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공녀와 후작 (58/303)



〈 58화 〉공녀와 후작

에반제인은 어깨에 올려진 손을 털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동공을 굴리며 킬레리에게 말했다.

"그래, 게비디는 어디 있느냐?"

"마스터께서는 지금 업무를 처리하고 계십니다.
공녀님께서는 무령께 예를 갖추시길 바랍니다."

"으윽..."

내가 그렇게 말하는 킬레리에게 웃으며 말했다.

"왜 한참 재미있었는데 그래, 가서 일 봐.
여긴 내가 알아서 해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아, 잠깐만. 손 좀 줘볼래?"

"네. 알겠습니다."


킬레리는 의아한 표정을 띄우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TLA770A를 하나 더 꺼내 주었다.

"하나 더 있더라. 이거 게비디 가져다 주면 적어도 혼나지는 않을거야.
왜 벌써 돌아왔냐고 물어보면 그거 전해주고, 내가 시켰다고 하고 좀 쉬어."

"네... 감...사합니다..."

그런 일인줄 몰랐다는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꾸벅 인사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그녀의 엉덩이도 아까보다는 크기가 좀 커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 킬레리도 아마 길어야 2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운명을 동정하는 것 외에 내가  줄 수 있는 일은...
아니, 정확히는 뭔가 해주고 싶은 일은 없었다.
그럴 필요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해 줬지 내가 뭘 더 해줘야 하냐는 그런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킬레리를 토닥여주고 돌려보내며 체헤게에게도 물었다.

[너는 어쩔래? 나랑 같이 갈래?]


[이제와서 그런걸 묻는 건가? 날 떼내고 뭘  생각인지 궁금해서라도 가야겠군.]


[이 차에는 너같이 커다란  못 탄다잖아.]


[내가 그 차보다 빠를 거라고 장담하지.]


[네가 그걸 어떻게?]

[널 안고 뛸때 대략 시속 40에서 50정도는 나오는  같았다.
이런 길에서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는 차에 비하면 훨씬 빠르지.]

[그래도 승차감이 별로잖아. 난 차 타고 갈테니까 넌 걸어오시지 그래.]


[하아... 그래,   없지. 그래, 애니는 누가 데려갈 건가?]

"애니, 이리 와."

"야옹"

애니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리고 애니를 품에 안아들고 에반제인에게 말했다.

"고양이 알러지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원하던 대로 너희 집으로 가서 찬찬히 이야기할까?"

"아... 그게...."


"뭐해? 차에 타라며. 가자."

에반제인은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나의 말을 거절할 수는 없었는지 순순히 나를 차에 태웠다.
아무래도 체헤게를 태울 수는 없다보니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지만
체헤게는 걸어간다고 설명하니 안심을 한 것도 같다.
그러나 나에게 대들지 못한다는 현실에 곧 주춤해서 그녀는 괜한 운전수에게 역정을 냈다.


"네 선에서 치우긴  네 선에서 치운다는 것이냐! 오히려 무령께 못보일 꼴만 보여드리지 않았느냐!
빨리 출발하거라! 옆에 있는 저 로봇과 속도를 맞춰서!"

"아...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차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말을 걸면 에반제인은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무령이 뭐야?"


"무령은 전사의 영혼이라는 의미로 당대 황제가 만든 계급입니다.
단순히 콜로세움의 영역이 아니라  능력 자체를 높게 친다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워로드라고도 종종 불렀다는 것 같은데, 결국 황제의 호칭을 해하는 느낌이 있다는 주장 하에
무령이라고 부릅니다. 그걸 모르시면서... 무령작위를 받으신 건가요?"

"준다니까 받은거지."

"대체... 대체 당신이 왜...?"

"자격을 따지기에는 많이 늦지 않았나? 콜로세움 우승도 했고, 게비디도 날 인정해줬는걸.
이렇게 굴면 나도  서운해?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있잖아. 아냐?"


"야옹"

"우리 애니도 맞다는데?"


 말에 살짝  손이 바르르 떨린다.
에반제인은 괜히  창문을 조금내리고 운전수에게 말했다.

"천천히 몰아라. 무령께서 멀미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하는 것이냐."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그런 에반제인을 보며 후후 웃어보였다.


"놔둬, 시간도 없는데 빨리 가고 좋지."

그녀의 눈이 옅게 떨렸다.
스스로도 아마 알고 있는  같다.
내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놀리기 위해서 이 차에 탔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목적으로 소녀의 저택으로 가려고 하시나이까."


"그냥 뭐 원하는 대로 하룻밤 정도는 놀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왜 정작 하자고 해놓고 이제와서 무서워졌어?"

"그런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뭐?"


"노예나 평민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무령님이신 것은 차이가 있기도 하고...
왠지 모를 불편함이 아직 남는지라, 그것이... 소녀가 감히 건방지게 말을 꺼낸 것이 아니온지 생각하니
스스로 창피하고 면목이 없사옵니다."

