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9화 〉그저 어린 소녀 (59/303)



〈 59화 〉그저 어린 소녀

에반제인이  뒷좌석에 배치한 물을 집어들었고
애먼 목이 타는건지 말없이 벌컥이다 내려놓았다.

"홍차를 준비하지 않고 뭘 한것이냐.
소녀는 물은 무미건조하여 싫다지 않았느냐!"


나는 에반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 시선을 인식하고 나면 어색하게 나를 바라보고
헛기침을 하며 물을 내려놓았다.

"커피는 좋아해?"

"아...네, 베루티노는 좋아합니다."

"베루티노? 그거 엄청 달달한거?"


"네. 그렇사옵니다."

"입맛이 어리네."


"그...그렇사옵니까..."


나는 가방에서 커피를 담은 보온병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 따라 모았다.


"에스테리카는 좋아해?"

"그건 서민들의..."


"마실만 해. 내가 주는건데 안마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마지못해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살짝씩 김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괜히 붉어진 얼굴을 창밖으로 돌렸다.

"감사합니다.."

"마셨으면 계속 해야지."


"아, 유성혁명이 실패한 이유 말씀이시옵니까.
다른 하나는 젤렌지의 등장이겠지요."


"그럴수 있겠다."

"그 자는 일이 이리 될지도 예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실패의 마지막 요소는 곧 맨데일 본인 스스로였으니까요.
 자는 본인이 주도한 혁명에서 슬그머니 빠졌사옵니다.
본인은 이미 노예가 아니기 때문인지
그들을 부추겨 반란을 주모하고는 참전도 하지 않았고
노예들의 사기는 자연히 추락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리더를 잃은 노예들의 부대. 오합지졸도 그런 오합지졸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사옵니까.
변변찮은 무기도 얼마 없는 자들이 창칼을 상대로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얼마나 버티겠사옵니까."


"그럼 젤렌지는 그 참전으로 자작이 된건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결론적으로는 그리되었사옵니다. 이후 수년간 공물과 공로를 통해
빠르게 후작으로 올라왔지만 이후로는 여행을 주로 다니며 성장을 멈추었사옵니다."

"어디로 간건지 정확히는 몰라?"


"그런 이들의 목적지는 소녀와 다르옵니다.
관심을 가지고 챙겨볼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그녀의 높은 콧대가 한껏 치켜들렸다.

"최근 한달은 제국에 있는거지?"

"그럴 것이옵니다. 그 전까지는 여행길이라 들었사오나..."


대강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불사에 집착하던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역사서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고, 그 기록이 일회성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다면.
그랬는데 기록 속의 여자가 종교와 척을 지고 있었다면
종교에 흥미가 떨어질 법도 하다고  수 있다.
그래서 유레크로스에서 나온 거겠지.
아르간티아 신은 인간에서 신이 되었다고 했으니
자신이 찾던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여긴 것일테다.
허나 정작 더 자세하고 가까운 희망을 발견한 것이고,
신을 믿기보다 나를 찾아내는 것이 빠르다고 여겼으리라.
그러면 나를 찾아내기 위해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당연히 나를 이단으로 몰아 교회에 신고하는 것일테고.
의뢰를 받은 모험가가 나를 잡으러 오는 것은 시간문제.
마침 죽을리도 없으니 안심일 것이고,
죽는다면 찾던 이가 아니거나 가설이 틀린 것이니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살던 죽던  문제는 아니었겠지.
마침 그게 성제였으니까 문제가 생긴거라고  수 있다.
당연히 성제가 되어서도 사람들의 질타가 두려웠을
올리브는 자격지심에 의뢰를 수락했을것이다.
성제로서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한거겠지.
그래서 내게 패배하고 죽이라고 그렇게 소리친거겠지.
검성제라는 자가 패배한 것은 성제로서의 끝이었으니까.
앞으로 자신에게 부과될 짐을 상상하면 죽는게 나았겠지.
마녀라는걸 알고 죽지 않을 거라는걸 알아도
이기고 지는 것과는 별개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는 중에 젤렌지는 여행을 마치고 제국으로 돌아왔고.
그 사이에 유레크로스에서는 제임스 신부가 젤렌지를 찾으러 콜린으로 온 거겠지.
그 전에 젤렌지는 서지스에서 이틀만에 배를 타고
제국으로 돌아왔겠지만.
해류를 타면 부두에까지 이틀.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한 여행이라고 할  있다.
교회 입장에서는 유달리 신실한 성도였을것이고
지인이 알기로는 유달리 잔혹한 후작일 터이며
제국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무령님? 혹시 문제라도..?"


