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두 남자
맨데일이 반쯤 강제로 던져넣어진 대기실은 으슥하고 축축한 공간이었다.
애초에 노예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간에 많은 비용을 투자할 만큼 제국은 자비롭지 않다.
애초에 여기 모인 이들중 자신을 환영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맨데일 스스로도 알고있다.
하나의 새로운 경쟁자. 게다가 3급 모험가. 마을에서 들리는 평판은 덤이었다.
혼자 떨어진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떨며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노예들의 주제넘은 눈빛을 피했다.
다들 그에게 꼴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힘이 들어가는 손에서는 땀이 배어나온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따가웠다.
맨데일의 얼굴 피부는 다시 자라지 않았다. 아마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얼굴 가죽을 오래 붙이고 있어서 피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건지
이제와서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붙이고 있던 가죽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며 얼굴이 간지러워지고 나서는 얼굴에 박음질된 피부를 뗐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각오를 언제든 상기시킬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고나서는
향우와 몰약을 비싼 값에 구입해 방부처리를 마치고 부적삼아 들고다녔다.
"저 병신 마마보이새끼. 기어이 여기까지 떨어졌구나."
그렇게 말하는 노예들의 비웃음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맨데일은 자신이 이기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노예들이 자신에게 말을 붙여와도 무시로 일관했다.
마침내 사회자가 C조의 입장을 알리고 대기실 문이 열렸다.
맨데일은 그 노예들의 틈에서 경기장으로 섞여들어갔다.
눈 앞으로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부터 관중은 욕을 던져댔다.
"맨데일! 더러운 창녀 자식이 이제껏 잘도 까불고 다녔겠다!"
"그래! 너도 이제 끝이다 맨데일!"
그런 조롱속에서 맨데일은 조용히 바닥에 부적을 버렸다.
"결국 부적은 미신이었군."
그리고 묵직한 채찍을 쥔다.
닥치는대로 앞으로 휘둘러 나아가며 노예들의 목을 비틀었다.
하나라도 더 죽이고 올라서야 했으니까. 노예를 팔아넘기려다 자신이 노예가 되었다는건 굴욕이었다.
분명 개인과 개인으로서의 난타전이었을 경기는 어느새 일대 다수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생판 검 한번 들어본 적 없는 노예들이 맨데일같은 공인된 모험가를 이길리 만무했다.
결국 수많은 노예가 목이 꺾였다. 일부는 관절이 부러지고 일부는 채찍끝의 철추에 맞아 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 과정중에 맨데일은 등에 단검이 꽂혔고 머리에 감았던 두건은 잘려 날렸고
머리카락도 상당수 잘려나갔다. 그의 붉은 근육으로 기괴하게 엉겨붙은 얼굴이
콜로세움의 모두에게 공개되고 나서 그는 상처뿐인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맨데일은 다시 조금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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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아>
오늘 경기는 끝났다고 했기에 콜로세움에서 참가자에게 임시로 제공하는 숙소로 이동했다.
긴 복도에서 조를 찾아 들어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내가 지나가는 복도 앞에 익숙한 미인이 서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에리아라고 했었지."
"아, 에반제인님."
"에반제인님이라,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그러죠. 어떤 일로 오셨나요?"
"어떤 일? 나는 에반제인이야! 일이 있어야 노예를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말이다.
건방지구나 노예주제에. 참 볼수록 맨데일에게 어울리는 아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난 너에게 제안을 하려고 하느니라."
"제안 말씀이신가요?"
"그래, 내게는 솜씨 좋은 검투사가 있느니라. 고용된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지만 말이다.
확실히 이 콜로세움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몇 없겠지.
그가 너를 지켜줄거다. 너는 마지막에 그를 밟고 올라서서 내게로 오면 되느니라.
신분을 끌어내리지는 않으마. 단지 하루 정도 함께 즐기자는 의미다."
[난 찬성이다 에리아.]
[변태같은 소리 하지 마.]
[그 말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조별 예선 단계에서도 쩔쩔매는 중이다.
지원이 있다면 분명 수월하게 다음으로 진행할 수 있겠지.
