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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화 〉소녀의 사랑 (62/303)



〈 62화 〉소녀의 사랑

그런 날이 있다. 왠지 모르게 모든 일이  풀리는 날.
플로라는 그게 오늘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단에게 밀려 헐값에 담배의 유통을 허가하고 말았던 그 저녁.
우연히 집으로 돌아가던 중, 불쾌한 인상의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도 알지 못했다.
계급의 차이가 있으므로 화를 내지는 못하지만  눈은 당장이라도 내게 따지려고 드는 눈이었다.
불쾌함이 허리에서 스멀스멀 퍼져나갔다. 안그래도 피곤한 날이었기에
적당히 이야기나 들어보고 내치자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꺼낸 이야기는 더욱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일에 트집을 잡아 자신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종종 담배의 유통을 반 강제로 허가하며 그 대가라고 받아온 환.
그녀에게는 아무 짝에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주로 필요한 자에게 팔아 자금을 충당했다.
그렇게 넘겨준 것이었는데, 이제와서 그게 문제라고 해도 그녀는 해 줄게 없었다.

일단 얼굴이나 보자고 생각해서 본 노예의 얼굴.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수수하다고 말할  있었지만 아름다운 금발에 예쁜 눈.
화라고는 낸 적이 없을 것 같은 부드러운 눈매가 너무 끌렸다.


"그래... 마음에 드는구나... 확실히 조교하는 맛이 있겠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안타까웠다.  자에게 넘어간 노예는 대개 망가져버렸으니까.
구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어머님을 위해서는 소녀가 필요했으니까.


"얼마로 구했ㄴ... 아니, 네가 노예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남자는 아니었지.
그래, 얼마면 이 아이를 내게 넘겨주겠느냐?"

다소 억지를 부리기로 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저 아이는 구해야 했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면 행동은 간결했다.
자신은 공작이니까. 못해도 평민인 맨데일이 자신에게 기어오를 일은 없을테니까.
가격을 생각하면 무리가 있긴 했으나 어설프게 노예시장에서 처녀를 찾는 일보다야 확실히 저렴하리라 믿었다.


"네...?"

"얼마면 이 아이를 넘기겠냐고 물었다."

그의 얼굴에 짧은 당황이 피어났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과연 얼마를 부를까. 1캐럴? 2캐럴?


"그년은 메카닉입니다. 더욱이 기존의 약물로는 조교 자체가 불가능하고, 얼굴도 반반한 년입죠.
못해도 3캐럴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3캐럴.
아득했다.
정말일까?
그제서야 그녀의 뒤로 따라붙은 거대한 로봇이 보였다.
정말 노예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빠르게 머릿속이 회전한다.
분명 여행자일 거고, 맨데일에게 잡혀 노예가  거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쉽사리 넘겨드릴 수야 없지요. 사지 않으신다면 제가 정성들여 맛을  뿐입니다."

그녀는 사내가 자신을 깔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많이 곤란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물리기에는 너무 일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에게 치부를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점도 컸다.
이제와서 물릴 수는 없었으므로 최대한 이용할 생각을 하기로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녀인지는 물어야 했다.
혈액은 그녀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건방진 것. 나를 뭘로 보는게냐? 3캐럴은 어렵지 않게 준비해주마.
이 아이, 경험은 있느냐?"

"처녀입니다. 제가 건드리지 않았으니 확실하겠죠."


다행이다. 어머니께 드릴 피는 뽑을 수 있을  같다.
괜한 성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대가리가 장식은 아니었나 보구나. 처녀가 아닌 아이를 내게 팔려고 하는 자는 없었느니라.
꼴에 성욕에 지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남아있었다니 답지 않구나 맨데일."

"하하하!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닐 겁니다. 온갖 약물을 빗겨가는 년입니다.
그 어깨에 남긴 낙인말고는 다룰 방법도 없죠."


그런건 어찌 되던 상관 없었다. 그러나 내심 걱정은 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낙인을 지울 방법같은건 몰랐으니까. 늘 새기는 법만 배웠지 지우는 법은 몰라
일부러 노예를 아무리 사도 낙인은 쉽사리 찍지 않았었다.
어차피 금방 놓아줄 생각도 있었으니까.

"그래, 낙인.  낙인은 어떻게  것이냐? 이게 있다면  소유라는 의미가 아니냐?"

