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존재 증명 (52/303)



〈 52화 〉존재 증명

이미 아까 경기장에 입장했을 당시의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어느새  앞에 있던 것은 거대한 몸집을 하고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는 남자였다.


"너는 왜 싸우는거지?"


그의 물음. 내게 마치 답변을 듣기 전까지는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듯한
거만한 자세로 물어오는 그에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나라에서 시민권을 얻을거니까. 그리고 모험가가 되기 위해서."


"그래서는  이길  없다. 예로부터 인간은 사냥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투쟁본능. 공격으로 인한 다른 생물을 사냥해 그 고기와 가죽을 취하고 싶다는 욕망.
그건 본능이다. 패배자들은 초식을 택하고 포식자는 그들을 사냥한다.
당연한 이치야."

"패배자가 초식을 택한다?"

"그래, 초식동물은 비로소 육식동물에게 사냥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초식을 처음 택한 순간부터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서 사냥하기를 택했다.
내 본능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건 내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한눈에도 무거워보이는 건틀렛을 착용했다.
그리고 나서 바닥을 쾅쾅 찍어대는 손끝에서는 흐릿한 흙먼지가 날렸다.


"그럼 그것도 아시겠네요?"

"...?"

"피맛을 본 투견은 죽여야 된다는거."

그는 나를 보고 이죽이며 웃었다. 그가 도약했을때 나는 눈으로 쫒지도 못하고
날아온 주먹에 얻어맞았다.
마치 맨데일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콜로세움 바닥에 굴러야 했다.
뺨에서 멍이 든  같은 얼얼함이 느껴지고 동시에 코에서 따뜻한 피가 주륵 흘렀다.


"갇힌 투견이라도 아기 목을 물어뜯기에는 충분하지."

목이  틀어진 감각에 나는 목을 손으로 잡고 두둑이며 돌렸으나
그게  끝나기도 전에 또 내 앞으로 바짝 따라붙은 그에게 복부를 맞았다.
 하는 마치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고, 이미 배를 가려줄  하나도 없던 나는
뱃가죽이 터지는 감각을 맛봐야 했다. 배에는 붉게 피멍이 들었고
나는 한 번의 반격도 성공하지 못한 채로 입에서 피가 섞인 구토를 했다.
 며칠 콜로세움에서 제공한 식사라고는 죽이 전부였기 때문에
고체 하나 없이 질척하게 바닥에 쌀 미음의 질감이 아직 남은 핏덩이가 뿌려졌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에리아, 한번도 제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스온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일방적인 대결이
과연 결승전에 어울리는 경기가 맞습니까!!"

사회자의 고함소리에 맞춰 관객석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였다.


"에리아라고 했지. 인간의 본능은 사냥 말고도 존재한다.
번식이 그것이지. 콜로세움에서 너의 인권은 보장받지 못해.
더구나, 이런 몸매를 다 드러내는 옷을 입고 남녀가 땀을 흘리며 뒹굴다가 나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않겠어? 뭐, 먹고 버리기에  만족스러운 몸은 아니지만.
그래, 어디 한번 볼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어느새 뒤에 접근해 내 옷을 손으로 찢어버렸다.

"꺄악!"


"그래, 이제야 좀 제대로 된 소릴 하잖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 천조각 하나의 유무로 인해 관객의 함성역시 결을 달리했다.
내게는 안좋은 쪽이지만 분위기는 멋대로 달아올랐다.

"와아아!!"

"가라!!"

그런 말들이 멋대로 오가는 와중에 나는 가방에서 빠르게 도구를 챙겼다.
우선은 가방안에 들어있던 단도였다.
검집은 뽑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반쯤 삐져나온 칼날이 반짝이고 있었다.
콜로세움의 하늘엔 너무나도 밝은 해가 떠 있었다.
마력을 실어 내리찍은 단도는 상당히 예리하게 일직선으로 호를 그린다.
찔렸다가는 즉시 그 커다란 근육을 도려 낼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살짝 자만하던 그 찰나였다. 관객이 이미 그의 편이라는걸 잊어서는 안되는 거였는데.


"칼이다!!"

관객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나를 어깨 위로 들쳐매고 있던 구스온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내 손은 허공을 갈라야 했다.
결국 칼은 살짝 스쳐 그의 어깨에 약간 생채기를 내는 것으로 그쳤다.