그리고 겸사겸사 늑대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는 분명한 아군이 될거다.]
[분명 맞는 이야기야. 하지만 어딘가 걸려. 차라리 혼자 하는게 나을 것 같아.]
[알아서 해라. 난 애니를 데리고 먼저 숙소로 가 있겠다. 자리는 맡아 둬야지.]
[그래. 부탁할게.]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잘 생각해 보거라. 아무에게나 이런 기회를 주지는 않느니라."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에반제인은 손목을 둥글게 돌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더니 말했다.
"알고 있느냐? 너의 가치는 이제껏 없던 수준이다. 여성 노예에 메카닉.
게다가 콜로세움에서 게타르크를 쓰러뜨리면서 능력 또한 증명되었지.
내가 섣불리 제시했던 3캐럴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 저 밖에는 얼마라도 너를 구입하려고 하는 자들이 지천에 널렸다.
다 너의..."
그렇게 말하고는 에반제인은 손가락으로 내 아랫배를 쿡 찔러보인다.
"이걸 노리는 것일게다. 잘 처신하거라. 그리고 내 제안을 받건 거절하건,
나는 네가 우승하기를 바라고 있느니라."
"저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주시는 이유가 뭐죠?"
"음... 그냥 가지고 싶었다고 해야겠구나. 원래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그곳에 신경을 쏟아 최상의 상태로 수확하기를 바라는 법이니라."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적대감이나 꿍꿍이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게 건내는 호의라는 느낌이 든다.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니, 아직 하나 남은것이 있다."
에반제인은 부드럽게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걷어올린다.
"역시나."
"음...."
"아느냐? 너에게 새긴 낙인을 만든자는 내 전속 각인사로,
이 나라에서는 이 자 이상의 실력자가 없지."
"그렇습니까?"
"그래, 이 나라의 황제의 눈에 나서 내쳐진 것을 내가 고용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런 자가 새긴 낙인을 일개 메카닉이 풀었다?
그럴리가 없다. 맨데일을 어떻게 속여넘긴 것이냐?"
"속이다니요?"
"네 팔에 새겨진 문양이 그리 간단히 지워질리 없다.
낙인이 새겨지지 않는 경우는 노예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을 때 뿐이다.
이 경우 낙인은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너는 어깨에 낙인이 있었다. 내가 확인했느니라.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거라.
그러나 그걸 것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리 없느니라.
즉 모종의 방법으로 그대는 낙인인 척 어깨에 문양을 새겼다는 의미겠지. 언제든 지울 수 있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대는 애시당초 노예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뭐지?"
생각보다 머리가 잘 굴러가는 여자인 것 같다. 다만 그 전제 자체가 틀렸지만.
미리 적을 만드는 것보다는 웃으면서 자연스레 넘기는게 더 좋을 것이다.
"소원을 빌고 싶었으니까요."
"그런가. 그렇다면 낙인이 애초부터 없었으니 맨데일의 허가 없이도 등록이 가능했겠구나.
황제가 들어주는 소원은 제한적이다. 너의 소원은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질게 분명할 터인데,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콜로세움에 도전했다는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이겠지?"
"...."
말 없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하.... 이제보니 그대는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였구나. 그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전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 늑대는 뭐죠?"
"늑대가 아니라는 의미인가?"
"전 그냥 모험가 등록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모험가 등록이 하고 싶었다? 점점 더 의아하구나. 그게 어찌하여 안 되었기에
이 제국까지 와서 모험가 등록을 하려고 한 것이며, 또 어찌해서 그것이 아니 되었느냐."
"이 제국은 아시다시피 힘의 법칙을 따르는 몇 안되는 국가입니다.
콜로세움에서 이긴 사람이 모험가를 하겠다고 한다면 전과가 있어도 등록해 주겠지요."
"하아... 당돌하구나. 그래, 내 너에게 호감을 느꼈으니 그 정도는 일러주겠다.
늑대라는 건 말이다. 슬레이브 헌터라고 하는 족속들이다. 불법 노예상인들을 고발하고
노예의 해방을 목표로 움직이는 이들이지. 성 교회에서 주기적으로 노예 해방을 목표로
신 아래 모두 같다는 이념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집하고 공고를 내는 것이다.