"아니.. 없어. 괜찮아. 아마 늦더라도 내일 모레에는
젤렌지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때까지 실례를 좀 해도 괜찮을까?"


"게비디가 찾으러 오지 않겠사옵니까."

"게비디도 게비디 나름 아닐까.
일단 물어는 보는거야."

"음.. 편하시다면 그리 하시지요. 그... 친구... 니까."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그 저택은 커다란 문을 두고 웅장히 서 있었다.
체헤게까지 도착하고 나서 우리는 함께 들어가기로 했고
그 커다란 몸도 무리 없이 들어올 정도로 크고 넓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과연 사치로 도배된 곳이었다.
응접실에서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이었다.

"그런데 공녀라는건 아버님께서 공작이라는거지?"

"그렇기는 하오나,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이옵니다.
대공이셨던 아버님을 이어 대공의 자리를 받았으나
아직 미숙하여 어려움이 있사옵니다."

"미숙하다?"

"저희 가문은 대대로 담배를 유통했사옵니다.
아버님께서는 자연스레 하셨었는데..."

"대공이 담배를?"


"정확히는 담배의 유통권을 쥐고 있는 가문이라 하겠지요."

"아, 유통권. 그렇구나."

"가문의 수입은 대개 담배로부터 모입니다."

"멋진 아버지시네."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혈액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서는 같은 질환으로 누워계시는지라,
현재로서는 소녀가 가주이옵니다."


"뵈러 가자."


"예...?"


그녀가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내저으며 나를 말렸다.


"아니되옵니다! 안그래도 위독하신지라
타인을 함부로 접촉해서는 아니 된다고..!"


"걱정마. 날 믿어봐. 아니라면 명령하는 법도 있긴 한데.
대공이나 되어서 명령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 아냐?"


"그보다는 어머니께서..."


"내 직업이 뭔지 알아?
카페 사장, 의사, 주술사, 살인자, 사기꾼, 메카닉, 연금술사, 연구소 총 책임자, 상인"


"예? 카페를 하신다고 하셨지요..?"

"하나를 고르라는게 아냐. 이게 전부 직업이라는거지."


"불길한게 섞여있는 것도 같사온데..."

"세세한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느니라. 후후."

내 어설픈 귀족행세에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따라오시지요."

[체헤게는 여기 있어.]


그렇게 체헤게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나는 에반제인을 따라서 1층 구석의 방으로 향했다.
에반제인이 문을  똑 두드리면 안쪽에서는
옅은 기침소리와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들어오렴."

"손님이 있어요 어머니."


그 말에 다시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부스럭대는 소리가
잠깐 들리는  같았다.

"이제 들어오렴."


그제서야 문을 연 에반제인이 공손히 들어갔다.
그 안에는 흰 시트에 흰 이불을 덮고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상당히 초췌하고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기품과 우아함을 느낄 수 있는 여성이었고
에반제인과 비슷한 백발이었지만 윤기는 더 적어
그녀가 병상에 있음을 느끼게 했다.


"오늘은 어쩐지 어미에게 늦게 온다고 생각했더니,
손님이 있었구나 플로라."

"네. 무령님이세요."

"무령... 무령님이셨군요.
에반제인 티들렌, 무령님을 뵙습니다..쿨럭..."

그녀는  직급을 듣자마자 그렇게 인사했다.
그녀의 손수건은 이미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괴로운듯 눈은 충혈되었으며 몸은 군데군데 부었고,
식사는 오래 하지 못했는지 볼품없이 야윈 팔과 목이 금방이라도 절명할 듯 휘청였다.

"안녕하십니까. 처음뵙습니다. 에리아라고 합니다."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에리아님.
보시다시피 보잘것 없는 년입니다."

스스로를 그리 소개하는 티들렌의 손을 마주잡았다.


"괴롭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력을 흘려넣었다.
그리고 플로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가방에서 주사기를."


플로라는 허겁지겁 주사기를 꺼내 내게 되물었다.

"뭘 하면 되겠사옵니까."

"내 팔에 꽂아서 10ml만 뽑아줘."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황해서 품위유지조차 안되는 그녀에게 웃으며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괜찮아.  걱정은 말고, 편한 곳에 꽂아."

그렇게 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에서 따끔함이 느껴지고 곧 지나지 않아서 따뜻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됐어요 10ml!"


