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사성과 무령 (55/303)



〈 55화 〉사성과 무령

말을 놓으라고 한 내 말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던 것일까.
게비디는 한참을 어버버 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다가 결국 변하는게 없다는 내 반쯤은 강제적인 호통에 그제서야 말을 조심스레 얹었다.


"내가 불편하고 그래?"

"아... 그... 아무래도..."


"달라진게 뭐가 있는데? 계급?"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럼 편할때 놔. 난 이렇게 할게."

"감사합니다."


"그래서 일단 성제가 올리브가 아니었어?"


"아, 성제 말입니까. 성제는 각 분야에서 최강의 인간을 차출해서 만든 팀의 일원입니다.
국경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각 국의 의뢰를 수행하는데 그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팀이라고? 단신으로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건 검성제였기 때문입니다. 검성제 외에도 근성희, 극성신, 옥성연 같은 인물이 있습니다.
이들을 사성이라고 부릅니다. 검성이니 극성이니 스스로 칭하는 이들이 많아 굳이 수식어를 붙혔다더군요.
또한 팀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일인 부대와 같은 형태로 활동하며,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승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사성을 죽이면 그 자리를 계승하는 식이죠. 계승만 성공한다면 길드에서는 1급 모험가로 인정해주니까요."

"어? 그럼 검을 다룰 줄 모르는 자가 성제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러면 결국 누구라도 다시 그를 죽이고  자리를 되찾아 오겠지요.
결국은 제일 강한 자가 다시 그 자리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보통은 그 명성을 노리고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적어도 다룰 수 있는 무기가 있는 쪽으로 도전하곤 하죠.
금방 죽고싶지 않다면 말이죠. 세상에 검을 쓰는 자는 많습니다.
경지에 다다른 이들도 있고요. 그들은 그런 자리가 아무 잡배에게 넘어가는걸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럼 올리브는 어떻게 검성이 된건데?"


"올리브는 선대 검성의 제자였습니다.
스승이 자는 틈에 그 등에 칼을 꽂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뒷이야기로는 오랜 시간 식사에 납을 섞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군요."

"그래서 실력이 부족한데도 검성제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원래 5급 모험가였으니까요. 다만 정통성은 인정받은 모양이더군요.
이번 올리브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기이한 점이 많습니다.
안카숲 한가운데 죽은 채로 묶여있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박혔다는 이야기도 있고,
마치 고대 성서의 순례자를 떠올리게 한다더군요.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건 건졌죠.
잘 나온 사진입니다. 보시면 아주 투박하게 때려박은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그를 죽인건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또 놀라운 점이라면 사진을 찍을 정도로 근접할 수는 있으면서,
이유를 모르겠지만 시체 회수 자체가 안되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회수를 목적으로 들어간 이들이 모두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했었나요."

"그런데 잘도 그런걸 들었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모든 노예는 콜로세움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어있으니까요.
제가 조사하려고 하면 어지간한 정보는 흘러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나저나 올리브를 이기셨다는 말씀은 대체 어떤 의미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이기긴 했는데, 죽이진 않았어. 사실이야."

"그렇습니까. 분명 무령께서 여기 처음 오셨을 때,
사람을 죽이고 모험가 등록이 어려울 것 같아
제국의 콜로세움을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꼬여가고 있었다.

"그래서 뭐? 여기 사람 안죽여본 사람이 어디있어?"


"하하, 그건 그렇군요."

"아니라면 아닌거야. 검성제 같은거  생각 없다고."

"분명 현장에서 거대한 로봇을 발견했다는 제보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결국  이야기도 묻혔습니다. 그런 로봇이 있을리가 없다고 콜린쪽에서
주민들이 항의했다더군요. 유레크로스 쪽에서도 콜린의 주민들 말고는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데,
그들 끼리도 의견이 모이지 않으니 결국 올리브의 죽음은 사고사로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환경 자체가 워낙에 위험한 지형임을 스스로 증명했으니 말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아마 강력한 환각작용과 더불어 공기중으로 맹독이 섞여있는  같다고 했습니다.
결국 올리브는 환각에 미쳐 스스로를 구속하고 죽어버렸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려고는 합니다.
다만 스스로를 구속하는 자가 양 팔에 모두 대못을 박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현재 상당히 뜨거운 감자인 사건입니다. 결국 주요 이슈는 로봇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검성제의 자리는 현재 공석입니다. 이거, 요직들이 다들 텅텅 비는군요.
길드에서 누구를 새 검성제로 추대할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요."


