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Champion
원래 같았으면 이걸로 종료였을 텐데.
하필 이전 콜로세움 우승자가 재참가를 신청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결국 나는 내일 그와 맞붙어야 했다.
분명 이름이 구스온이라고 했던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하루를 통째로 경기하게 될 정도라면
걱정이 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사람들의 기대를 와장창 부숴버린 이번 경기.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생각했던 체스커는 밴디드에게 죽어버렸고
신예라고 생각했던 맨데일은 비참한 말로를 맛봐야 했으며
철저히 패배하고 범해지길 기대했던 작은 여성은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팬은 상당수 분노를 표출했으나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체스커는 마약 거래상의 보디가드를 맡던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다가 마약을 빼돌려 조금씩 이익을 챙기다가 결국 발각되어
노예의 신분이 되고 콜로세움에 참전했다고 했다.
그의 외모나 체구를 보면 인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전형적인 미남상을 한 남자였고 평소에도 여자를 자주 바꾸던 자였다.
그러나 동시에 정이 많아 평민을 자주 도왔다는 미담이 있는 자였다.
좋은 사람은 결단코 아니었지만 말이다.
맨데일 역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그 기구한 성장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으니까.
노예로 전락해서도 그는 화려한 경기를 보였다.
다만 그 하나를 보고 살아온 남자가 있었던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불행이었겠지.
그는 적어도 꿈은 이루고 죽지 않았던가. 결국 노예를 사서 팔았고,
이 나라의 누구도 그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결국 이제 그들도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제 후회는 의미가 없다. 남은건 나 뿐이다.
하루를 마치며 나를 안내한 위원이 소개해준 방은 귀빈실이라고 해도 좋을 방이었다.
어제 묵었던 방도 상당히 훌륭했지만 이건 더했다.
사치 그 자체를 보여주는 방.
콜로세움은 목숨값으로 운영된다. 당연히 수많은 돈이 이곳으로 굴러온다.
그 돈들은 결국 이런 곳에 쓰이는 것이다.
"기어이 결승전까지 도달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그는 의외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놀랍네요. 정말 우승할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메카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 플라스크는 어디서 가져오신 겁니까?"
"아, 아는 영기술사가 있어서요."
"영기술사 지인이라... 볼수록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네요. 이야기가 길었군요.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내일도 승리하셨으면 좋겠군요. 구스온은 아주... 강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제가 더 강하니까요."
그가 나가고 나서 나는 오늘 입은 상처를 슥 훝어본다.
마력으로 평소 하던 것처럼 치료해버려도 되지만 일부러 놔뒀다.
잔상처들이라 조금 쓰라린걸 빼면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았으니까.
몸을 데우면서 욕조에 누웠다.
"하아..."
[그래도 이제 하나 남았군.]
"그러게. 우리 깡통은 내일도 여기서 관전이나 해야겠네."
[내 의지는 아니잖나.]
"그렇긴 한데 기껏 비싼 몸 만들어준 보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하하... 이제 정말 이 몸은 함부로 다쳐서는 안되니까 말이지.]
"그것도 그렇네. 수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대장간까지는 너무 멀다.]
"아마 내가 알기로 제국령 서쪽으로 이어지는 교각이 있었을걸.
티리시안 산맥 너머로."
[티리시안 산맥? 거길 또 어느 천년에 넘겠나. 그냥 포기하지.]
"뭣하면 돌조각 모아와. 골렘 작게 하나 만들어줄게."
[됐다. 이 몸이 꽤 마음에 들거든.]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흥미롭지 않아?"
[뭐가 말이냐?]
"미리타엔 제국은 아무리 봐도 노예가 주축을 이루는 국가야.
노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신분 상승 수단에 비해 강등이 잦으니까.
그러면 왜 이 노예들은 반란을 하지 않는걸까. 독재라는건 알고 있는데도."
[단순히 익숙해서라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겠지만, 이미 그들이 세뇌되어서겠지.
그들의 현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 떨어지는 콩고물에 행복해하기 때문에.
그 조금의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서 더 큰 대의를 망각하는거겠지.]
"고작 그런걸로?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도마뱀은 위기에 처하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그 꼬리보다 목숨이 더 큰 가치라는걸 아는거지.
만약 그 도마뱀이 꼬리에 집착해 도망치지 못한다면 과연 그건 누구의 잘못일까.
지금 가진 것을 놓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하지. 미래의 불확실한 가능성보다는
당장 지금 가진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스스로 가진 것이 낳은 구속이지.]
"정작 누군가가 먼저 일어서기 어려운 구조에 실패하면 모든것을 빼앗기는 것.
