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소원
준비를 마치고 나는 콜로세움의 접수처로 향했다.
콜로세움 앞에서는 저마다의 목숨에 배팅을 했던 인간들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내가 그들 사이로 걸어가면 그들은 나를 금방 알아보고 좌우로 길을 텄다.
개중 일부는 내게 환한 웃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기도 했다.
"여어! 에리아! 고맙다고! 역배가 128배가 터졌어! 씨발 나는 이제 부자다!!"
"저 개새끼가 에리아야?!"
"내 돈 돌려줘!!"
저마다 한마디씩 얹었지만 내가 빙 둘러보며 비웃어주면 결국 더 나서는 이는 없었다.
괜히 앞으로 달려나왔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실패한 투자에 대한 책임을 돌리다니.]
[그래도 투자하게 된 이름값이라는게 있는 거니까.
여기서 더 나서지 않으면 딱히 건드릴 생각은 없어.]
나는 체헤게의 어깨에 앉은 애니를 살포시 들어 안았다.
애니는 가르릉 거리며 내 품에 안겼다.
"완전히 개냥이 다 됐네."
"냐아~"
접수처에 있던 자는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내가 접수했을 당시에 내게 말을 걸었던 자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헌터님... 우승을 축하드립니다..."
"아 그거? 나 늑대 아니야. 그냥 둘러대기 귀찮았거든."
"예...?"
"헌터 아니라고. 굳이 그런거 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아."
"아... 다행입니다요... 저는 여기서 일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나저나 우승 상품의 수령은 어떻게 되는거야?"
"아, 그거 말입죠.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올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테이블 위의 전자 기기를 조작했다.
뭔가 지지직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잠시 후에 위에서 점잖아 보이는 여성 하나가 내려와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여성의 옷차림은 말 그대로 입은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속이 다 비치는 얇은 면사포를 길게 늘인 옷이 몸 전체를 두르고 있었고
목걸이에는 강철로 된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보통 투견을 묶을 때 쓰는 스파이크가 달린 목줄. 딱 그런 이미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에리아. 위에서 마스터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스터?"
"그건 오시면 금방 아실 겁니다."
그녀의 나울거리는 옷은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았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수치심같은건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커진 것은 아닐 비대한 엉덩이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이질감이 느껴졌다.
양 엉덩이에는 붉은 멍 반점이 있었으며, 부자연스러운 원형을 유지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콜로세움의 운영본부를 향해 따라가면 그 좌우로 연기를 내며 돌아가는 큰 공장이 보인다.
아마 무언가를 꾸준히 태우는 것 같은 검은 연기에서는 분명히 시취가 풍겼다.
"저 공장은 뭔가요?"
"아, 저거요. 인공 장기나 신체부품을 만들고 인체실험을 하는 기관입니다.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으시는걸 추천드릴게요.
고객으로 오신다면 또 이야기는 다르겠지만요. 후후..."
"흥미는 있네요. 오늘 일정이 끝나면 들를 수 있을까요?"
"흠... 여성분이 흥미를 가지는건 되게 이례적인 일인데, 알겠습니다.
여쭤보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무실 앞에 도착하면 여성이 말했다.
"로봇과 고양이는 여기부터는 함께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잠시 맡겨주시면 저희가 안전히 보관하겠습니다."
"둘 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아니라서 까딱하면 저주받아요."
"전달하겠습니다. 아마 VIP신분으로 오신 분의 소지품을 함부로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경위 없는 직원은 없거든요."
결국 체헤게와 애니를 맡기면 콜로세움의 관리위원 두 명이 달려와 그들을 데리고 갔다.
그렇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거구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한쪽 눈에 커다란 칼자국이 있는 남자였는데, 검은 정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붉은 장발이었고, 5:5 가르마를 나눠 파마를 넣었고
뒷머리는 꽁지가 나오도록 묶었다. 피부는 살짝 분홍빛이 도는 색이었는데
온 몸에 조각같이 박힌 근육이 구스온보다 아름다웠다.