"아, 그거야 그 영기술사에게 지워달라고 하시지요. 아가씨가 데리고 계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주둥이 하나는 열심히 놀리는구나. 좋다. 메카닉이라고? 확실히 흥미가 동하는구나.
이번 한번은 너그러이 용서해주마.  번은 없다."

그녀가 각인사를 데리고 있지 않은걸 안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긴, 그녀가 낙인을 찍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으니 이제는 어머니도 모르는
황제와 자신의 비밀이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내일 오후 6시에 내 저택으로 데려오거라. 그동안 행여 손이라도 댄다면
그 손모가지째로 도려내 가죽을 벗겨 박제해줄테니 허튼 짓을 꾸미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호호호... 좋은 아이야. 보면 볼 수록 탐이 난다. 오늘의 추태는 이정도로 넘어가주마.
자, 가자!"

두려웠다. 이제부터 3캐럴을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인물들이 처녀를 팔겠다고 데려온다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도 난처했다.
결국 그녀가 더 독해지는 것 말고는 방법은 없어보였다.
그녀는 숨을 얕게 뱉고 생각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해지자고.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맨데일은 약속한 시간에 소녀를 데려오지 않았다.
화가 났다. 공녀인 자신을 속였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돈다.
그녀가 그걸 깨달은 순간은 우연히 콜로세움에 입장한 후 였다.
그날따라 묘하게 몸이 무거웠기 때문에 그녀는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거리로 나오면 사람들이 괜히 웅성거리는 것이 신경이 쓰이지 않을리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원인이 콜로세움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콜로세움의 과열된 분위기에 눈이 갈 수밖에 없었고 그녀가 객석에 발을 들이고 본 장면은
막 체스커가 경기장을 헤집던 시점이었다.
그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던 남자였다. 지난 달 까지만 해도 종종 담배의 유통을 허가받으러  상인들과 함께 서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역시도 버림받은 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설프게 착한 짓을 하려 드니까 좆되는거지."


옆 좌석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킬킬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에 자신도 해당하는 것 같아 괜히 그녀는 기분이 나빴다.

"입 조심하거라. 확 찢어버리는 수가 있느니라."

"뭐?  뭐하는 년ㅇ...딸꾹..."

두렵지는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곧 보증 수표와 같은 거였으니까.
그가 표정을 보고 말했다.


"ㅇ...에반제인...!"


그가 그렇게 말하자 마자 주변에서 살짝 기류가 싸늘해진다.
그가 도망치듯 경기장을 빠져나가면 에반제인은 그 자리에 툭 앉았다.
B조의 경기가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회자의 큼직한 마이크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왜 저 아이가 저기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에리아였다.
그제서야 보게 된 그녀는 정말 맨데일이 말한 것처럼 메카닉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더욱이 독특한 유리병을 휙휙 던져대는 모습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자꾸 욕심이 생긴다.
그녀의 오랜 생각 어딘가에서 욕망이 꿈틀댔다.

'이제껏 열심히 참았으니까, 이제 나도 보상을 좀 받아도 되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은 빠르게 전염되듯 발끝으로 퍼져갔다.
자신과 다르게 겁이 없고 스스로 도전했으며 기어이 승리를 쟁취하려 하는 모습이
에반제인 플로라의 눈에는 한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껏 제국 밖을 떠나지 않은 그녀에게는 처음으로 보는 '특이한' 노예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자신에게 넘길 바에 콜로세움으로 내몰아버린 맨데일을 용서할  없었다.
그녀의 걱정이라도 읽은 것일까. 에리아는 지지 않았다.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잘 싸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플로라의 눈에 비친 것은 미묘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같은 연기.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그 누구도 그녀와 같은 의문을 표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회자의 입에서 퍼져나온 뜨거운 울림은 에리아라는 이름을 똑똑히 그녀의 귀에 새겨넣었다.

그녀는 취해있었다. 왜 사람들이 콜로세움에 열광하는지   같았다.
입장료로 낸 금액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돈이 있었다면, 그녀를 바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조금 더... 그랬다면...
머릿속으로 이상한 광경들이 흘러들어왔다.
기묘한 열기와 가시지 않는 흥분이 흘렀다. 잠시 멍하니 생각에 몸을 맡기면
언제 들어온 것인지 맨데일이 경기장 한가운데서 화를 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에리아를 사지로 내몰아놓고 이제와서 아쉬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짜증이 난다. 그렇게  명의 노예를 죽였는지 자신은 잘 알고 있다.
좋던 싫던 자주 만나야 했던 인물이었으니까.
아버님의 오랜 친구 태글리만이 그렇게 은연중에 지위가 내려간 이유는 저 자 때문이라고 했다.
태글리만은 늘 맨데일의 헛소리를 믿지 말라며 지인들에게 꾸준히 돈을 써가며
언론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아버님은 그걸 로비라고 불렀다.
 보고 있기가 싫었다.

