤게도 내 뒤를 곧장 따랐다.
내 머리 위에서 쉬고있던 앤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건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고양이 애호가들에게 얻어맞아도 난 절대 안 도와줄거다.
아직 이 나라에 그런 순수한 사람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뒷골목으로 끌려가면 그곳은 술집의 뒤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술집에서 버린 쓰레기들이 쌓이고, 취객이 몇 쓰러져있으며,
걸인들이 손을 내밀며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거적데기를 둘러싼 여자가 구정물을 흘리며 내민 손을 짓밟는 맨데일이
발길질로 그녀를 쫒아낸다.
"그렇게 까지 할 건 없었잖아요."
"돈을 주면 떠나갈 것 같아? 호구잡히고싶어? 언니 그렇게 착해빠져선 이 나라에서 못 살아남아.
아, 알지? 어깨에 낙인. 그렇게 병신같이 착하게 살다가 당했잖아?
자세히 설명해줘봐야 모를거고. 그냥 벽 짚고 서서 다리나 벌려."
그의 건방진 말투를 보면 꼭 골려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옆으로 벽을 짚고 비스듬히 서서 다리를 어깨넓이로 벌리고
벽에 기댄 자세로 섰다.
"언니, 여행왔어? 여행온 자세가 아니잖아. 말귀 못알아들어?"
"뭐 어쩌라고요."
"양 손 다 벽으로 짚고 서라고. 섹스 몰라 섹스?"
"아, 성욕에 져서 날 어떻게 한번 해보시겠다?
그러다 죽어요?"
"그게 무슨 협박이야. 말도 안되는 소릴. 짜증나게 하지 말고 벽에 손 대고
이쪽으로 엉덩이 대라고."
"참 재미없네요. 이런 낙인이 없으면 들이대볼 생각도 못하다가
약자한테 명령하면서 흥분하는 병신같은 인간이었다니."
"후... 내가 너무 잘해줬나? 그런거야? 손은 왜 벽에 안대는데?"
"대고 있어요. 양 손 다."
말 그대로였다.
열중쉬어 자세로 양 손을 등 뒤로 하고 벽에 기대 다리를 조금 벌린 채였다.
오히려 내 자세에 허무한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처럼 나를 보고 욕을 한다.
"그래, 씨발... 신선한 반응이네. 이제껏 만난 년들이 이 도시에 살던 노예라는걸
잠깐 까먹었었어. 이게 외지인이지. 그래..."
그렇게 말하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동그란 약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삼켜. 이걸 쳐먹고도 그딴 싸가지 없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보자."
주는대로 받아먹었다.
뭐 그래봐야 미약종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별 두려울게 없었다.
애초에 마력으로 충분히 대처 가능한 수준이었고,
이미 온갖 약물에 절여지듯 살아온 나에게 효과가 없을 걸 알았으니까.
"그래, 4시간 뒤에보자 씨발년아."
그렇게 말하고는 맨데일이 바닥에 가래침을 칵 퉤 뱉고는 떠나갔다.
참 쉬운 남자였다.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서 있는거냐?]
"뭐가?"
[정조의 위협을 그렇게 해쳐내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흥미는 없으니까. 소설에서 나오는 만능 미약같은건 없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인간의 감각기관은 생각보다 되게 금방 적응해.
자극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는거고.
그런데, 이미 어지간한 마약, 담배, 술, 미약. 산전수전 다 겪고 나면,
어지간한걸론 성에 안차거든."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래? 어느 부분인지 잘 모르겠네 그럼."
[그래, 무사하면 됐다.]
나는 내게 쫑쫑 걸어오는 고양이 앤을 다시 안아들고 어깨 위로 올려주었다.
앤은 내 머리 위로 금새 올라갔다.
"카페나 할때가 그래도 조용하고 좋았는데."
[카페? 카운터만 보면 그럴수도 있겠군. 말 못하는 기계를 세워뒀으니.
욕받이 무녀, 접대, 주문 접수. 다 내가 했지? 한번에 네 명밖에 없는 가게에서
음료 내리기는 편하지 않겠나?]
"그래서 떼먹었어? 너 몸 만들어 줬잖아."
[끄응...]
"언젠가 다시 할거야. 모험가 라이센스부터 따고."
[그래, 기대하지. 그나저나, 이제 어쩔건가? 맨데일은 놔둘 생각인가?]
"놔두지 뭐. 제 딴에는 콜로세움 등록을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을걸.
왜 그런 이야기 있지 않았나? 즐기시게 놔두라고."
[참 악취미야.]
대꾸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 고양이는 진짜 어떻게 하지?
내가 계속 데리고 다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깨에 올라선 앤을 돌아보면 나를 마주보며 의아한 표정을 한다.
그러더니 체헤게쪽으로 폴짝 뛰어버린다.
체헤게가 손으로 받쳐주며 앤을 안아든다.
"야, 고양이. 너 언제까지 우리랑 다닐거야?
원하던대로 살려줬잖아? 이제 슬슬 가야지 너도."
앤은 나를 바라보다가 애옹 하고 울었다.
