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버림받은 자들 (56/303)



〈 56화 〉버림받은 자들

게비디는 구원을 느꼈다.
콜로세움의 지배자로 오랜 시간 군림하며 여성 도전자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여성 도전자가 당당히 콜로세움의 문턱을 밟고, 이윽고 자신의 앞까지 온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들으면 들을 수록 묘한 여자였다.
메카닉이라니. 그래서 게비디는 즉시 대장간 출신 메카닉의 리스트와 더불어 에리아의 출신을 조사했다.

기술자들중 일부가 모험가를 동경하여 대장간을 떠나 길드에 소속하게 되면
길드는 그들을 메카닉이라고 부르곤 했다. 종종 영기술사들도 존재하긴 했지만
대장간 밖에서는 기술자와 영기술사는 철저히 다른 존재였다.
대장간 내부에서는 배척받고 소외되던 그들은 대장간 밖에서 훨씬 칭송받았다.
결국 대장간 출신들은 모험가가 되기 위해 길드에 별도로 대장간을 떠났다는 기록을 남기고,
메카닉과 영기술사로 철저히 분화되었다.

그런 리스트에 그녀의 이름이 없다는 점에 그는 당황했다.
날마다 노예들의 경기를 모니터링 하고 있으면서도 출신을 몰랐던 노예는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그녀가 늑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러나 쾌재는 다른 곳에서 찾아왔다.
그녀의 과거를 조사한 킬레리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그녀가 맨데일의 휘하에 있었으며 맨데일이 경기장에서 난동을 부린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맨데일의 낙인을 가지고 그의 허가 없이 경기에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게비디는 머릿속에서 황제가 말한 가능성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에리아, 체헤게, 그리고 거대한 로봇. 모든 것이 맞아들어갔다.
그녀는 마녀였다. 적어도 수백년간 살아오며 기록을 남겼으나 끝끝내 잡히지 않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엘프와 오크의 혼혈종인 자신의 수명에 버금가는 세월동안
에리아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콜로세움은 어찌 보면 아이들 장난임에 틀림 없었다.

그래서 게비디는 이제껏 유래 없던 참가자에게는 유래없는 규칙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로봇과 지원자의 참전을 막은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누군가 만일 에리아를 돕는다면
그가 보고싶었던 순간은 그렇게 사라져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다시 그녀를 모니터링 하며 그는 녹화한 영상을 차분히 돌려보았다.
그러다가 벤디드를 죽일 당시의 영상을 재생하던 도중, 그녀의 경기가 상당히 비정상적이었음을 발견한다.
분명히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던 밴디드가 연막이 걷히자 경기장 한복판에 누워있는 모습.
그 매캐한 연기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주변으로 붉은 전류같은 것이 튀는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제서야 게비디는 깨달았다. 모종의 이유로 그녀는 지금 전력을 숨기고 있음을.
답은 간단했다. 마녀라는 것을 들켜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하나의 결론으로 그의 사고를 도출해나갔다.
그녀가 제국에 있어야 했다.


여지껏 본  없던 강한 여성에 그는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소유욕이나 정복욕과는 그 결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최강은 고고했고 늘 외로웠다. 그는 인간보다 오래 살았으며, 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드디어 마주친 에리아의 모습은 상당히 익숙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크와 엘프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며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한 그는 주먹과 무력으로 주변의 시선을 평정해나갔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무렵, 이미 그의 주변에 그를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를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백 서른 하고도 일곱 살이 되어서였을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곳이 거기 있었다.

콜로세움.
아주 오래 전에 감옥으로 쓰였다던 그 건물을 가지고
제국의 황제가 처음으로 투기장을 열었다.
그는 홀린듯 도전했다.
아무리 강한자들이 나타나도 그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
결승전에서 만난 자도 그에게 패배해 죽었다.
그 대가로 그는 눈에 도끼가 세로로 박혀 눈을 뽑아낼 뻔 했지만 말이다.
오크 특유의 단단하고 두꺼운 피부가 아니었더라면 분명 머리가 잘렸겠지만
그는 눈썹부터 광대까지 이어지는 긴 흉터 하나로 그걸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래로 그는 콜로세움의 왕이었다.

그는 도리어 우스웠다. 이렇게 될 환경과 계기를 제공한 자들이
이제와서 괴물이라고 부르며 그를 피했다.
아마 에리아도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그들이 마녀사냥을 시작해 애먼 자들을 죽이다가,
우연히 얻어걸린 마녀를 보고 두려워 피한다니  자신 같았다.

그는 처음으로 보이는 친구의 가능성에 호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속으로는 아니라는 가능성을 끝내 가지고 있었다.
만일 콜로세움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설레발을 친 자신이 비참해질 거라고.
상당히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구소  책임자는 그녀로 인해 황제의 앞에서 목이 베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성과도 없는 주제에 자신의 노예를 늘리기에 급급해서
반쯤 병신이 된 노예를 콜로세움에 넘기는 자였다.
그는 상당히 높은 성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렇지 못한 신체와 능력으로 인해
매번 허덕이며 백탁으로 얼룩진 옷을 풀럭이며 연구소에 나타났다.
좋으나 싫으나 연구소에 찾아가 노예들을 위한 도구를 받아올 필요가 있었던 게비디는
그가 상당히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에게서는 품위가 보이지 않았다.

