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화 〉콜로세움 (44/303)



〈 44화 〉콜로세움

눈을 떴을 때는 오전 8시 반을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경기 시작은 10시.  전까지 출전 준비를 마쳐야 했다.
느긋하다면 느긋할 수 있을 시간이었기에 미리 전날부터 끓여둔 포션을 챙기고,
옷을 정돈해 차려 입었다.
활동성이 좋은 소재로 갖춰입었다. 우선 나일론을 소재로 한 팬티스타킹을 끌어올렸다.
라텍스로 만든 전신 수트를 꺼내 입었다. 주로 화학 약품이 몸에 튈 때를 대비해 입던 것이다.
몸에 달라붙어 활동성이 좋기도 했고, 안전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쫙 달라붙으므로
나풀나풀한 소매나 기장이 없어 모르는 새 약품에 닿거나 쓸리지 않았다.
위험한 실험에는 늘 함께했던 옷이다.

콜로세움의 규정상 상대를 죽인다는 전제 하에 경기가 치뤄지므로
안전상의 문제를 원인으로 하는 규제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칼, 도끼, 톱, 영기술, 기계, 무술. 무엇이든 허용하는 곳이었다.
다양한 컨텐츠로서 소비되는 엔터테인먼트로 자리잡은 살인이 그들의 유흥이었다.


"유흥으로 살인... 그럴 수도 있지 뭘. 별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바뀌지도 않았네."


[참...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군. 일관성이 있다고 해야하나.]


"긍정적인 의미로 한 말은 아닐거아냐?"


[그렇긴 하다만, 이제와서 신경쓸 일도 아니잖나.]

"그렇다고 내가 대인기피증이라도 생길까봐서?"

[농담을. 그럼 준비는 다 된건가?]


"그렇지 뭐."


옷을 차려입고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어차피 오전이다. 오전부터 몸을 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이제껏 없을 정도로.
하지만 사실상 내 승리는 기정사실이다.
아무리 싸워서 두드려 맞는다고 해도
죽지 않는 사람과 죽는 사람의 대결은 결과를 볼 것도 없다.


"고양이는 자?"


[잘 잔다. 죽으러 가는 사람치고 태평하군.]

"난 죽으러 가는게 아냐. 싸우러 가는거지."

[너는 결국 '살아남는' 거지, 죽지 않는게 아닐거다.]

"살아있다는건 죽지 않은 거잖아."


[비슷한 것 같아도 차이가 크다.]

체헤게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여관은 아직 조용했다.


"저지르러 가볼까."

우리는 곧장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콜로세움에는 이미 수많은 관중들이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그들은 미리 몸을 푸는 노예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표정, 몸, 무기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내가 접수처로 가서 절차를 물으면 어제와는 다른 여성이 앉아서 말했다.

"등록명."

"에리아요."


"아, 에리아. 맨데일의 노예라고 되어있네. 좋아, 들어가서 B조 대기실로.
아니면 다른 애들처럼 나와서 몸 좀 풀어도 되고. 오케이, 국가노예로 수속 끝났어.
오랫동안 접수를 봤지만 너같은 애는 처음이네. 메카닉 여자라니. 게다가... 뭐야 그 옷은?"

"아, 이거 라텍스 소재의..."


"뭐야 그게?"

"아, 아니에요."


아무래도 라텍스 자체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검투사들이 모이는 이곳에서도 누구도 라텍스를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아직 라텍스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대기실로 들어가 배정된 자리에 앉아있으면 옆에 조그마한 몸집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아...안녕?"

"안녕하세요."

"어, 나는 벤이야. 보다시피... 노예지.
나, 이 나라로 여행을 왔다가 노예가 되어버렸지 뭐야..."

"그래서요?"