뭐라고 말을 하고싶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마 너도 맨데일한테 잡힌거겠지?"
"애옹"
"그래, 등에 그렇게 채찍자국이 나 있었으니 모르기가 어렵지.
그래도 우리가 언제까지나 널 챙겨줄 수는 없어.
너도 알겠지만 나는 콜로세움을 정복하고 모험가 라이센스를 따면
다시 이 국가를 떠날거거든. 범죄자에게 기회가 되는 국가는 여기 뿐이니까
그래서 잠시 들른게 다야."
"야옹."
"그래, 너는 우리가 좋다 이거지?"
"야옹!"
"굶어도 몰라?"
"냥!"
"좋아하지마. 밥을 못 챙겨줄 수도 있다고."
"냐냥."
"그래... 알겠어. 그럼 일단 같이 다녀. 그래도 언제든 여유가 안되면 쫒아낼거야.
알겠지?"
"냥냥!"
"그래도 앤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이해하지?"
"애옹."
"왜 또 뭐가 마음에 안드는데?"
"애애옹!"
"아 그래, 네 이름 존중하지. 존중하는데, 그래도 고양이 이름이 앤이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본다고.
도망친 노예이름을 붙여놓고 키우는 고양이, 게다가 검은 고양이. 인식이 어떨지 알잖아?"
"끄으응..."
"그래, 그러니까 정해보자는거야."
[잘도 대화를 하는군?]
"사역마니까."
[사역마가 그렇게 만들어지는 줄은 몰랐는데.]
"내가 고양이를 만든게 아냐. 앤의 육체를 제물로 사역마인 고양이를 소환해서
피를 가지고 영혼을 옮겨넣은거지. 음 어려운 개념인가?"
[이해는 했다. 쉽지는 않지만.]
"그럼 됐어. 머리도 나쁘면서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마.
송충이는 솔잎이나 먹으면서 사는거야."
[참 재수없군.]
"그래서 고양이, 이름은 뭐가 좋아?"
[앤에서 바꾸자고 했으니 애니정도면 어떨까 싶은데.]
"바꾸는 의미가 없잖아. 그리고 촌스러워."
"냥! 냐냐앙!"
"뭐? 이게 맘에 들어? 정말? 하아...너희 죽이 정말 잘 맞는구나.
이러다가 내가 따돌려지는거 아닌가 몰라."
둘은 나를 나란히 마주보며 웃는다. 비웃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기분탓이라고 넘기기로 했다. 하는 수 없지 뭐. 본인이 좋다는데.
우리는 대화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방에 도착하자마자 문에 3중으로 결계를 쳤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이다.
괜히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상당히 골치아파진다.
그리고 창문에는 미리 준비했던 기름을 꼼꼼히 칠했다.
미끄러지기 좋으라고 칠한 것도 있고, 실온에서는 고체상태로 굳을 것이기 때문에
공간을 막아주면서 방온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 카페테리아 없지?"
[없었다. 덕분에 늘어지게 자 놓고서 잘도 묻는군.]
"먹을거야 만들면 그만이니까 상관없지."
"애옹. 애애옹."
"아, 얘? 너랑 비슷해. 영혼이 로봇에 갇힌거라고 생각해. 골렘이라는건데,
디자인은 내 친구가 만들어줬어."
[친구...]
"야옹!"
"그래, 좋은 친구지."
시간이 남았으니 그동안 나는 내일의 경기를 대비하기로 했다.
물을 한 컵 떠다두고, 가진 재료를 섞어넣는다.
"도마뱀의 세 번째 잘린 꼬리, 돼지의 간, 송충이의 체액, 사자의 피 300ml,
리소테린 가루, 솔매니안의 술 170ml를 가열한다... 약불로 8시간. 좋아.
놔두기만 하면 되겠네."
마력을 사용하면 육체의 강화는 간단하다.
어떠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공들여 수련하면 우리는 달인이 된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그 분야에 통달하게 되면서 분야에 관련된 기술을 익히고,
마력을 무의식중에 섞는 운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마력의 흐름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금방 구별해낼 수 있는데,
그게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지금 만든 약은 그 마력의 성질을 임시로 변환시켜주는 약이다.
효능은 한시간 정도 지속된다.
내 마력의 대부분은 피와 생명에 관련되어 있다.
다양한 마법이나 주술로 이를 어느정도 다른 성질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렇다.
덕분에 몸의 마력을 모으게 되면 시각적으로 붉게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강해보인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마법을 사용가능하다는 것을 제국이 알아서는 곤란하다.
한두명 정도야 얼버무릴 수 있지만 콜로세움에서는 불가능하다.
마력의 계를 바꾸어 그런 흔적을 지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를 위한 준비물이다.
세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할 게 없으니 잠이나 자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건 나 혼자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애니가 따라 올라와 내 옆에 눕는다.
[생명체가 부럽기는 오랜만이군.]
"시끄럽네요. 망이나 봐. 깡통주제에 어딜."
그렇게 대꾸하고 우리는 침대에 몸을 뉘인다.
대비라고 해도 딱히 없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완벽하다고 할 법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