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생각보다 금방 도착한 길드에 내리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그새 생각보다 많이 늘었다.
아직 뭘 딱히 한 것 같지는 않아도 콜로세움이 이들에게 내 존재를 알린 것이다.
나는 당당히 인파를 뚫고 들어가 그 가운데 자리한 접수처로 향했다.
"안녕."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그는 나와 체헤게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대답한다.
"어... 그래, 안녕... 콜로세움 이야기... 들었어... 난 네가 그렇게 센 줄 모르고..."
그의 말이 거기까지 끝나기도 전에 덜컥 내 옆으로 게비디가 나타났다.
"말이 짧군."
그가 나타나자마자 주변에서는 목소리들이 겹쳐진다.
"게비디...!"
"왜 여기에 있는거야?"
"눈 마주치지마."
"씨발..."
그들의 웅성거림역시 게비디는 한번에 일축했다.
단지 둘러보는 것 만으로 그들의 입은 조용해졌으니까.
덕분에 나는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모험가 등록이나 해줘. 다른 건 없으니까."
확실히 내 뒤에 있는 게비디가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감은 상당했다.
"이름은 에리아고, 주무기는 메카닉으로 분류하면 될까?"
"음... 그러던지."
"잠깐만... 전산이 이상한데, 왜 3급 모험가로 나오지?"
그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게비디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 말했다.
"연구소 총 책임자로 임명됨과 동시에 그에 맞는 보정이 들어가게 됩니다.
원래는 4~5급 정도로 책정되는데 능력이 인정받으신 모양입니다."
"아, 그런가? 좋네 이건."
"천천히 마치고 오시겠습니까? 먼저 저는 킬레리와 남은 잡무를 처리해봐야 할 것 같아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 잠시 머뭇거리며 체헤게와 애니를 만지작거리던
게비디가 사라지면 다시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는다.
마치 냉각이라도 된 것 같은 분위기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왜? 하던거 계속 해줘."
"어...네, 등록되셨습니다. 길드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찰나에 말투가 변한 그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빙그레 미소를 흘리면 체헤게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 분위기는 다들 알아버린 모양인데.
정말 조심해야 하는 인물이 누군지.]
[난 어색한데 너는 상당히 기쁜가봐.]
[암, 우리 마녀님이 어디서 무시당할 레벨은 아니시지.]
나의 등록을 마치고 나서 접수원이 물었다.
아마도 그건 내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생겼다기 보다는
아마 게비디가 날 대하는 태도의 차이였겠지.
"그간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못 느꼈잖아?"
"아...아니 그것은..."
"후후, 노예로 강등되기 싫으면 잘하라구."
그렇게 말하며 나는 괜히 칼라에 달린 뱃지를 들어보였다.
그도 잠시 내 행동을 바라보다가 눈이 커져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ㅁ...무...무무무....무령...?!"
"야 그래도 몰라보는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네."
"그런 분께서 어째서 저번에는 낙인을 달고...
ㅈ..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됐어. 안잡아 먹으니까 고개 들어."
그가 그 말에 안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괜히 손을 살짝 들어 그의 뺨을 톡톡 쳤다.
"잘해."
잠시 기다리면 사무실 안쪽에서 다른 접수원이 모험가용 명찰을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내게 꾸벅 인사하며 말했다.
"모험가용 명찰입니다. 소지하고 다니시고, 필요하실때 제시하시면 됩니다."
"고마워."
내가 손을 흔들려고 하자마자 그들이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는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착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 분위기를 살피면서 체헤게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것도 변화라고 칠 수 있나?]
[일종의 처세술 아니겠나.]
픽 웃고 뒤로 돌아서면 내게 명찰을 가지고 온 접수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안쪽에서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희쪽에서도 처리할 절차가 조금 있는지라."
"음, 그래."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면 너른 책상위에 사탕같은 것들이 담긴 바구니가 있고
그 앞에 작은 종이 하나 놓여있었다. 내가 그 분위기에 살짝 편안함을 느끼며 둘러보면
나를 기다린 것 처럼 앉은 상당히 나이든 노인이 하나 앉아있었다.