"그래서요가 아니라... 여기 패배한 노예는 죽는다며?!
무섭잖아. 나 그... 카지노에서 돈을 잃었거든...
처음에는 조금만 빌리겠다고 돈을 빌렸는데, 점점 불어나서..
이젠 1캐럴 하고도 32델이나 불어나 버렸어.
알지..? 우리는 연대하자는 거야! 그...우리가 함께라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우리 둘만 하자는건 아니고! 사람들을 모아보자!"


"지금껏 몇명이나 모으셨죠?"


"그... 아직은 없어... 네가 처음이야..."

"당신의 제안이 합리적이고 가능성이 충분한 계획이었다면
분명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의견에 동조했을겁니다.
 곳에서  계획은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인 겁니다.
결국  명만 남게 되는 구조인 이 콜로세움에서 연합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오래 살게 되잖아! 1분 1초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게 뭐가 나빠!"


"빠른 포기가 더 나을 때가 있지 않겠어요?"

"삶이란걸 포기한다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
삶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 것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인생을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발버둥 치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고 하잖아?"

"그거 아세요? 수렁에 빠진 사람은 발버둥칠수록 얽혀들어가기 마련이라는거."

"너...너는 다를  알았는데... 여자잖아? 약하잖아?"

"그정도의 각오는 하고 이름을 적은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아니었어. 나는 죽기 싫다고! 노예도 싫고! 아픈건 더 싫어!
돈을 빌렸을 뿐인데! 그게 잘못된거야?"

"어쩔수 없어요. 선택한 결과는 이미 당신의 몫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변하는 것도 없죠.
강해지세요. 약한 사람이 살아갈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요.
그리고, 시간이 기다려주지도 않고요. 더 자세히 말씀드릴까요?
결국 여기까지 온 이상 살아남지 못하면 당신은 죽어요.
그 짧은 인생을 여기서 종치는 겁니다. 우는 소리할 때가 아니잖아요?
칼을 드세요. 한번이라도 더 내지르는 연습을 하고, 구르는 연습을 하세요."


"너... 강하구나.  노력할게."

"네. 고생하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고 어설픈 미소를 흘려주었다.
그리고 1차전이 시작되었다.
10시를 알리는 소리가 울리고, A조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간다.
초반부터 1대1 매치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시간이 오래 걸릴테니까.
효율적인 시간 절약을 위해 난타전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불합리한 연합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은 야생에서 잡은 유니카우를 경기장에 풀어놓는다.


"저게 뭐야?!"


"도망쳐!"


"아악!!"

"죽어어!!"

A조의 치열한 경기가 펼쳐졌다.
다른 조에게는 그 경기가 공개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삶을 장식하는 유흥일 뿐이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분에서 40분을 넘어가던 사이, 드디어 유니카우가 쓰러졌다는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사회자의 해설과 관중의 환호는 죽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삶을 향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이 서로를 죽이며 사력을 다하는
 광기어린 모습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철퍼덕 쓰러지는 것은 어느쪽인가요!! 아~! 유니카우 넘어집니다! 뿔이 부러졌거든요!!
이러면 수명이 얼마 안남겠는데요~? 아!! A조 체스커!! 조별 난타전의 최종 승자로 선정됩니다!"


"체스커! 체스커! 체스커! 체스커!"


"일어나라 세베르! 얼마를 걸었다고 생각하는거냐!!
분명히 이길  있다고 했잖아 개새끼야!!"

"체스커!  죽여버려!!"


