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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두 남자 (48/303)



〈 48화 〉두 남자

늦은 저녁이었다.
준비된 욕탕에 몸을 담그고 쉬고 있으면 애니가 쪼르르 달려와서 뛰어들었다.
찰박이며 물이 튀었고  위로 흙먼지가 살짝 떴다.


"야! 씻는데 이러면 어떡해!"

"....냥..."

"그래... 알겠어... 너도 반성하고 있는데 화내기도 뭐하네.
음... 확실히 고양이가 철덩이보다는 정감이 가긴 하네."

[말도 통하지 않는 축생인데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군.]

괜히 삐친건지 한마디 얹는 체헤게에게 픽 웃음을 보였다.
여러군데 베여 피를 흘리던 다리는 어느새 깨끗하게 새 살이 돋아 있었다.
목욕은 피부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위함이었다.
이왕 씻는 김에 고양이도 함께 씻겨 주기로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옷을 입고 침대에 앉으면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똑똑 울리는 소리에 문을 열면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다.

"누구...?"


"아...안녕하세요, 저는 E조 우승자인데요...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 E조요? 반갑습니다."

"그.. 에리아씨죠? 지금 한참 화제인..."


"네, 그쪽은?"


남자는 살짝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맥스에요."

"이름이 있으신 것 보니까 다른 지역에서 오신 것 같은데 맞나요?"


"아뇨, 저는... 원래 평민이었거든요."

"아, 그럼 어쩌다가 콜로세움에?"

그는 말 없이 깍지낀 손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귀족의 개를 죽였거든요."


"개요?"


"저는 제국령 남쪽에서 도축업을 주로 합니다.
주로 모험가 분들이 가져오신 포획물이나 사냥감을 갈무리하고 가공합니다.
그 부산물로 나오는 재료를 구입하거나 파는 식이죠.
그리고 보름 쯤 전, 어떤 노예가 제게 개를 가져왔어요.
개는 굴뚝에라도 들어갔다 나온건지 헝클어진 털에 더러운 흙먼지를 붙이고
비실비실한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습니다.
노예는 그게 자신이 들개를 잡아왔다고 말하며 당장 배가 고프니 빨리 개를 죽여 고기를 달라고 하더군요.
그 부산품은 내게 모조리 주겠다고 했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죠."


"그 개가 귀족의 개였다고요?"

"실종된 귀족의 개라더군요. 견주는 젤렌지였어요."

"젤렌지?"

"네, 그 잔인한 인간의 개였는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저는 그에게 협박당했어요.
콜로세움에 도전한다면 가족은 살려주겠다고요. 귀족의 눈에 났다가 즉살당하는건
이 나라에서 드문 일이 아니니까요. 적어도 혼자 죽는게 낫잖아요.
아들에게는 다행히 일하는 법은 가르치고 왔으니 다행인가요..."


"사정은 알겠어요. 그런데, 여기는  오신건지  수 있을까요?"


"아, 저는 난타전에서 무더기로 쌓인 시체 속에 숨어있었습니다.
보통은 비위가 좋은 이도 없고, 도망치기 바쁘니까 생각보다 오래 살았죠.
그리고 결국 저는 홀로 남아 안도한 다른 노예의 뒤에서 목을 단칼에 날렸어요.
사회자도 한참 우승자를 발표하던 와중에 놀라서 당황한게 보였으니까요.
그러나 그건 운이었어요. 완전히 방심한 상대를 비겁하게 뒤에서 친 거니까요."

"죽음이 담보라면 비겁한건 없어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당신이 썼던 플라스크가 필요해요.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는 도구 말이에요.
당신은 메카닉이잖아요! 분명 쓸만한 도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당신은 그런게 없어도 저 강철 로봇이 있잖아요!!"


"그건 안될 말이에요. 당신은 이미 한번 죽음을 가불받았잖아요.
결국 언젠가는 갚을 때가 오는 거에요. 언제까지나 그걸 미룰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 죽음을 각오하고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난 여기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가세요.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줄건 없어요.
당신은 그냥 죽는게 두려운 것 뿐이야.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여기서 더 살아남겠다고 하는건...
분에 넘치는 말이지 않을까요? 결국 내 도움으로 한번 더 이겼다고 쳐요.
나는 이길 수 있겠어요? 구스온은 이길 수 있나요? 고작 하루 생명이 연장되어서
당신의 삶의 가치가 크게 달라질까요? 콜로세움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가족을 만날수도 없죠.
당신이 가능한건 두가지에요. 기도와 살인. 현실을 부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은 이상해요... 본질적으로 어긋나있어... 생명의 가치를 그렇게 비하한다니."