결국 자신들은 옳다고 여기며 제국에 발을 들이는 어리석은 자들이지.
대개 콜로세움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가끔 그렇게 숨어들어온 늑대들에게 목을 물어뜯기는 이들이 있지.
"목을 뜯긴다?"
"그래.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꾸나.
이제는 너도 노예의 신분이니 행동을 조심하거라.
내 너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까 염려해 일러주는 것이다.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저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거죠?"
"글쎄다. 저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과 같은 목적이다.
너에게 반했기 때문이고, 너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내가 싫으냐?"
"아뇨, 어설픈 사상으로 불가능한 걸 밀어붙이려고 하는 교회의 머저리들보다는 좋아합니다."
"건방진년. 마음에 들었다고 웃어주었더니 밑도 끝도 없이 무례하구나.
너를 길들이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웠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나, 교회의 머저리라는 말은... 마음에 드는구나."
"결국 계급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게 사라지는건 아닙니다.
결국 효율을 추구하면 인간은 계급사회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부정하려 드는건 바보라고 해야겠지요.
중요한건 그 계급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아닐까요."
"미친년. 하하하!! 다른 자 앞에서도 이런 소리를 하였더냐?"
"아닙니다."
"그래, 조심하거라. 다른 이가 들었다면 네 머리가 두번 다시 목에 붙는 일은 없을테니.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구나. 자, 받거라."
에반제인은 내 손에 멋대로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그건 작은 구슬같은 것이었는데, 검은 색의 조금은 딱딱한 것이었다.
"연막이니라. 위급할 때, 그걸 던지면 내가 준비한 용병이 도움을 줄게다."
"도움...알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잘 기억하거라. 그 순간부터 너는 나와 떨어지지 못하게 될 테니."
그렇게 말하고 에반제인은 홱 방향을 돌려 걸어갔다.
복도에 서있으니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C조 승자는 맨데일!! 갑자기 참전해서 싸그리 쓸어버렸죠!!
정말 놀라운 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얼굴을 보십시오!
마치 정말 지옥에서 막 도망쳐나온 죄수와 같지 않습니까!"
그 말에 관객들의 함성이 이어진다.
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 에반제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머저리가..."
나도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조는 도합 A부터 H조까지 있었던 것 같다. 워낙에 지원자가 많아 걸러내기 위함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인간 외에도 개인 노예의 경우에는 주인이 참전을 강요하면
거절할 수 없어 등록하는 이가 있다고 하던 것 같다. 이 경우에는 애초에 이길 수 없다.
우승할 수 없는 출전임에도 그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다. 대개 우승하지 못하도록 미리 언질을 준다고 했다.
그러면 낙인이 있는 노예는 그저 도망치다가 죽을 뿐이다.
주인들은 그 노예의 죽음까지 이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총 8명의 승자가 나오고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대전에서 마지막에 구스온이라는 이름의 전 회 우승자가 나타난다.
첫날은 조별 예선, 둘째 날은 본선을 진행하고, 마지막 날에 결승전이 진행된다.
내일 누구와 맞붙을지는 모르지만 준비는 할 필요가 있었다.
B조 우승자의 숙소라고 쓰인 방은 노예에게 지급되는 방 치고는 상당히 고급이었다.
이전까지 있던 대기실과 비교해서 상당히 고급품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위생상태가 깨끗하고 청결한 것은 이 방에 머무는 기간이 고작 하루라서 그런 거겠지.
누구도 이 방에서 이틀 연속으로 머물 수 없으니까.
이미 방 안에는 체헤게가 서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거지?]
"별 거 아냐. 그냥 나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거절하고 왔지."
[그 이야기로 아직까지 잡혀 있었다니. 그 여자도 상당히 집요한 편이군.]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집요함. 그리고 그럴 정도는 되는 여자던걸."
[그래서 정말 그 여자하고 살이라도 비벼보겠다는 건가?]
"놀아주는 정도라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네."
[하... 알아서 해라.]
"고마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