"안녕하십니까. 에리아 양, 저는 이 곳 콜로세움의 총 책임자를 맡고 있는
게비디 라고 합니다. 에리아양의 소원을 말씀하시면 콜로세움에서는 최대한 맞춰드리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물론 안건에 따라 황제께 건의되기도 합니다만은, 요즘 시대에 그런건 어렵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황제께서도 바쁘시니까 일일이 이런걸 신경쓰시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담당자를 두었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자, 그래서 소원이..?"
"구스온이 복용한 약품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예...그건 제국에서 운용하는 실험실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원하시면 샘플을 몇 개 가져다 드릴까요?"
"아 그래주실 수 있나요?"
"네, 잠시 기다리시지요. 어이, 킬레리. 다녀와. 적당히 다섯 알 정도 가져오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게비디는 나를 안내했던 여성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여성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나갔다.
"자, 그러면 소원을 알려주시지요."
"소원은 방금 이야기 했는데요?"
"아, 그 정도로 소원이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목숨을 걸고 싸운 투사에게 그에 걸맞는 보상이 치뤄지지 않는다면
그 누가 도전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저희도 사람 목숨으로 돈벌어먹고 사는 쓰레기들이지만,
이 정도 수완은 맞춰줘야 지속적으로 도전하실 것 아닙니까.
일종의 직업정신이죠."
"그럼 여기까지 오는 길에 본 공장과 실험실을 견학할 기회를 받고 싶은데요."
"흠... 그거면 충분하십니까?"
"네."
"이럴 줄 알았다면 킬레리를 보내지 말걸 그랬군요. 어차피 목적지가 같으니까요.
철저히 회원제로 운영되는 공간이라 외부인이라면 고위 귀족에게도 공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흥미롭군요. 조건이 붙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조건이요?"
"다른게 아니라, 현재 실험실에는 총 책임자 석이 비어있습니다.
얼마 전의 일이죠. 어떤 귀족에게서 낙인이 멋대로 지워졌다는 보고를 받아
각인사들 대다수가 징집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네, 바로 당신 말이죠. 이제껏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현재는 낙인을 새긴 대상이 노예의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공식 입장을 내기는 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낙인이 있었을 때도 명령에 불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국에서 낙인의 오류는 곧 이 신분제도의 붕괴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예로 산 기간이 길다고 해도 그 강제성이 사라져버리게 된다면
저들의 반란이 없으리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아시겠지요."
"그럼 저에 대해 조사를 하고 싶으시다는..?"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황제께 건의해 당신에게 귀족의 지위를 받아보겠습니다.
당신의 가치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입니다.
메카닉이며, 연금술사이기도 하며, 영기술사인 여성.
다른 남성 책임자와 같은 성노예 배급도 따로 필요 없겠죠.
원하시면 얼굴 반반한 노예를 뽑아 보내 드릴수도 있습니다만.
제 눈을 속이지는 못하실 겁니다.
오랜 시간 콜로세움에서 지냈으니까요.
당신은 연구실 책임자의 자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모험가가 되려고 했을 뿐인데요."
"상관 없습니다. 어차피 공석이니 받으시던 거절하시던 상관 없습니다.
단지 가끔 연구하신 내용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끔 내려오는 의뢰에 대한 결과를 제출하시면 됩니다.
제가 에리아 양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고 있는 이유는 콜로세움의 우승자에 대한 예우도 있지만
이런 부탁을 드리게 된 것에 대한 부분도 겸한 겁니다.
오히려 저는 에리아 양이 연구실과 공장에 관심을 가지신 점에는 아주 기쁩니다."
"그럼 알겠습니다. 직책을 맡게 되면 이후에는 사설 팀이나 개인 연구를 보장해 주시는 건가요?"
"그건 당연합니다. 그 직책을 받으시는 순간부터 고위 귀족이니까요.
다만 이제 걱정이 되는 점은 제국 안밖으로 적을 좀 만드시게 될 겁니다.
물론 저희도 그 점에 대해서는 신분의 보호를 해 드리기는 합니다."
"그 점은 신경 쓰지 않아요."
"하하하!! 제일 걱정하던 부분이었는데 시원스럽군요. 마음에 듭니다.
그러면 받아들이시는 걸로 이해해도 괜찮겠습니까?