"하하하... 그깟 칼로 날 이기려 들었다니.
숨겨둔 발톱치곤 너무 작은데? 힘이라는건 이렇게 쓰는거야."

그리고 그는 나를 붙잡아 들고 무릎으로 복부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한대 두대 세대. 늘어나는 타격횟수에 쿨럭이는 핏기가 그의 짧은 바지에 튀었고
다리와 팔에도 질척하게 묻어났으나 그는 그런건 개의치 않는  같았다.

"그래, 이게 필요했어. 삶은 이런 사냥본능을 충족할때 안정감이 생기는거야!
개기지 못하게 반쯤 죽여놓고 천천히 즐겨주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팔을 찔러 관절쪽 동맥을 잘랐다.
손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팔에 박힌 단도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과연 실혈사가 빠를까 아니면 내게 패배해 범해지고 죽음을 바라는게 빠를까."


"....가...를걸..."


"뭐?"

"네가... 고...럽게...ㄴ게... 빠를...걸..."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 것 같은데 그가 나를 바닥에 던졌다.
비틀대며 구르는 내 위로 올라타 내 몸을 거구로 깔아 뭉개고 말했다.

"그래, 뭐가 빠르다고?"


나는 멀쩡한 손으로 단도를 팔에서 뽑아냈다.
그리고 단도를 뒤로 던졌다. 나도 그도 주우러 가기 어려운 위치에 떨어지는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숨을 골랐다.

"아직도 여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그는 일방적인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 위로 또 쇠주먹이 날아왔다. 통증이 시야를 가리는 일은 익숙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큰일이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었다.
죽지 않는다고 해서 피가 부족한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시야가 흐려지고 숨쉬기가 괴로워지며, 빈혈로 인한 어지러움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내가 거리를 벌리려고 할 때마다 구스온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나를 공격했다.

이미 오른다리는 골백번은 걸려 넘어진 것 같았다.
피로가 쌓여 내딛을 때마다 발목이 접질리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딘가 뼈가 어긋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공격을 하지도 못했는데 상대는 반격을 허용하지도 않았고,
이제 시간은 점차 지나서 조금 있으면 약효의  시간이  되어 간다.
물론 상대도 약효가 어느 정도 떨어져 가고 있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가진 약의 개수를 모른다는 것이다.
서 있기도 어려워 비틀대고 있으면 흐린 시야에는 내게 걸어오는 구스온의 다리가 여러 개로 번져 보였다.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떨리는 다리는 기어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기울어졌다.
시큰대는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엎어진 채로 일어날 수 없었고,
결국 그 상태로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상당한 압박감도 느껴졌다.
상대는 이미 나를 전력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맨데일이 그랬던 것처럼 동정받으며
나는 그에게 노리개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바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관절에서 흐르는 피를 지혈하고 치료하는 일이었다.
억지로 팔을 부여잡고 고통그러움을 참아내는 표정을 비춘것 만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으니까.


"칼도 없다. 부상도 심각하지. 그런데도 버티는 이유가 뭐냐?
너는   콜로세움에 있지? 삶에 대한 의지? 우승 소원?
그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콜로세움에 도전해서는 이길  없다.
오직 승리하기 위해 콜로세움 자체가 목적인 나야말로 승자다!
생명을 죽이고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이야말로 작은 제국이야!"


"그래... 나도 비슷한 것 같아요.
존재 증명이라고 하면 얼추 맞겠네요."


"아까보다 말이 꽤 명확해졌군, 정신이 좀 드나본데."


"본능에 굴복한 짐승에게 인간의 지성을 보여주려고요.
내가 인간이라는  스스로 증명하는거에요."