관중들의 환호하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호명하는 B조의 구령에 따라 경기장으로 나아갔다.
이미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바로 전, 치열하게 싸웠을 A조의 노예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들은 경기장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피떡이 져버린 바닥, 온갖 곳에서 지는 피냄새, 흩뿌려진 피와 굴러다니는 목.
팔다리는 예사요, 내장이 주르륵 흘러나온 자도 있었다.
죽은 이들은 하나같이 처참했다. 피와 육편만이 아니라 죽으면서 배설물을 쏟은 자들도 적지 않았다.
몸에 힘이 풀리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걸 알고 있었지만 역겨웠다.
나는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구석으로 몰았다.
간단했다. 우선 주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었고, 두번째로는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왔으니까.
적어도 내 등 뒤를 조심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튼 당초 계획은 그런 것이었지만 그런  앞에 체헤게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목을 분산시키는 목적은 깔끔하게 실패해버린 것 같았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 생생하게 귓가로 때려박힌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음은 B조 구역입니다!
사전 평가에서 두 번째로 약하다고 평가했던 노예들이죠!!
단언컨대 이번 경기에서 주목해야 할 노예는, 317번, 94번, 그리고 66번이죠!
특히 보십시오 저 66번!! 무려 여성 메카닉!! 아~ 이런 여자라면 고가에 거래될 만도 했는데요!!"

그렇게 말하던 때 내 눈에는 관객석에서 벌컥 일어나 화를 내는 사람이 한눈에 보였다.
에반제인, 어제 차에 타고 고고한 시선을 내리깔던 여자였다.

"저건 내 노예인데!! 맨데일!!! 죽여버리겠어!!"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뿜으며 흥분한 에반제인은
자리에서 마구 난동을 부렸다.


"객석이 아무래도 소란스러운  같군요. 그럼 이 열기 그대로 몰아서!!
B조 경기 시작합니다!!!"


B조의 난타전에는 사자가 나타났다.
주최측에서 준비해둔 굶주린 야수였다.
이들은 갈기를 바람에 흩날리며 나타나 낮게 울었다.

"그르르르..."

저기에 잡아먹히는 자는 그대로 사자 밥이 된다.
신경쓸 거리가 늘어난 것이다.
자연스레 침을 꿀떡 넘긴다.
이미  반대쪽에서는 싸움이 시작된  같았다.
그걸 확인한게 나만은 아니라는건 자명했다.
누군가의 싸움이 발견된 순간부터 사람들의 주의는 빠르게 내쪽으로 몰렸다.
여자. 우선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한 상대. 그리고 이 무엇이든 허용되는 공간에서
여성에게 승리했을 때, 각자 머리속으로 상상한 이미지의 실현.


'여자!!!!"


 처음 그렇게 외치며 달려나온 것은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상당히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남자는 곧장  철봉을 붕붕 휘두르며 달려왔다.
낭패라고   있었다. 사방에서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저 막대에 맞으면 뼈도 못추리겠다는 생각이  때였다.


"다 비켜서라!!!"


옆에서 족히 체헤게의 키를 뛰어넘는 철갑기사가 달려나왔다.
거대한 랜스를 들고 사람들을 마구 밀어대고 있었다.
그런 그를 멈춰세운 것이 세밀한 세공이 들어간 고급스러운 흰 가면을 쓴 자였다.
품에서 레이피어라고 불릴만한 얇실한 검을 꺼내 화려하게 휘두르는 그를 보면
분명히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흥미로운 점이라면 그는 한마디도 내뱉지 않고 조용히 그 자리에서 숨소리조차 흘리지 않았다는 것.
 가면 밑에 과연 어떤 얼굴이 숨어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화려한 옷감으로 전신을 감싸고
자신이 노예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우아한 몸짓을 모였는데, 도리어 그게 괴리감이 있었다.

 조에서 위협적인 인물은 이정도 인 것 같았다.
일대일 상황이라면 모를까 난타전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곧장 주머니에서
미리 만들어둔 포션을 꺼내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역한 맛. 어딘가 달지도 않고 시큼하지도 않으며 왠지 모르게 떫은 맛.
게다가 묘하게 시럽같은 꾸덕한 식감이  내 배를 꼬이게 하는  같다.
마력회로에 간섭하는 약품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이번에 선택한 것은 연기였다.
마력을 끌어모아도 붉은 기운이나 푸른 기운을 뽑아내던 피와 달리
연기는 가까이서 보아야  수 있을 아지랑이를 스멀스멀 뽑아내는게 전부니까.
굳이 생각해보면 이런 일까지 해야했나 싶기도 했다.
마력반응을 숨기려고 적성을 바꾸는 일은 소 잡는 칼로 두부나 자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살짝 빈혈같은 어지럼증이 찾아오긴 했지만 금새 자리를 잡았다.