비록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 공간의 수장이라고 하지만 게비디는  수장으로서의 자세를 지켜왔다.
생명을 끊는 것은 즉 타인에게 행사하는 자신의 권력이었다. 권력을 지닌 자는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만나러 갈 때마다 약과 여자에 절여지다시피 해서
제대로 발음조차 하지 못하는 연구소 총 책임자는 그런 기본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화가 나서 게비디는 종종 총 책임자를 찾아가 이야기했다.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달라는 그의 말에 총책임자는 코웃음을 치고,
황제에게 그가 연구소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한다고 말했다.


게비디는 그가 언젠가 반드시 파멸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파멸을 주도한 자가 에리아라는 것을 알고 나서 왠지 호감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킬레리를 불렀다. 킬레리에게 명령했다. 다음날 있을 구스온과 에리아의 경기에서 사용할 구스온의 약품은
평상시보다 강한 것으로 제공하라고 말이다. 물론 약효가 끝나고 나면 구스온은 확실하게 파멸하겠지만
그에게는 그런것보다 에리아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차피 가짜라면 죽을게 뻔했으니까.


분명 전날 황제는 중단된 경기를 속행시키고 말했었다.
올리브와 마녀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섣불리 공개하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그가 구태여 공개하지 않아도 대중은 점차 에리아를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타인보다 먼저 비밀을 알고 있는 그라면 그녀의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킬레리는 그에게 매일 밤, 에리아가 홀로 떠들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홀로 떠든다. 그것은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와 함께 있지만 모종의 이유로 말을 하지 않을 경우와
오랜 외로움으로 그녀가 드디어 미쳐버렸을 가능성이었다.
그는 되도록 후자이길 바랐다.
다른 누군가가 그녀와 함께한다면 그녀는 외롭지 않을 것이고,
그 빈자리에 자신이 파고 들어갈 틈은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제야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만났는데 그런 사람이 손에 잡히기 바로 직전에 멀리 떠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에리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정신병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도 침착해보였다.


그는 에리아에 대해 더 많이 알아내야 했다.
 누군가보다 더. 많은 정보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그는 에리아가 상상하지도 못한 틈에 많은 것을 알아냈다.
얼마 전까지 콜린에서 커피숍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손님은 대체로 적은 편이었는데, 콜린 내부에 자리잡은 카페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맛이 좋아서 금방 부흥했다고 했고, 그러다 그녀가 도피를 시작하며 버려진 건물은
현재 헬렌이라는 여성이 그곳에서 아틀리에를 하고 있다고 했다.


분명히 기술자 연합에서 강경하게 그런 로봇은 존재할리 없다고 말했던 여자였다.
주변 이야기로는 얼마  연인을 잃었다고 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죽은 연인이 거대한 로봇을 의뢰받아 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킬레리 5명을 즉시 안카숲으로 파견했다. 배를 이용할 필요는 없었다.
올리브가 죽었다고 전해지는 그 숲의 중심에서 흔적을 찾으라고 명했고,
그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곳에서 사진  장과 성제의 부러진 칼조각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칼에 남은 피와 밴디드가 썼던 망치에 남은 피를 대조했다.
그리고 오싹한 쾌감에 몸을 떨었다.
사진 넉 장과 철조각 하나를 구해오는데 킬레리 3명이 죽었고
하나는 숨쉬는게 불편한지 헉헉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결국 이번 일에 동원된 킬레리 중 멀쩡한 킬레리를 잡고
그녀의 엉덩이에 지방주입용 주사를 놓았다.
비대하게 부풀어오르는 엉덩이를 보면서 엉덩이와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고생했다."

그는 두드렸을 뿐이지만 그녀의 여린 엉덩이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가 사진을 하나씩 확인하면  번째 사진에는 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원과
그 안에 이상한 기호로 그려진 낙서같은 것이 있었고,
 번째 사진에는 독특한 형태의 과일같은것이 한껏 물크러져 터진 것이 찍혀있었으며,
세 번째 사진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진흙에 찍혀있었다.
네 번째 사진이 바로 에리아가 콜로세움에서 던져대던 노란 부적.
발화부였다. 반쯤 흙이 묻고 구겨져 있었지만 분명했다.

"맨데일... 씨발놈이, 주제도 모르고 마녀를 건드려?
죽을만도 했군..."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는 사진을 서랍속에 챙겨넣었다.
그리고 그날 경기 결과, 에리아는 구스온을 쓰러뜨렸다.
모든 것을 알고 난 그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에리아는 이상한 음료를 마시고 나서 붉은 전류를 보이지 않게 되었음을.
일종의 억제제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시간이 점차 늘어지고 한시간 정도 되고 나서
구스온은 점차 움직임이 둔해졌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이 지시한대로
킬레리가 약을 강한 것을 제공해서 근육이 죽어가는 중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알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 곳곳에 묻은 피가 몸 중심을 향해서 모여들고 있었다는 것을.
에리아의 몸에서 붉은 전류가 튀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모든 피는 가운데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 힘이 너무 강했으므로 어쩔 도리도 없이 몸이 말려들기 시작한다.


몇 배나 확대한 화면에 비친 구스온의 근육이 일그러지고 핏대가 설 정도로 버티고 있음에도
억지로 우그러들듯 말려가는 몸을 보면서 게비디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옥성연과 누가  영기술을 잘 다루냐고 해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몇백년의 세월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그는 킬레리를 불러 말했다.


"에리아씨를 숙소로 옮기도록 진행위원을 붙여줘라."

분명 그녀라면 연구소의  책임자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이미 에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걸 본인에게 바로 밝혀서는 거부감만 쌓게 될 것이다.
어느정도 신뢰를 쌓은 이후라야 비로소 그가 계획한대로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리 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킬레리가 그에게 말했다.

"에리아가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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