"생명의 가치. 좋아요. 아까 그랬죠? 도축업을 하고 있다고.
그럼 그 강아지의 생명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당신에게 죽은거죠?"

"그..그 강아지는 죽어가고 있었잖아요..."

"당신도 지금 보기에는 놔둬도 죽을  같은데, 내가 도와주고 아니고가 중요할까요?"

"인간은 개보다 가치있는 생명이잖아요? 부탁해요.  살려줘요."

"난 당신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또한 노예고  굴레에 갇힌 사람이니까. 그리고, 당신이 개보다 가치있다는 말은 보장할 수 있나요?
가치는 누가 부여하죠? 개는 귀족의 개였다면서요? 좋은 음식을 먹고 삶의 질을 보장받았죠.
당신은 스스로 벌어 스스로 살아왔고요. 과연 개의 계급이 당신보다 낮다고 확정할  있을까요 맥스?"

"인간은 개보다 고등하잖아요! 사회를 이루고 있고, 의사소통을 하고...!"

"그만하세요. 개는 인간의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생존할  있는지 파악하고 행동했어요.
그 결과가 애완견의 형태로 나타난 거고요. 고등하다는 기준으로 개와 당신을 가르기 시작하면
노예인 당신이 귀족에게 죽는건 당연한 수순이죠. 종교와 사회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당신이 왜 개보다 나은지 설명할  있나요?"


"그럼 당신은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당신이 고민할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네요. 결국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나는 만나는 적을 죽이고 노예를 벗어날 뿐이에요."

그는 이미 상당히 화가 난 것으로 보였다.

"사회는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에요! 그걸 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요."

"그럼 왜 인간의 잣대로 개의 생명을 판단하려 하죠?
인간의 기준이 아닌 절대적인 기준에서 당신이 개를 죽인건 아니잖아요?
한낱 인간이 그걸 파악할 수 있다고요? 그럴리가.
내게는 당신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전혀 보이지 않는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게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내가 선수를 쳤다.

"당신은 인간이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할 뿐이에요. 그리고 살고싶다는 욕망이 강할 뿐이고.
생각해보세요. 만약 돼지에게만 감염되는 줄 알았던 전염병이 인간에게도 감염된다고 하면
당신은 돼지를 죽이지 않을건가요?"

"죽이겠죠."

"그래요. 그건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생명경시에요.
당신이  돼지를 심판할 권리같은건 없어요. 똑같은거에요.
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볼까요?
당신은 그가 아끼던 개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 판단하에 죽였고,
그는 그런 당신을 힘의 논리로 심판했죠. 오히려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그가 당신보다 적법하고 타당한 선택을 하지 않았나요?"


"난 모르고 그랬던 거라고요!"


"무지로 벗어나려고 하지 마세요. 이제까지 당신이 주장한건 생명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즉, 스스로 잘못했다는 점은 알고 있으나 그걸 책임지기 싫었던 거에요."


나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애니를 살포시 껴안았다.
애니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살살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털이 쓸렸다.

"난 이 고양이를 죽일 수 있어요.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
알겠나요? 그럼 나는 그 동시에 나보다 더 고등적인 무언가가 나를 죽이려 할때
적어도 그 타당성에 대해 논할 자격은 없다는 거에요. 당신이 말한 생명의 가치는 '상대적인'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 당신보다 고등한 존재가 당신을 사지로 내몰았어요. 당신은 스스로 살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거에요.
 기억하세요. 그럼 이제 다시 말해보세요. 당신을 제가 도와줘야 하는 이유는 뭐죠?"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삶을 도울 수는 없어요. 그러나, 당신의 죽음을 도울 수는 있겠죠.
자, 받으세요."

나는 그에게 직접 만든 알약을 넘겼다.


