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그렇게 죽은 인간들 (50/303)



〈 50화 〉그렇게 죽은 인간들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라텍스 수트로 갈아입고 있던 중이었다.
새로운 공지가 내려왔다.
나에게는 조금 불공평할지도 모르겠다.
경기 사이의 짧은 휴식 중 진행위원이 내게 찾아와 말했다.
집행위원의 수는 많았으나 각기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모두 붉은 자수가 들어간 흰 옷을 입고,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당신같은 사람이 어째서 콜로세움에 자원한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계급을 떠나 당신을 존중합니다.
여성임에도 도전하는 자세는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니까요.
그렇지만 콜로세움은 철저히 남성 중심적으로 돌아갑니다.
모두 당신이 패배해 공개적으로 희롱당하기를 기대하고있어요.
아시잖아요, 인간의 제일 기본적인 욕망  하나는 성욕이라는거.
아마 다음 경기부터는 로봇의 출전이 금지될 겁니다.
제보가 들어왔어요."

"정보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사회자분은 저를 도와주신 것 같았는데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콜로세움의 사회자를 포함한 집행위원은 모두 이전 기수의 콜로세움 우승자입니다.
우승자들에 한해서 콜로세움 집행위원의 자격이 주어지죠. 한번 우승만 하고 나면 철밥통이 보장되는 데다가,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권력을 잡을 수 있고, 여기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선배의 입장에서 다독여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럼 당신도...?"

"네, 제가 아마 326회 우승자였을 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실력좋은 인원이 없었는데 말이죠.
지금 다시하라면 못할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위원은 출전자에게 관대합니다.
간혹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하지만요. 뭐, 대중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가혹하게 쇼맨쉽을 유지해야 하지만요.
그래서 아마 사회자 형님도 콜로세움을 안이하게 본 참가자에 대해서는 과격해진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상당히 인원이 많아 보이던데요, 다들 우승자시구나."

"대회 자체가 오래 진행되기도 했으니 말이죠."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하기로 했다.
중간에 잠시 건너 뛴 경기들이 지나고 다시 대회가 치뤄진다.
D조, E조와의 경기는 D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내가 경기에 입장하기 전에 경기장 입구에서 체헤게를 막아세우며
애니를 안고 대기실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이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난처하기도 했다. 메카닉이라는 좋은 컨셉을 두고
굳이 이제 자력으로 상대해야 했으니까.
사회자의 강렬한 멘트가 귓가를 때린다.


"네! 정말 이번 콜로세움은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만 일어나는군요!
B조에서 에리아가 이기질 않나! A조의 체스커가 무참히 패배하질 않나!
갑자기 C조에 맨데일이 들어가고  주검이 되어 살아남았죠!
그래서 주최측에서 오더가 내려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1대 1 대결로
한정한다고 말입니다! 기존에 출전하던 로봇, 지원 등의 인력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콜로세움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거든요!!
이러면 에리아선수가 상당히 불리할 것으로 보이는데요!
어떻게 될지 바로 만나보시죠! B조와 F조 입니다!"


체스커라는 인물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유명한 자였던 것 같은데
상대는 더 기괴하다고  수 있었다.

"여자아..."

낮게 깔린 기계음에서 흘러나온 내 이름에 나는 몸을 본능적으로 움츠린다.
상대는 두꺼운 강철로 된 음성 출력장치를 달고 있었다.
윗 옷을 입지 않은 그의 상체는 근육이 자글자글하게 갈라진 채 식스팩이라고  만한 것이
위협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상당히 훌륭한 몸이었다.
무기로 든 것은 두꺼운 망치였다. 붕붕 휘두르는 망치에서 매서운 소리가 들렸다.

"에리아아...."

섬찟했다. 불쾌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흐른  같았다.
쿵쿵대며 내게 달려오는 그 몸을 보면 마치  공격은 상정도 하지 않은 것 같은 두터운 전차 같았다.
망치를 휘두르면 거리를 벌려 피하려고 했지만 그건 너무 간단히 실패했다.
육중한 충격이 옆구리에 느껴진다. 퍼억 소리를 내며 나는 흙바닥에 구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망치를 휘두르며 손잡이를 잡은 손의 힘을 풀어 길이를 순간적으로 늘인 것으로 보였다.
내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입에 들어온 흙모래 섞인 침을 뱉으면 그가 말했다.