[체헤게,  쓸어버려.]

[분부대로 하죠 아가씨.]


[그건 또 뭐야?]


[가만 보아하니 그것도 재미있어 보이더군.]

그러더니 체헤게가 왼쪽으로 달려나가며 병사들을 후려쳐냈다.
어차피 노예의 실력으로 체헤게를 공격하려면 칼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체헤게는 말 그대로 그들을 집어들고 경기장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직접 죽이기는 꺼려지는 건지 안쪽으로 집어 던진 이들은 한곳에 차곡차곡 포개진다.
아래에 깔린 사람부터 압력에 못이겨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걸 듣고 도움을 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었다.


"저 여자다! 저 여자가 메카닉이야!!"


시류에 편승하듯 사람들이 몰려온다.
나는 가방에서 새로 냉각제를 꺼낸다.
소형 플라스크에 담긴 것을 들고 그들이  때에 맞춰 던진다.


"얼어버려!"


플라스크가 깨짐과 동시에 안에 든 액체는 물이 튀는 모양 그대로 위협적으로 얼어붙는다.
 파편에 찔려 목숨을 잃은 자는 맨 앞에서 달려오던 노예였다.
아마 그도 우승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으리라.

"메카닉이 빙결 영기술을 쓴다!!"

"아냐! 잘 봐! 저 플라스크다!"


플라스크로 시선을 분산시키는 와중에도 체헤게는 중앙으로 사람을 던져낸다.
중앙에서 그가 던진 노예만을 노려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다.
그러다 검은 머리 봉술사가 체헤게를 발견하고 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 하는 거대한 울림. 그와 동시에 철갑기사가 랜스를 바닥에 내리꽂는다.
그가 내리 꽂은 랜스에는 처음 경기장에 풀었던 사자의 목이 꿰뚫려있다.
사자를 죽인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그는 거칠게 포효했다.

"약해빠진 놈들! 다 덤벼라! 어차피 우승자는 한명이니라!!
나 게타르크의 랜스가 승리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랜스는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사람들은 주춤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온 것으로 보이는 노예를 내가 보지 못했을리 없으니까.
푸욱. 그렇게 찍힌 내 옆구리에는 거대한 주사기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꾸욱 누르는 피스톤에 정체모를 보랏빛 액체가 내 몸 안으로 몰려든다.


"성공했다!! 여자에게 질퍼스를 주사했어!!"


"질퍼스!!!"

약품이  들어간 주사기에 역으로 내 피가 피스톤을 밀어내고 송글송글 모인다.
이건 위험했다.
질퍼스의 투여보다 내 피의 방출이 위험한 것이다.
약품은 내게 효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마냥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엄청난 양을 맞으니 확실히 반응이 온다.


"발정제인가..."

확실히 몸이 달아오르고 땀이 배어나온다. 통풍 자체가 어려운 라텍스 수트 내부로
답답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나는 주사기를 내 손으로 잡고 빼낸다.


"이미 늦었다!! 약은 투여되었으니까!!!"

나는 곧장 발화부를 꺼내 던졌다.
내 옆까지 침투했던 남자의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머리에 불이 붙었고
겉잡을  없을 정도로 빠르게 타올랐다. 천천히 고기 굽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몸이 쑤셔서 서 있기 힘들었다.
어쩔  없이 주저앉게 되었다. 무릎꿇은 내 모습이 자극적이긴 했는지 곧장 나를 덮칠 각오로 달려오는 자들.
내쪽으로 날아오는 것은 검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도끼를 선택한 자가 허공을 가른다.
내가 옆으로 빠르게 굴러 피했지만 머리카락이 조금 잘렸다.
날이 잘 든 것 같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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