"그걸 먹으면 당신은 죽어요. 확실히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3분 정도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죠.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를 이루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잖아요?"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그가 떠나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어느새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애니를 침대에 눕히고 말했다.

"체헤게, 나는 그에게 약을 주는게 맞았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나는 확실히 신이 예뻐라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언제부터 그런걸 신경쓰고 살았다고.]


"눈친 보지 않는다지만 말이야. 그래도 왠만하면 예쁨받는게 좋지 않을까? 후후.
아마 불가능 할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이번에 나도 또 내 판단하에 애먼 사람 하나를 또 실험체로 썼지 뭐야.
생명의 가치...음 내가 말해도 웃기겠지만 그런건 누가 부여하는 걸까.
  목숨만 신경쓰고 살아서 잘 모르겠네."


[네 논리대로라면 소나 돼지나 실험용 쥐새끼나 인간이나, 모두 같은 가치 아닌가.
 원하는 대로 해놓고 이제와서.]

"그것도 그래, 인간에게 필요한 걸 실험한다면서  인간에게 실험하지 않지?
인간의 이기심과 두려움이 원인 아닌가? 스스로 책임지기는 두려운 거잖아?
결국 필요한건 인간인데 희생당하는건 동물이지. 그리고 말하잖아.
 필요한 실험이었으니 어쩔  없다고."


[필요... 필요라...]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울 좋은 소리지만
결국 욕망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는 이들의 자기변명이라고 생각해.
욕망에 의한 필요일까, 아니면 결핍에 의한 필요일까.
결국 모든 것은 욕망에 의한 필요 아닐까?
불로불사를 바라지만 이룰 능력이 없으니 결국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수명연장의 연구를 해. 내 수명을 늘리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
나는 그게 너무 흥미롭다고 생각해."

[그래서 너는 극단적 이기주의로 발전했다는 건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거 좋지. 경험해 봤잖아. 좋더라.
그런데 방금 말했잖아. 공동체를 유지할 능력이 없으니 나에게 집중하는거지."


결국 밤을 새고 떠들었다.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시간은 새벽 3시.
눈 뜨자마자 맞이한것은 이미 A우승자와 F우승자가 싸웠고,
F우승자가 일방적으로 이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음은 내 차례였다.
 상대는 G조의 우승자였다.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으로 나간 내 앞에 보인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작은 체구의 남자.
그러나 표정은 묘하게 당당했다. 딱 5초만.
내 뒤로 따라나온 체헤게를 보기 전까진.
그리고 그는 당황한듯 심판에게 따졌다.


"저 로봇은 뭐여! 이래도 되는거에요?! 이건 반칙이잖어요!!"


대중은 이미 승패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뭘 어떻게 올라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대중도 어느 정도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묘한 분위기를 깨달은건 그의 손에서 툭 떨어진 낡은 회중시계를 본 후였다.
그가 크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시계를 주워들고 말했다.


"아니! 메카닉을 상대로 최면이 들을리가 없잖아!!"


사회자는 덤덤하게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알아서  문제 아닌가? 그러게 무기를 고르라고 했을때 제대로 고르셨어야죠.
이제와서 최면이 안통하는 로봇에게 질 것 같으니까 억울하다?
노예새끼들은 근성이 없군요. 그거 아십니까? C조의 맨데일은 끌려들어간 순간부터
모든 상대를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억울하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이번 경기에서 제일 주목할만한 남자중에 하나입니다. 당신은 그럴 가치가 없죠.
 그렇게 살아왔겠죠. 준비하지 않아서 못해, 원래 상대가 안되니까 못해.
그렇게 자기 위로나 하면서 사세요. 아, 그렇게 살다가 이제 죽겠군요?
조금  열심히 해볼걸 후회하고 있나요? 그럴리가요.
그렇게 도망친 끝에 결국 자기 목숨이 달렸는데
그럼에도 싸울 의지보다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쪽을 선택한다?
관객은 그런 걸 이해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처절하게 죽어가는 것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죠.
그런 부분에서는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거든요."


그리고 호루라기를 물고 말했다.


"경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비틀대며 앞으로 나와 내게 회중시계를 내밀었지만
이미 그의 수단이 모두 들려버린 이상, 굳이 그걸 봐 줄 의리는 없었고
그는 체헤게의 주먹 한방에 곤죽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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