"어....많이 아파...?"


그의 표정은 진지하게 나를 걱정하는  같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 나를 당황시켰다.


"미...안...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내가 다시 거리를 벌리면 다시 곧바로 나와의 거리를 좁힌다.
그의 발목을 노려 플라스크를 던지면 바닥에 쨍 하고 깨진 플라스크 주위로 발이 얼어붙는다.
얼어붙은 발을 바라보고 멈칫하던 그는 발을 뚜둑이더니 말했다.


"어... 발..."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반대쪽 발을 굴러 얼음을 깨부수고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붙은 발을 굴러 쿵쿵대며 달려왔다.


"나... 너 좋다..."


"네?"


"위험한거 손대면 안된다... 아야 한다..."

저 덩치로 아야한다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소름끼치는 감각. 심지어 저 얼음덩이를 그대로 달고 달려오는게 어떻게 되어먹은 몸인가 했다.
내가 마구 플라스크를 던지며 그의 앞을 막아보려 했지만 피부가 두꺼운건지  효과가 없었다.

"남편 말을... 안듣는다..."

"누가 남편이야?!"

"손... 필요 없다... 떼준다...."

깨달았다. 애초에 공격을 받지를 않는 사람이니 쓰러뜨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더욱이 대화가 통하는 상대도 아니다. 결국 단순하지만 우직한 강함인 것이다.
벌써 피곤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리...와라... 안아준다..!"


그렇게 말하며 망치를 붕붕 휘두르는 모습은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발화부를 꺼내 던졌다. 몸에 탁 달라붙어 불타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꺼지고 말았다.


"아니...이걸 어떻게 이겨?"


가방에 준비해온 포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망치를 기껏 피하면서 이리저리 뒹구는게 전부였고
그럴 때마다 관객은 환호했다. 그러다가 망치로 나를 한번 후려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그는 곧장 망치를 내려놓고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한 듯 망치를 다시 집어들고
내쪽으로 쿵쿵 뛰어오는 그에게 나는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체헤게가 있었다면 나보다 조금 더 유효한 공격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밴디드는 몸에 유달리 땀이 많았다. 발화부가 붙자마자 조금 타오르는가 싶더니 꺼진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분명 상대를 죽여야 끝나는 경기임에도 그는 마치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상한 구애활동을 하며 내게 달려들었고 그건 내게 묘한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리스크를 감안하기로 했다.
마력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체를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슬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운을 가리기 위해서 바닥으로 연막을 던졌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 당황한 밴디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기이한 쇳소리를 듣지 못할리가 없었다.

곧장 그의 배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묵직한 타격이 느껴진다.
아까와는 다른 굵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가방에서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말뚝의 끝 부분이 겨우 박히는 가 싶더니 그의 검붉은 피가 한줄기 주륵 흘렀다.

"왔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서는 어딘가 살짝 기쁨이 섞인 것도 같았다.
나는 힘을 끌어모아 그의 심장까지 콰악 짓이기듯 눌렀다.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다. 한번 상처를 입으면 회복하기 쉽지 않다.


"어... 어어....?'


그가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나는 뚫은 구멍으로 마력을 모아 그의 심장을
구워버렸다. 말 그대로 고열로 지져 태우는 것이다.
분명 엄청난 고통이 따를 텐데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연막 속에서 사방의 풍경을 전부 차단당한 주제에 나를 더듬어 껴안았다.
이미 기계음을 뱉어내던 장치는 망가진  같았다.
어딘가 어눌한 목소리로 그는 나를 껴안은  말했다.


"사...라....ㅇ..."

그리고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울컥이며 피가 뿜어져나온다.
모은 마력이 빠르게 흩어져갔다. 또 혈관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진다.
마력을 조금  자연스럽게 운용하는 법을 알아내야   같았다.
밴디드의 탄내가 나는 몸은 연막에 섞인 연기를 뿜었다.
연막이 마침내 걷혔을 때는 그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다리의 얼음이 조금 남아 있었다.

"결과 나왔습니다! 승자! 에리아!!"


사회자의 결과발표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고 저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 대기실로 이동해
수트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내가 죽인 상대가 죽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들은 기분은
내가 들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보다 훨씬 불쾌했다.


[다녀왔나.]

"응. 좀 기분은 별로지만 이기고 왔어."