"콜로세움에서는 그렇게 꼬드겨놓고... 알았어, 그건 뭐 그럴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혹시 에반제인, 젤렌지라고 알아?"

"젤렌지? 그 후작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젤렌지 후작이라. 일단 조금  알려주지 않을래?"


"상당히 독특한 인물이라고 해도 좋은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인간혐오자라고 해도 좋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혐오자?"


"과거 유성혁명 당시에  자는 처음으로 직위를 하사받았으니까
그게 벌써 7년 정도 된 일이네요. 그 당시 젤렌지는 자작이었습니다.
자작에서 백작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옵니다."

"유성혁명?"


"노예들 중 건방진 것들이 있기 마련인지라 부모  하나라도 귀족이라면 자신의 계급을 평민으로 조정해달라고
거리의 노예들이 우르르 광장으로 몰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형식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족가의 자손으로 난 이상 성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니까요.
물론 대다수는 출신조차 모르는 자들이었으며, 출신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없었사옵니다.
대개 그들의 이름과 성은 마땅히 버려지고 숨겨지며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요.
이름은 준비되었는데 걸맞는 인간이 없었다. 혹은, 이들에게 내 주기에는 그 이름이 너무 아까웠다거나."

"이름은 혈통을 의미하는 거니까."

"결국 사건의 발단은 또 그 남자였습니다. 맨데일...
그 자가 맨 처음으로 유성혁명을 제안했던 자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그의 행적을 알고 있었고, 그 설득력과 파급적은 상당했습니다.
이름이 있는 자들의 혁명이라며 거창한 이름을 들고 일어섰지만,
그들의 주된 시위는 지나다니는 차에 투신하거나 스스로 분신해 소사하거나,
혹은 날마다 저잣거리나 주택가에서 소리를 질러대는 일이었습니다."

"확실히 재밌을 만도 했는데, 왜 아직도 변한게 없지?"

"맨데일이 저지른 4가지 실수 때문이라고 평가합니다.
우선 하나는 사람을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
결국 노예들은 그 흔한 단합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머저리들이었고,
저는 간단한 식량과 신원 보장이라는 명목 하에 배신자를 잡아냈지요.
그들의 계획은 사전에 탄로난 채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겁니다.
또한 두 번째로는 그들 스스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부러워 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 하나 잘 보는 꼴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서로를 끊임 없이 견제하기 때문에
모두가 공들여 쌓은 탑의 바닥에서 벽돌 하나를 빼려고 하는 인간은 등장하기 마련이니까요.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데, 그걸 비난하는건  과제는 아냐.
늘 쳐맞고 바닥을 기던 그 한심한 패배자들이 시류를 바꾸게 된다니까.
그리고, 넌 도전도 혁명도 해본 적 없잖아?
넌 잘 모르는 것 같아.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 전에 왜 왕관을 쓰려는지 생각해 봐."


"전 도전이라는 말 자체가 정말 저 위에 닿을 높이였는데.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떨거지들이 함부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면 기분이 나빠서 그렇사옵니다.
세상은 결과를 중시하지 않사옵니까. 과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결국 그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저는 딱 잘라 그들이 한 행동을 후대의 인간들이 결단코 이해하지 못하리라 믿었습니다.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 실패로 돌아갈 혁명에
제가 응원이라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옵니다.
왕관? 왕관은 말 그대로 최고의 한 명에게만 붙는 칭호가 아닙니까.
소녀가 살아서 왕관을 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위로 올라서야 했고,
그러기에 소녀의 나이는 너무 어리지 않았습니까.
그 어린 나이에 노예들을 위해서 왕관을 쓰는 것이 중하겠습니까?
소녀는 과감히 그들을 내치고 죽이더라도 당장 손에 꽃 한송이가 더 절실하옵니다.
소녀는 자신을 위해 산다고 단언할  있사옵니다."

"그들과 너의 도전이나 노력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른건지 모르겠네.
요즘 노력은 돈이라도 주고 해야 한다고 하던가? 결국 그들은 실패했지만 시도했잖아.
맞지? 무의미하다고 하지만 아직 기억하는 사람도 있고.
목숨을  시점에서 그들이 한 도전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봐."

"그건 이것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한건 그래서 혁명을 진압한게 젤렌지였습니다.
수도로 물밀듯 치고 올라오는 그 노예들에게 5명의 귀족이 죽었습니다.
남작 1명, 자작 1명, 백작2명, 공작 1명. 많이도 죽어났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젤렌지는 죽고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은 피로 비롯되는 것이며, 피는 생명이니 피가 부족해지면 죽는 것이다.
그렇게 날마다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그의 사병은 유달리 강했습니다.
갈가리 찢기고 도륙당하면서 노예들이 후퇴를 선택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은 종료되고 노예 부대 하나가 괴멸했다는 소문이 주를 이뤘습니다..
젤렌지는 기어이 인간의 수명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리하듯 끝은 별로지만요. 젤렌지가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체내에 피의 양이 많으면 오래 산다거나 몇분 산책을 가자는 것도 있었고,
혹은 수명이 없다고 전해지는 용족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내린 결론이 뭐야?"