절차상 이틀 정도 걸릴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잠시 기다려 주시죠. 여기서 대기하시다가 킬레리가 오면 약품을 먼저 한번 검토하고 계십시오.
금방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히 키가 커서 나는 모라프루사 데 브리기아타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 혹시 키가 어떻게 되시죠?"
"저, 말입니까? 2미터 16cm정도 됩니다. 오크와 엘프의 혼혈이라서요."
"아, 그렇군요..."
"오크의 육체에 엘프의 생명력이라는 조합이 생소하실 겁니다.
오크와 엘프의 혼혈아는 사산율이 높으니까요. 운이 좋았죠.
아버지는 과거 전쟁중에 우드엘프를 잡아 강제로 범했습니다.
결국 우드엘프는 아이를 배게 되었고, 그 아이가 저였습니다.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가 많았을 때니까요.
저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버려져 제국의 뒷골목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리고 1회 콜로세움의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아, 그런..."
"이곳은 낙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든 버림받은 이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선택받은 인간을 분류하는 곳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인간은 버려지고
우리는 더 좋은 유전자를 남깁니다. 종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인류라는 이름 아래에서 등급을 나누는 겁니다. 그럼... 쉬고 계십시오."
그리고 게비디는 문을 나섰다.
그가 내 앞에 접대용으로 두고 간 차를 홀짝이며 기다렸다.
맛을 보면 상당히 고급 찻잎을 사용한 건 분명해보였다.
상당히 부드러운 홍차였다. 원체 약물 내성도 강한데다가
여차하면 마력으로 역류시켜 토할 수도 있었으므로 따로 경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아주 맛있는 차일 뿐이었다.
잠시 기다리면 킬레리가 돌아왔다.
손에 약 다섯 알을 들고 돌아와서 공손하게 말했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마스터께서 미리 서류 작성을 부탁드린다고 하셨으므로
여기 서류를 작성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그녀가 내민 서류는 여러 조항이 달린 서류였는데
결국 크게 지키기 어려운 조항은 없었다.
제국에 대한 절대 충성에 대한 항목에는 체크하지 않았다.
이건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체크를 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로봇과 고양이는 어떻게 된 거죠?"
"아, 그 로봇은 창고에 들어있으며, 고양이는 임시로 보호중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벌컥 문이 열린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게비디였다.
"큰일입니다 에리아 양. 황제님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빨리 준비를 하고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갑자기요?"
"저도 당황스럽습니다만 현재 내려온 명은.... 그렇습니다.
우선 옷은 킬레리를 따라 가시면 안내해 줄 겁니다.
거기서 적당히 맞는 사이즈로 갈아입으시고, 킬레리, 로봇이랑 고양이 돌려드려."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렇게 갑자기 진행된 상황에 당황할 틈도 내게 주지 않고 나는 곧장 붙들리듯 끌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회색 빛 정장에 세로로 흰 색 스트라이프가 든 독특한 디자인이었고,
그 위로 깔끔한 배지를 달았다.
예상에도 없던 황제라니. 다소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마력에 대한 대비가 거의 전무한 수준이니까.
마법 = 마술로 치부되는 시대에서 전말 마법이 뭔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상대로
내가 진심을 내서 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체헤게도 옆에 있으니까.
정장을 맞춰입고 나서 그를 따라 로비쪽으로 걸어나가면 이미 체헤게가 애니를 들고 대기중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왜 갑자기 우리는 딸려나온거고!]
[미안, 설명할 시간이 없네. 출셋길이 꽤 휘황찬란하다고 알아둬.
우리 지금부터 황제를 만나러 갈거야.]
[오, 벌써 착잡하군, 또 무슨 사고를 친거냐.]
[할 말이 없네.]
게비디는 커다란 화물차량을 가지고 왔다.
운전사가 차를 세우고 나서 게비디가 화물 칸을 열며 말했다.
화물 칸 안에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아늑해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자신이 먼저 그 위로 올라타고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탑승하시죠."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면 그는 홱 나를 끌어들여 차에 태웠다.
체헤게와 애니까지 태우고 난 이후 차는 화물 칸을 닫고 출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