멋들어지게 수염을 짙게 기른 그는 콧수염이 턱수염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있었다.
"아, 어서 오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제국의 길드 조합장을 맡고있습니다.
론이라고 하죠."
"론? 혹시 롬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시나요?"
"롬, 제 여동생의 이름이 롬입니다. 상업조합의 지부장을 맡고 있죠.
말씀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참, 친절하시군요."
"고마워. 다행히도 존댓말보단 반말이 편하거든."
"우선 사죄드리겠습니다. 명찰에 표기된 직업은 메카닉일 겁니다. 제대로 분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메카닉, 연금술사, 영기술사라는 다양한 직책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가 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로봇의 존재라거나 콜로세움에서 보여주신 파이트스타일이 복합적이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무엇 하나 배제하지 않고 등록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그런건 신경 안써."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또한 방금 저희 쪽으로 들어온 연락에 따르면
연구소의 총 책임자를 맡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저희 모험가들이 종종 신세를 지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 인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내 시간이 알다시피 조금 비싸서."
"예,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측에서도 조그마한 성의를 준비했습니다만,
받아주실는지요."
그렇게 말하며 론은 내게 금으로 만들어진 유니카우의 조각상을 내밀었다.
상당히 섬세하게 다듬어진 작품이다.
"잘 만들기는 했는데 이런건 됐어."
"그러면 노예를 따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런건 나 말고 게비디한테나 전해줘. 무슨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았으니까.
나는 그냥 작은 집 하나만 구해줘. 허름해도 상관없으니까 그 부지에 내가 작은 가게 하나만 내게 해줘."
"가게 말씀이십니까? 어떤 가게를...?"
"카ㅍ...아니다, 그냥 작은 상담소?"
"상담소 말씀이십니까?"
"그래. 상담소. 고민 들어주고 해결책 제시하는 그런거."
"그런거라면 저희 길드에서 제대로 된 규모로 제작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냐, 작은 가게가 좋아. 적당히 손님 한명 정도 겨우 들어올 정도로.
그러니까 그냥 작은 부지 정도만 구해달라는 의미야."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따로 알아본 후에 연구소 측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말은 잘 통하네."
"저도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모험가 등급말인데, 낮아서 불이익이 있어?"
"있기는 있습니다. 더 상위 모험가에게만 판매하게 되어있는 장비나 약품이 있습니다만,
연구소 총 책임자를 맡으셨다고 하셨으니, 아마 그런 제약은 없을 테고,
여관이나 길드 제휴 시설에서 할인혜택은... 원하시면 달아드리겠습니다."
"그런거 말고 혹시 등급을 이유로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라거나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의 유무를 묻는거야."
"보통 그런 구역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더 높은 등급의 모험가를 고용하시고 경호 의뢰의 형태로 출입하시면 됩니다."
"오케이, 고마웠어."
"하하...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
"애들 교육 좀 잘 시켜야겠더라? 접수원이 싸가지가 없어서 기분이 나쁘네?"
말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싸하게 굳어졌다.
"제가... 책임지고 관리감독 하겠습니다..."
"괜히 나때문에 짜르지는 말고."
"예... 주의.... 하겠습니다..."
[에리아, 생각보다 잔인한 면이 있었군.]
[애를 갈궈서 뭐해. 예로부터 내리갈굼이 효과적이었어.
내 나이에 그런 자잘한 걸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를 혼낼까 그럼?]
[참 볼 수록 악취미야.]
그렇게 일을 마치고 길드를 나서면 왠지 바뀐 위치에 어깨가 올라갔다.
이게 노림수는 아니었을까.
내가 이 국가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올가미와 같은.
어떠한 불합리도 정당화하는 방식이 있다.
불합리한 구조를 통해 목끝까지 이익을 들이부어주는 것.
한번 맛을 본다면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결국 그렇게 살이올라 썩어가는 것이다.
내가 거리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맨데일과 함께 갔던 그 거리로 향하는 것이었다.
늘 같은 시각에 그곳을 통해 돌아가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서.
제국의 골목은 대체적으로 좁은 길목 사이사이로 노예들과 부랑자가 끼어있다.