"경기를 진행시켜라! 첩의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고!"

그래서였을까. 이내 참지 못하고 외친 울림에 관객들이 동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플로라의 시선을 바라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꼬리를 말았다.
그리고는 곧 경기를 속행하기를 바랐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제 그녀가 할  있는 일은 하나였다.
에리아를 죽이지 않는 것. 우승시키는 것.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에리아의 우승이 확실시 되고 나서야 그녀는 곧장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아직 콜로세움 내에서도 후발 주자는 등록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감까지 남은 자리가 얼마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소녀는 무조건 그 자리를 채워야겠다.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냐?"

"룰이 그렇습니다. 혹시 게비디님과 연락이 닿으시면 말씀을 해보시는건 어떠신지요?"


"게비디... 그래, 알겠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자를 금방 데리고 오겠느니라."


그녀는 주머니를 털었다. 나온 거라고는 수중에 여유금으로 가져온 1캐럴과 84델 정도.
물론 여유금 치고는 과하게 많았다. 곧장 콜로세움 입구의 도구상으로 향했다.
도구상의 옆에는 용병 고용소도 딸려 있었다.
콜로세움과 같은 거대한 유흥산업에는 부가산업도 많이 부어있으니 말이다.
용병 고용소에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1캐럴에 콜로세움에 도전할 강한 자를 찾는다."

1캐럴이라는 돈에 너도나도 일어났다가 콜로세움이라는 이야기에 다시 무릎을 접는 이들을 보면서
플로라는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때  멀리 앉아있던 자가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하죠. 1캐럴은 확실히 주셔야 합니다."

"좋다. 바로 따라 나오거라."


그녀는 선금으로 1캐럴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콜로세움의 접수처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는것은 매몰찬 거절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에반제인 공녀님... 이미 신청자가 나타났습니다."


"소...소녀가 분명히 자리를 비우라고 하지 않았더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아..."


플로라의 한숨이 이어지고 뒤에서 조용히 남자가 말했다.


"캐럴, 돌려드리죠."

"괜히 그럴 필요 없느니라."

그녀는 허세를 부렸다.
여기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걸 돌려달라고 했다가는 얼마 없는 명예마저 실추될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도구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반적으로는 소모품 정도나 팔고 있는 그 가게는 '고객'을 대상으로 전용 매장을 열어주곤 했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그 곳의 고객이 되었다.


자의는 아니었다. 아마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담배의 유통 허가를 조건으로 그녀에게 제시한 고객등록.
설마 그녀가 진짜로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찾아오더라도 구입할 물건은 없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억울한 표정에 눈물이 살짝 맺혀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찾아왔다.

"가게를 열어라."

"이...이쪽으로 모시지요."

그녀는 주저 없이 물건을 둘러보았다.
너무  것, 너무 약해보이는 것은 피했다.
무거운 것을 휘두르기도 어려울 것이다.
투척용이라면 더 좋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찾아보니 적당한 물건이 있었다.
연막탄. 개당 50델이나 하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아, 반경 100m이내로는 검은 연기로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좋은 물건이죠."

"그..그래! 이걸로 다오."


그녀는 피같은 돈을 그렇게 썼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충동에 눈이 멀었다는 건  자신을 두고 하는  같았다.
그래도 여유자금이니까 괜찮아, 가문을 유지하는 비용은 따로 빼뒀잖아.
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리고 불끈 쥔 손을 펴고 콜로세움으로 돌아갔다.

달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된다.
에반제인가의 장녀, 대공가의  에반제인 플로라가 고작 콜로세움 경기에 연연한다니.
그런 것은 있어서는 안된다. 물론 어차피 어떤 식으로 평이 퍼지든 절대적인 피라미드를 뒤집을 이는 없지만
왠지 그렇게 소문이 퍼져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도 살풋 배어있는 초조함은 그녀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그날 콜로세움 주변을 서성이던 그녀는 몰랐지만  표정과 행동은
상당히 고혹적이고 도도하던 에반제인 플로라의 다른 모습을  기회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점찍어 출전시킨 노예가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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