확실히 도전하기 어려운가."
[도전하고 실패해서 가진 것을 잃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꼬리를 자른 도마뱀의 짧아진 꼬리를 비웃는 건 그리 어렵지 않거든.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냥"
"아, 애니. 이리 와."
나는 애니를 받아들고 물 속으로 조심스레 넣었다.
조금 온도가 높은지 화들짝 놀라며 쪼르르 기어올라가는 애니는 물에 발만 종종 담그다가
꼬리를 넣었다 뺐다 하며 물 온도만 재고 있다.
[어떤 사회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눈 앞의 이익이 얼마나 작던,
그걸로 다른 이들과의 차이를 벌릴 수 있다는 눈에 보이는 변화는 사고를 멈추게 하기에 충분하다.
생각해봐라. 나는 아직도 제자리라고 생각하는데, 나와 같은 위치였던 자가 위로 올라서려 한다.
함께 올라갔을때의 도전에 겁을 지레 먹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끌어내리는 거겠네."
[결국 그렇게 다시 그들을 자기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느끼는 상대적 만족감이 좋은거지.
거기 취하는 거다. 그러면서 결국 실패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지.
실패할 확률을 지웠다고 생각하는 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지?
도전조차 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해버린건 똑같지 않나.
실패가 두려워서 성공을 없애버리는 거다. 사실 가진 거라고는 없는데
그것 마저 놓지 못하는 거다.]
"이 콜로세움은 그들의 작은 공포심을 배가시키는 공간인거네.
실패는 죽음이란 리스크를 걸어놨으니까.
기껏해야 노예 밑으로는 내려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의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거잖아."
[그래, 결국 이들은 비참한 생활을 택하는 거다. 그리고 간혹 그들중 도전 의식이 있는 이들이나,
더는 삶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이 간혹 이렇게 살 바엔 하는 생각을 하고 도전하는거지.
결국 그건 또 다른 본보기가 되는 거고.]
"성공한 자는 부러워하면서 실패한 자를 비웃는다."
[결국 이들 모두가 힘을 합쳐 반역을 했다면, 혁명을 도전했다면?
사회는 바뀌었을지 모르지. 그러나 이들은 그럴 의지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거다.]
"결국 그 소수의 인간이 자신들의 목에 칼을 채우는걸 보면서 대꾸 한번 할 수 없는 합죽이로 만드는구나.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점점 죽어나가면서도 왜 저들은 우리 위에 있지? 라는 생각보다는
나는 그래도 저 실패자들 보다는 낫지 라는 생각으로 현 상황을 버리지 못하니까."
[그리고 결국 콜로세움을 보면서 느끼겠지. 언젠가 저들중 누군가가 우리를 대변해주겠지.]
"하지만 콜로세움에서 승리한 순간 그들은 더이상 노예가 아니니까.
노예인 사람들을 생각해줄 이유는 없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하지."
[충분한 답변이 되었길 바란다.]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애니를 쓰다듬으면서 목욕을 마치고 나왔다.
체헤게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앉아있었다.
"잘까."
"애옹."
[너희 둘은 자라. 나는 생각을 좀 할 테니. 아, 창문 좀 열어도 되나?]
"편할대로."
밤이 되어 잠을 청할 때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그게 내 잠을 깨우지는 못했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이제는 대우 자체가 상당히 달라진건지 오전부터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면 진행위원 하나가 날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에리아씨."
"고맙습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오늘부터는 결승전이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미리 준비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우선은 가벼운 것부터 시작할겁니다.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주십시오."
그가 내게 내민 것은 겨우 가슴만 가릴 것 같은 옷과 딱 달라붙는 속옷이었다.
나는 일부러 나를 놀리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그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 옷을 내게 쥐어주고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아마 그건 농담이 아니라 정말 그런 룰이 있다는 의미겠지.
내가 옷을 입고 다시 문을 열면 그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본디 콜로세움이라는 공간은 싸움과 죽음을 위한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결승전은 누구나가 공평하게 이런 옷을 입은 채로 결투를 치르게 됩니다.
즉,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놓고 싸우겠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또한..."
"관객들이 좋아라 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본래 여자가 결승까지 올라오는 일은 잘 없기 때문에 또 그만큼 불이 붙은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결승에서 그 옷을 입으시고 패배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저를 그런 쪽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용을 쓰는군요."
"여긴 그런 곳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은 몇 회차 우승자인가요?"
"241회차 입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미리테안 북서쪽으로 가시면 산이 있습니다. 아십니까?"
"아뇨. 그런데 산은 갑자기 왜요?"