판자와 누더기를 둘러쓰고 썩은내를 풍기는 이들을 굳이 쳐다보고 싶은 이는 없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자 하는 일부 귀족이 아니라면.
하지만 대개 그들도 일주일 정도 지나면 질려서 더 이상 그 일에 흥미를 잃는다.
물론 부랑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새로 교체되므로
그 귀족의 화려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늘 새로운 노예들이겠지만.
그러므로 그들은 대로변을 자유롭게 지나다니기 위한 도로를 냈다.
그래서 업무 시간이 끝나거나 대개 밖에서 자유를 누리던 이들은 그 길로 이동하게 된다.
그 커다란 철 마차를 타고.
그리고 에반제인은 늘 같은 시각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나는 그 시간을 노리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유난히 고급스러운 차가 대로변에서 아주 천천히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
난 부드럽게 손을 흔들었다.
예상대로 길을 막는 나의 모습에 운전수는 차를 멈췄다.
"비켜라! 에반제인 아가씨의 앞이다!"
그가 그렇게 외친것과 동시에 그의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더냐."
"예, 얻그제 맨데일이 데려왔었던 소녀입니다. 상당히 여유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콜로세움에서 한번 이겨먹었다고 귀족의 앞을 막는 미친년이 있다니...
제가 적당히 치워내겠습니다."
"아니다. 차를 세우거라. 잠시 이야기나 하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리고 창문이 내려오며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비치고 섰다.
"그래, 작은 아이야. 어서 오거라, 내 옆자리에 타도 좋다.
무슨 일로 날 찾은건지 들어나 보고 싶구나."
"옆에 로봇이 있어서 안되겠는데요."
"뭐라? 겁을 상실한게냐? 누구의 앞인지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게냐?
보통 귀족들도 내 앞에서 무릎을 들지 못하거늘 어찌... 어찌 소녀를...!"
"아주 천천히 가겠다고 맞춰주시면 로봇 정도는 옆에서 걷게 해도 괜찮겠죠."
"하, 웃기는구나.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너와 소녀의 사이에는 넘지 못하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겠더냐?
냉큼 이리 오거라. 순순히 예뻐해 줄때 말을 듣는 아이는 싫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운전사가 나를 위 아래로 흝어보고 말했다.
"아...아가씨... 저... 옷은...."
"무슨 옷을....아...!"
그제서야 사리판단이 된 것 같았다.
에반제인의 얼굴이 수치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곧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창피가 한껏 묻어난 채로 그녀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손하게 양 손으로 치마를 잡고 무릎을 내렸다.
"공녀 에반제인, 무령님을 뵙습니다."
"에이, 너무 눈치가 빨라서 재미 없는데요."
얼굴은 곧 창백해진다. 색깔놀이 같아서 재미있긴 했다.
"저...정말 무령님이십니까..."
"글쎄, 가짜일수도 있고."
"하긴, 무령님께서 차 없이 걷게 내버려 둔 노예가 있을리가 없지.
그..그래, 소녀를 속이려고 한 것이었다면 이미 충분히 성공했느니라!
이제 내 차에 타겠느냐?"
[체헤게, 게비디한테 연락해.]
[연락책이 있다는건 또 언제 알았나?]
[그 성격에 우릴 놔둘리가 없고, 그렇다고 나를 건드리진 못했을 것 아냐?
나무는 숲에 숨긴다고, 기계 조각 하나 더 붙인다고 네가 티가 나겠니?
걔도 아마 네 이름 알 테니까 적당히 어떻게 쓰는지 설명은 해 줬을 것 아냐?]
[그럴 필요 없다. 이거, 녹음기더군.]
[도청이었어?]
[내 허가는 받았으니 그러라고 했다.]
[하여튼 이 깡통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저 쪽에서 소복소복 걸어오는 얇은 발걸음.
발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맨발이었다.
무게는 가벼울 것이고, 질질 끌리는 소리. 분명하다.
킬레리가 오고있다.
"상황은 대강 전해 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킬레리가 그렇게 말하며 내 뒤에서 나타났다.
아직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은 것 같은 에반제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어때, 이제 정신이 좀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