바로 마력을 천천히 끌어모았다.
이제부터는 눈치싸움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차피 칼은 멀리 던져버렸고 나도 쓰지 못하지만 구스온도 주워 쓸 수 없다.
주먹은 위협적이고 고통스럽지만 일격에 사람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는다.
적어도 신체 부위가 잘려나갈 일은 없으니까.
그럼 마력회로는 끊기지 않는다.
온 몸에 묻은 핏자국 위에는 벌써 흙먼지로 범벅이  상처가 있고,
얼굴에는 이미 피가 잔뜩 흘렀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슬슬 시간은 한 시간을 넘겼고 꾸물대는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느껴졌다. 따스한 감각. 요즘은 정말 마력을  일이 너무 많았다.
마력회로가  틈이 없도록 혹사당했고 정말 이러다 죽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히 사용한 마력회로는 점점 질기게 변했다.
어떤 근육이든 오래 사용하고 찢어질수록 더 강해지는 법이다.
내 몸에 잔뜩  피멍은 단순히 그에게 얻어맞은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어...!"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구스온이었다.
나를 끝장내기 위해 걸어오던 그의 발이 멈춘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몸 사방에 질척하게 튄 붉은 피. 검게 굳어가기 시작한 그 피가 나의 것인 이상, 나는 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구스온은 서서히 둔해져 가고 있었다.
몸에 묻은 피가 그를 꽉 감싸 고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걸어갔다. 한쪽 다리는 내딛는 것 자체가 어려워 질질 끌어야 했다.
마침내 그의 앞에 도착한 이후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잡히지 않을 거리에서 말했다.


"본능을 이성이 지배할 때, 인간은 다음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가방에서 안티움이 든 플라스크를 그의 얼굴에 던졌다.
쨍그랑. 그 소리가 들리고, 검고 끈적한 액체가 그의 머리 위에서 흘렀다.
단 1초. 그 거구의 남자가 무너져 내리며 괴성을 지르는 순간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으아아!! 크아악!! 아아악!!!!"

그는 그렇게 외쳤지만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풀려나지 않도록 최대한 그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굵은 팔은 내 피를 덕지덕지 칠하고서도 한참을 꿈틀거렸고
마침내 그 무릎을 꿇었을 때 초라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속으로 스며들어 버린 안티움. 그리고 뭉텅뭉텅 덩어리로 뽑혀나온 머리털들.
그리고 빠르게 색이 변해가는 피부와 호흡이 가빠지며 거칠어진 숨을 쉬는 채로 날 노려보는 구스온.

"뭐...뭐냐..."


"인간의 본능보다 독룡의 특성을 믿은거에요."


"으아아아아!!!"


그는 한참동안 괴성을 질러댔다. 그건 그가 말했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사냥당한 짐승의 단말마였다.
그가 마침내 숨을 거두고 나서 나는 내 가슴을 손으로 살짝 가리고 말했다.

"이겼...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네! 경기 종료합니다! 승자는 에리아!!"

시원하게 알리는 결과에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나 맞은건지 터진 피만 해도 어지러웠으니까.
승리한 순간부터 나는 노예가 아니다. 누가 함부로 건들 수도 없다.
안심하고 쓰러졌다. 날 데리러 나오는 체헤게를 발견하고 괜히 말을 걸었다.

[오늘부터 재미있겠네. 모험가.]


그렇게 말하고 쓰러진 내가 눈을 떴을 때는 근처 숙소의 방이었다.
자는 동안 몸은 대강 치료가 끝난 것 같았다.
몸 구석구석 묶인 붕대와 팔에 칠해진 약들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체헤게 옆을 지킨 것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집행위원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으으..."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도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 정신이 드십니까?"


"아, 여기가 어디죠?"

"콜로세움 근처 여관입니다. 축하합니다.
구스온을 쓰러트리셨어요."

"아... 그렇군요."

사실 어떤 인간이든 죽지 않는 한 안티움의 독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
장기가 모조리 녹을 정도의 맹독이니까.
그 한번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 얼마나 맞은건지 아직도 머리가 띵하다.

"콜로세움은 당신을 우승자로 정식 인정했어요.
이제 당신은 정식으로 제국 시민이에요. 시민권을 인정받았죠.
덧붙이면 당신은 612회 우승자랍니다."

"612회... 고마워요."

"우승하셨으니 콜로세움 접수처에서 소원을 등록하실 수 있어요.
일부 소원은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고 계세요.  간병인이 올겁니다."

"아, 감사해요."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여튼 정말 목숨줄 하나는 질기군.]

[뭘로 보고.]

[애니가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댔다. 간밤에 말이다.]

[걱정을 끼쳤네.]

[민폐였지. 덕분에 쉴수가 없었거든.]


[귀도 없는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보고 듣는 곳에는 문제가 없던데.]


[그래도 여전해서 정말 다행이야.]

[퀘트로네스 미리타엔 제국의 시민권을 얻은 612회 콜로세움 우승자 에리아는
역대 최고로 흉폭한 챔피언을 상대로 존재증명에 성공한 인간이니까.]

[그렇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