나는 그녀에게 주사기를 받아들었다.
등은 따끔함이 가시기도 전에 회복되었다.
주사기를 받아들고 티들렌의 손등에 주사했다.

"피를..!"


플로라가 놀라는 것은 아주 잠시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피가 주사된 팔의 혈색이
확연하게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몸에서 붓기도 조금씩 가라앉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어..?"


"내 피는 마력 반응성이 높아서 정화마법이 잘 들어서
회복이 빠를수밖에 없고, 자체적 회복력도 높습니다.
더욱이 O형이라 큰 거부감도 없을겁니다.
내가 하는건 피의 순환을 가속시키는게 전부."


살짝 땀을 흘리며 허덕이기 시작하는 티들렌은
조금 덥고 답답한지 이불을 살짝 걷어낸다.
그걸 내가 집어 다시 덮어주었다.

"조금 덥더라도 참아요."

그녀들은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손목부터 번져가는 생명력이 그녀의 마른 팔을
천천히 살려가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엄마, 팔은 괜찮아?"


"그래 플로라. 훨씬 편한 것 같구나."


나는 그렇게 대화하는 모녀를 두고 가방에서 약을 꺼낸다.
알약 형태로 된 TAG-14호였다.
그걸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삼키고 나서, 몸이 어느 부위가 답답한지 말해줘요."


그녀는 상당히 순종적으로 약을 삼켰다.
그리고 침착하게 손으로 몸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랑, 여기랑, 여기도 그렇습니다."


대충 진단은 끝났다.
악성 림프종이겠지. 팔이며 가슴이며 꽉 틀어막으니
부어오른 곳을 빼면 서서히 마를수밖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지목한 부분에도 미세하게
피를 조금씩 주사한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연히 그녀의 얼굴은 밝아졌다.

"다 됐어요. 아프거나 힘들때는
교회에서 사람을 불러서 정화마법을 걸어달라고 하세요.
딸이 가져다준다고 아무 피같은거 마시지 말고."

"그...그걸 어떻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어요.그냥 어쩌다 보니까.
푹 쉬고 나오세요."

나는 아직도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며 눈물을 닦는 플로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가자 플로라. 아, 플로라라고 불러도 되지?"

"네...!"

우리는 체헤게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굳이 환자를 만나고  소감은?]

[환자같은건 없었어.]


[늦은건가? 아니면 거짓말이었나?]

[내가 도착한거지.]


[잘 했다.]

[왜 도와줬냐고  물어봐?]


[생각이 있었겠지. 너는 많이 변했으니까.
그리고, 나는 너를 긍정하기로 했으니까.]

[허세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니 플로라가 나를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보료라고 생각해. 들은게 많으니까 도와주는거야.
너도 기억하라고. 정보는 돈이 돼."


"혹시 제가 어머니께 피를 먹인건 어떻게 아셨는지요?"


"뻔하지. 젤렌지의 이야기도 들었겠다.
피는 생명이라고 했고.
이전에 분명 노예로 처녀만 들인다고 했지?
너 그거 혹시 모를 성병을 걱정한거 아니야?
성병은 대개 피나 점막으로 감염되니까.
그렇게 많은 처녀를 들여온 여자가
이제와서 신체 접촉에 낯선 반응을 보이고,
저택에는 노예가 보이지 않아.
마중나올 집사 하나도 없을 정도로 노예를 산거지?
수혈받고 피도 먹일 목적으로."


"예리하시군요."


"그 노예들은 일이 끝나면 살려보냈지?
남 몰래 말이야. 노예를 먹여살릴 자본도 없을 것 아냐?
아까 담배 유통권을 받았는데도 미숙하다고 한건
지역 상인들을 말로 이길수가 없어서 밀린걸테고.
점점 수입이 줄어가는데 슬슬 버티긴 힘들고?
아마 걔들은 대공가는 이거 하나 없어도 괜찮지 않냐고
너를 닦달했겠지. 너는 그걸 부정하지 못했고.
아버지가 이룬 일들이 모두  대에서 말린것 같으니까.
그걸 티내기 싫었을 거야. 맞지?
덕분에 강한척을 하게 된 거겠지?
그래서잖아. 내가 왕관 이야기를 했을때
 스스로가 중요하다고 한거. 그때 눈빛이 흔들렸던거 알려나 몰라?
당황하면 연기도 못하잖아."


"....."

거기까지 말했을  그녀는 내 품에서 울었다.


"네...맞아요.... 흐윽....흐어엉...."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편히 울어. 고생했어."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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