"아무래도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은데...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의견이 모이지 않았다고?"

"예, 경비병과 추격대는 로봇을 봤다고 말했고,
마을의 기술자연합은 그런 로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더군요.
저도 어저께 까지는 그런게 존재할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잘 모르게 생겼습니다."

"기술자 연합이라..."


"정보 입수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미리타엔 남동쪽으로 있는 항구는
서지스로부터 2일에 한번씩 오는 무역품과 섞여 제 킬레리들이 있으니까요."

"2일에 한번이면 상당히 자주 오는 편이네."

"해류가 그렇습니다. 역으로 미리타엔에서 서지스로 가는 배들은 멀리 돌아야 할 필요가 있죠.
그래서 단순히 미리타엔 - 서지스의 왕복 노선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서지스 - 미리타엔 - 엠페레스 - 아라카스트를 빙 돌아 무역하는 체제입니다."


"혹시 무역도 관리해?"


"아닙니다. 다만 자주 이용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 뿐입니다.
도합 4척의 배가 빙빙 돌며 순환하는 겁니다. 서지스에서 한 척, 제국에서  척,
아라카스트에서도 한 척, 엠페레스에서도 한 척. 그렇게 운영됩니다.
물론 각 배에서 떼먹는 수수료도 조금씩 다릅니다. 좆같은 엘프새끼들.
쥐콩만한 년들이 얼마나 속물인지 아시면 놀라실겁니다."

"아예 모르는 이야기는 또 아냐."


"하기는 엘프 새끼들 얼굴이 좀 반반하다고 자연이니 전통이니 씨부려대는지라 유명하죠.
노예로 들어오면 수요가 아주 높습니다. 엘프새끼들은 남자놈들도 꼴리게 생긴지라,
그쪽 취향이신 분들도 많고 말입니다."



"번식행위 자체가 안될텐데 잘도 수요가 있네.
어쩌면 정말 순수한 성욕이란 그런거 아닐까.
종족 번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거니까 본능과 관계 없는 거잖아."

"네? 저는 여성분들을 말씀드린 겁니다. 귀부인들이 주로 찾으신다는 의미죠.
아니, 물론 그런 쪽의 수요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괜히 나섰네."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자리를 옮겨 걸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앞으로 돌아오자 그 앞에는 새로운 차량과 면사포를 입고 목줄을 한 새 여성이 있었다.
이번에는 괴랄한 엉덩이나 가슴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이번 킬레리구나."


"네, 마스터."

"오래 가길 바라지."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는 화물칸을 열었다.
아마 차량도 바뀐 것인지 피가 튄 책상이나 부서진 벽은 없었다.
체헤게가 먼저 차에 올라타고 애니가 그 위로 따라 올라갔다.
내가 올라타려고 했을때 게비디는  킬레리를  앞으로 엎드리게 시켰다.
내가 그녀를 밟고 올라서자 성쪽에서 누군가가 달려나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아까 보았던 황제의 접견실을 담당했던 자였다.
그가 숨을 허덕이며 내게 서류뭉치와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허억... 무령은... 저희도 유래가 없었던지라...
허억...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고맙습니다."

"히이익...! 말을 낮춰주십시오!!!"


그는 기겁하며 물러섰다.

"어... 그래. 수고해."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허리를 90도로 팍 꺾어 인사했다.
살짝 우스웠다.
그는 내가 무안해 질 정도로 고개를 숙이다 그대로 물러났다.


"그래도 예의는 있군요. 건방지게 말을 얹었다간 그대로 던져버렸을 겁니다."

"황제의 비서 정도 되는 사람을 그렇게 막 대해도 돼?"

"황제의 비서보다 무령을 더 높게 치는 겁니다. 황제의 비서가 아무리 고위직이라고 해도
무령은 격이 다릅니다. 무령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는건 황제께서도 무령님을 타국에 내주기 싫으셨다는 의미겠죠."


"내가 뭐라고."

"아마 제가 들은 정보가 맞다면 교국에서 올리브에게 의뢰한 내용은 마녀의 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말이죠."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확신은 내린  같았다.

"종종 그렇게 오해를 사곤 해."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마침 그때 콜로세움에 거대한 로봇을 대동하고 등장한 메카닉이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낙인은 자력으로 부숴버리질 않나, 맨데일의 승인 없이 경기에 참전했다고 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중간에 내가 경기를 속행할  있었던건..."