"종교였습니다."

"그래, 이제야 이어지네."

"뒤틀린 욕망에서 비롯된 잔혹성이라고 보아도 될 일이옵니다.
살육 자체를 무감각하게 해오던 자가 피와 영생을 연결짓기 시작하고
그는 날마다 많은 양의 노예를 구입했습니다.
또한 그 노예들은 성욕이나 업무의 용도로 쓰이지 않았고
오랜 기간 천천히 말라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있었지요.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점차 범위는 확대되어 동물과 인간을 가리지 않았고
순결한 피만을 모아 마신다며 날마다 짐승의 피와 젖을 마셔대었습니다."


"나는 그런 연구정신은 높게 쳐. 다만 지금 이야기한 것들만 들어보면 연구 성과는 확실히 없을 법도 하네.
기본은 익히고 연구를 시작해야 진전이라도 있는 것 아니겠어."


"젤렌지는 유성혁명을 진압하고 나서 종종 여행을 떠났습니다.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산책을 가는 일이 점차 여행이라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점차 길어져 집을 비우게 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으며 동시에 미리타엔 남부의 안카숲을 비롯해
유레크로스와 엠페렛까지도 근처 국경선을 넘는 여행을 종종 하고는 했었지요.
언젠가 그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웃음을 참기가 상당히 어려웠었지요.
그마저도 결국 언제부턴가는 다 의미 없다고 말하고 다니기는 했으나 현재 상태를 보아하면
정상적인 방향이 아니라 비윤리적이고 기이한 쪽으로 과한 집착을 보인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래서 인간혐오라는거야?"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오라, 그는 수명이 정해진 것들에 대한 몰개성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곧 생명이 있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이론을 내었습니다.
그의 혐오는 단순히 대상을 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무차별적인 증오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건 의미 없는 일이잖아."

"공녀는 그런 어리석고 한심한 자의 생각은 읽을  없는지라
그 점에 대해 답해드리기는 어려울  같사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에반제인은 후후 웃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그녀의 반질반질한 입술을 응시했다.
아직 더 말하지 않은 것은 없느냐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녀는 나를 살짝 밀어내고 그 자리를 고쳐 앉으며 내게 말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옵니다.
알려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 주실 수 있으시리라 믿사옵니다."

"그럼 다른거 물어봐도 돼?  국가에서 무령이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


"의미? 권력의 크기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혹은 작위 자체가 가진 의의나 상징성을 의미하시는지요."

"글쎄, 복합적으로?"

"게비디가 이런 일은  일러주지 않는 것 같사옵니다."


"너의 의견이 듣고싶을 뿐이야. 친구잖아?"

"친구..."


"아니었어? 이런 식으로 나올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며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그녀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색한 듯 움찔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나는 누구한테 쉽게 포박당해주고 소유권을 양도해주는 타입이 아니라서 말이야.
누구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성격은 더욱 아니고. 그래서 미안하지만 네 인형이 될 일은 없을거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제안을 하려고 하는 거지.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더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바보는 아니잖아 서로? 정계에서도 어느정도 있었을  아냐?
발만 담그자고 우리. 감정 섞지 말고."


"이런 감정은 참 낯선 것 같습니다. 소녀는 어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사온데..."


"친구라는걸 이렇게 업무적으로 접근해  경험이 없다는 건가?"


"반대라고 보실 수 있사옵니다.
업무적인 관계는 익숙합니다.
다만 느끼는 것은 이 상황 자체가 금방이라도 숨을 조일  같다는 점이옵니다.
이렇게 살벌하게 조여오는 친구사이라는것은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녀의 예쁜 드레스의 프릴이 툭툭 손에 닿았다.
그 끝으로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진다.

"제가... 오늘 어떤 말을  것인지... 실수를 했던 것 같사온데에..."

"신경 꺼. 그래서 저택까지 얼마나 남았어?"


그녀는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운전수에게 카랑카랑하게 물었다.

"저택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느냐?"


"대략 2분 안밖일 겁니다 아가씨."


"흥, 더 빨리 가지 못하겠더냐. 무령께서 바깥 바람이 추우실까 걱정이다."


나는 그 귀여운 새침떼기 아가씨를 바라보며 가슴께가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계속 말해봐. 맨데일이 실수한 사항 4가지라며. 아직 두 가지 남지 않았나?"



"아, 기억하시는군요.  들려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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