[그래, 에반제인이 준 연막탄은 어쨌나?]


"그거, 써버렸어."

[기어이 그걸 썼군.]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쪽에서 말한대로 고용된 사람이 오거나 하진 않던데."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문 너머로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에반제인이야. 문 열어."

어딘가 당당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나는 순순히 문을 열었다.
그녀는 살짝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역시 내 도움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했느니라."


"덕분에 목숨을 빚진 셈이네요."


"그래, 나에게 고마워 하도록...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고용한 검투사는 없었어.
갑자기 룰이 변경되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니까. 그건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행동이었다고.
너는 알고 있었겠지? 미리 룰이 변경되어 다른 사람이 참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네."


"하아... 그래, 그럼 대체 그 연막 안에서 뭘 한것이더냐? 빨리 나에게 말해보아라."

"심장에 말뚝을 박았어요."

"뭐? 야만적이구나. 그건... 마치 고서적에 나오는 흡혈귀라도 잡는 것 같지 않으냐.
연막값을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아무리 보아도 너는 놀라운 아이다. 나를 이런식으로 농락하는 아이는 없었거늘.
무엇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느니라. 그래서 소녀, 너에게 명한다.
살아 우승하거라, 그리고 나서 나를 찾아오는게다.  너에게 지위를 주마."

"필요 없어요."

"걱정 마라, 널 구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잠깐의 여흥을 즐기자는 것이지.
너도 원하게 될 것이니라. 보아라, 아름답지 않으냐 네 눈에 비친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에반제인은 우아한 프릴이 달린 스커트를 살짝 들춰보인다.
매끄러운 허벅지와 가터벨트가 드러났다.
여자가 보아도 확실히 그녀는 대단한 여자였다.


"그래, 좀 더 보아라. 네 머리에 소녀의 인상을 깊이 남기거라."

"참, 당신은 귀여운 사람이네요."


"소녀가 귀엽다? 건방지구나. 이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느니라.
어떤 자신감으로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인지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전  번 말하지 않아요. 들으신 그대로에요.
기대하세요. 우승하고 나면, 또 당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소원을 빌어줄 테니까."

에반제인은 그런 나를 보고 침을 꼴깍 넘긴다.


"그래, 기대해 보겠느니라. 허나, 이번에도 소녀를 농락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어보이면 그녀도 왠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노예 주제에... 노예 주제에 너무 건방져..."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굳이 답을 하지 않았다.
한결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으니까.
사랑이 꼭 하나의 형태일 수는 없는 것이지 않던가.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관심을 빙자한 하나의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에반제인이 내 대기실에서 떠나고 나서 나는 몸에 딱 달라붙는 라텍스 수트를 벗었다.
망치로 하도 두드려 맞아서인지 이미 터지고 헤진 부분도 많고 모래나 돌먼지 조각에 찢기기도 했다.

"아무래도 버려야 겠네."

[그것도 충분히 귀족들에게는 서비스였을텐데.]

"누구한테 서비스 하려고 입은거 아니니까."

적당히 구긴 수트에 발화부를 붙여 화장실에 던져넣었다.
수트는 흐물하게 녹아 사라졌다.
검은 액체가 남은 바닥을 적당히 물로 쓸어버렸다.
막히든 말든 어차피 내일이면 이 공간을 떠날 테니까.
마지막 대결은 오히려 밴디드보다 쉬웠다.
접근전을 허용하지 않는 창병이었는데, 결국 적당히 얼려서 머리를 부쉈다.



맨데일의 경기는 처참할 정도였다.
경기 시작과 동시에 그를 부축하던 진행위원이 그를 놓자마자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맨데일이
뼈가 드러난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팔은 제멋대로 꺾였고
몇 번이나 흙먼지를 들이마시며 바닥에 얼굴을 쳐박고 바르르 떨었다.
무리하던 목도 쉬어 비틀어진건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딴...저딴 새끼가...나를 내려다보고...  맨데일...맨데일인데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콱 밝힌 그의 머리는 마침내 조용히 꿈틀거리다가
이윽고 움직임을 멈췄다.
머리 아래로 스미듯 흘러나온 핏물은 바닥을 적셨고
긴 머리가 피에 젖어 떡졌다.
몇번의 발길질이 이어졌고 결국 뒤통수가 무너지듯 파였다.
그게 끝이었다. 맨데일은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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