"네, 황제께서의 배려였죠. 그리고 그 작은 가능성에 걸어본 겁니다.
마침 당신이 B조 예선중에 게타르크와 싸울 당시에 큰 소리로 외치셨었죠.
체헤게 라고. 그때 우리는 확신했습니다. 역사서의 인물이 맞다고 말입니다.
이름이 에리아인 점. 그리고 체헤게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점, 이상하게 쓰러지지 않는 점.
말씀드리죠. 당신을 연구소 총 책임자로 앉히려고  것은 제 독단이 맞습니다.
교국은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서의 인물을 주요직으로 앉히면
제국은 더 강국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이미 당신의 이름은 세계로 퍼지고 있으니까요."

"아, 그걸 피하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거였는데. 젠장."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역사서에도 당신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 외에
어떤 행적을 남긴건지는 적혀있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아마 아단척결을 내걸고 있는 교국이 아니라면,
 누구도 굳이 당신을 사냥하겠다는 어리석은 소리는 함부로 입밖에 내지 않을 겁니다.
뭐, 제국의 소속이라는 명목으로 잡으러 온다면, 그때는 제국과의 전면전쟁이겠죠.
말마따나, 제국에 그렇지 않은 이가 더 적으니까요.
구스온과 경기가 끝날 때 까지 저는 불신했습니다. 저렇게 당하는데 이길까.
정말 죽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제 의심은 기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 제안한 것입니다. 이곳은 분명 당신에게도 낙원이 될 겁니다.
유토피아는 멀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이상을 도덕이나 윤리라는 사회적 통념 밖에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 스스로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부하지 못했던 거기도 하고.
일단 그럼 돌아가면서 이 서류뭉치나 읽어봐야겠네."


"그럼 마지막으로 감히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할 테니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말 올리브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숨은 붙여놨어."


"역시..."

차에 올라탄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커피를 꺼냈다.
그리고 조금씩 따라 마시며 건네받은 서류를 펼쳐 읽었다.

서류에는 나를 무령으로 임명한다는 글을 필두로 혜택과 의무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배정된 저택의 주소와 성적에 따른 성과금, 그리고 매달 지급되는 월급의 액수와,
별개로 내게 배속된 비서의 이름 같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내가 함께 받은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작은 배지  개와 노트 한 권, 그리고 동그란 패가 하나 들었다.

"이게 뭐지?"

"그 둥근 패는 회패라고 합니다. 무령에게 지급되는 도구인데 저도 실제로는 처음 봤습니다.
즉결 처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타인의 노예를 강탈할  있는 도구입니다.
여기서 즉결처분권이라 함은 맨데일의 경우처럼 모든 사유재산과 직위를 박탈하고 노예로 강등시킴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뱃지는 계급과 직위를 나타내는 겁니다. 달아드리죠."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가 입은 스트라이프 정장에 뱃지를 바꿔 달아 주었다.
서류를 읽어보면 즉결처분권은 달에 한 번 사용가능한 도구이며, 사용 후에는 따로 보고서를 제출해야했다.
어지간하면 안쓰고 말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게비디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이 귀빈용 뱃지보다 훨씬 잘 어울리시는군요.
정장은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럼, 나도 이걸 줄게."

가방에서 뒤적이다가 TLA770A를 꺼냈다.
작은 병에 담긴 것이었다.

"이건...?"


"음, 그냥 부작용이 덜한 각성제라고 생각하면 돼.
혈관 튼튼하지? 그럼 쓸만할거야."

"확실히 제국 내에서 본  없는 약이긴 합니다.
이거라면 콜로세움의 노예들도 조금 더 투지가 올라가겠군요.
혹시 얼마나 더 만드실 수 있는 겁니까?"

이 콜로세움밖에 모르는 바보가.

"재료만 있으면 얼마든지. 다만 조금 비싸."

"그렇군요.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연구소 둘러보고, 길드로 가야지. 모험가 등록은 해야할  아냐."

"아, 그럼 우선 연구소로 모시겠습니다. 킬레리, 이걸 잘 챙겨둬.
깨뜨리면 교체다. 알겠지?"


"네. 마스터."


그는 내가 건넨 TLA770A를 킬레리에게 넘기고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정중히 숙여 내게 인사를 한다.
손을 배쪽으로 넘기는 신사다운 자세였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어 기쁘군요.
다시금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령 에리아님."

"내 이름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니 어색해.
피의 마녀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는 처음이라서."


"곧 적응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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