"거기는 미리테안 규모의 거대한 산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면 찾는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함부로 불태우거나 하기도 어렵죠. 병력을 모으기도 힘들거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
"늘 그랬습니다. 저 때도 당시 임원이 말해줬던 이야기죠.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경기 시작까지 약 30분 정도 말이죠.
도망치시려면 지금입니다. 도망치셔서 그 산속으로 도망치시면
누구도 당신을 찾으러 가기 어려울 겁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도망칠 생각은 없어요."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30분간 정비를 마쳐주십시오.
시간이 되면 다른 위원이 아마 모시러 올 겁니다."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거죠?"
"그냥, 선배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자리를 벗어났다.
가방을 챙겼다. 가방안에 든 것은 여러가지였지만 전투에 쓸만한 것만 추리면
그다지 의미있는 건 없었다. 그나마 내가 간밤에 만들어 놓은 포션과
발화부 약간, 그리고 아마 방금 다녀간 위원이 넣고 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단도.
날이 매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튼튼해 보이는 단도였다.
날은 한 쪽이고, 검은 흑단으로 만든 검집과 손잡이가 매력이 있었다.
투박해보여서 더 마음에 들었다.
잠깐 심호흡을 하고 미리 단도에 강화부를 몇 장 붙였다.
미리 아교도 먹여두었다. 날도 미리 갈아두고, 기름칠을 해 광을 내고 다시 넣었다.
적어도 싸우다가 부러지는 경우는 피하고 싶었다.
빙결용 플라스크도 이제 없다.
마지막으로 불안함에 작은 플라스크에 검은 안티움을 조금 덜어 챙겨두었다.
여차하면 이걸 들고 달려들어 깨버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이니까. 안티움에 녹아버릴테지.
[참, 사람 하나 상대하는데 상당히 노력을 쏟는군.
왜 그 저번에 올리브도 그렇게 대처했다면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이기고도 남았을거다.
그렇게 요란하게 죽이지 않고서도 끝낼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 됐군.]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죽여서 다행인건데."
[더 조용히 죽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의미다.]
"그런가."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노크소리가 들리고 나는 체헤게와 애니를 데리고
경기장 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출전이 안된다고 해도 여기 놔두고 갈 수는 없는 거니까.
당연하게도 애니와 체헤게는 따로 빠져서 관객석 쪽으로 따로 이동했다.
아무리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경기장 바닥에 따로 금가루를 뿌려주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경기장 전역은 이미 말라붙은 핏물이 스며 검은색으로 말라있었다.
내가 등장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면 저 쪽에서도 왜소한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두 선수 입장이 모두 끝났습니다!! 에리아와 구스온을 박수와 함성으로 맞아주십시오!"
그제서야 나는 살짝 당황했다.
구스온의 생김새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왜소했고
질질 끌리는 다 찢어진 바지를 양 손으로 부여잡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소매도 잔뜩 늘어나서 질질 끌렸고, 양 소매는 몇 번이나 접어 올려둔 채였다.
내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로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린다.
그리고, 동시에 콜로세움 사방에서 나팔소리가 연이어 울린다.
서로 아직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뒤로 물러났다.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구스온 역시 뒤로 물러나 주머니에서 작은 알약을 꺼냈다.
'아, 실수했다. 저 약을 먹을 시간을 주면 안되는 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 나도 차라리 늦지 않게 포션을 마셨다.
몸에서 느껴지는 메스꺼움이 채 끝나기 전에 적의 움직임을 흩어본다.
"두 선수 모두 약을 마셨는데요!!
구스온이 약을 먹게 허용한 상대 중에 승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이번 에리아도 상당히 다크호스였거든요!! 아 흥미로운 대결이 예상됩니다!"
"닥쳐."
그 목소리는 구스온의 것이었다.
아까보다 상당히 키가 자라난 것 같은 외모에 울긋불긋한 근육이 생겨나는 그의 모습은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실시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풍선에 바람을 넣듯 근육이 불어나기 시작하고 접어놓았던 옷이 찌직 소리를 내며 찢어져가며
질질 끌던 바지가 말려버리듯 줄어들어갔다. 결국 상의는 완전히 찢어져버려 거적데기가 되어버렸고
구스온이 그걸 한 손으로 찢어 던져버렸다.
바지 역시 겨우 붙어있는 형태로 남아있다. 저건... 놀라운 약물이다.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형태였는데 마녀로서 흥미가 동하지 않을리 없었다.
일단 저걸 이기고 나서 빌 소원은 정해진 것 같다.
결국 구스온이 강해질 시간을 충분히 선물해버린 나는 긴장에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