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화 〉소녀의 사랑 (63/303)



〈 63화 〉소녀의 사랑

플로라는 이미 C조의 경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맨데일이 우승하게 될 거라고 이미 느꼈다.
아직 빨리 걸으면 복도 끝에서 그녀를 마주할 것이다.
플로라의 생각은 이미 그것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익숙한 실루엣은 잊혀지지 않았으니까.

"에리아라고 했었지."

"아, 에반제인님."

"에반제인님이라, 그냥 아가씨라고 불러."

큰일이다. 혀가 꼬이기 시작했다. 아가씨라고 부르거라.
 간단한 연기가 왜인지  되지 않는다. 벌써 몇 년을 연습했는데.


"그러죠. 어떤 일로 오셨나요?"


"어떤 일? 나는 에반제인이야! 일이 있어야 노예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란 말이다.
건방지구나 노예주제에.  볼수록 맨데일에게 어울리는 아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감사드립니다."


그 인사는 플로라의 가슴을 아주 깊게 쑤시는  같았다.
이 여자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괜히 속이 메스꺼워질 것 같아서였다.
꾸욱 참았다. 까딱하면 심장을 토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너에게 제한을 하려고 하느니라."

"제안 말씀이신가요?"

"그래, 내게는 솜씨 좋은 검투사가 있느니라. 고용된 관계가 아니라 주종관계지만 말이다.
확실히 이 콜로세움에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몇 없겠지.
그가 너를 지켜줄거다. 너는 마지막에 그를 밟고 올라서서 내게로 오면 되느니라.
신분을 끌어내리지는 않으마. 단지 하루 정도 함께 즐기자는 의미다."


왜 그런 소릴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준비했던 검투사는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입이 멋대로 그렇게 말해버렸다.
멋대로 떠드는 입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는 이 거짓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그녀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잠깐정도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괜히 보이는 그녀의 동공이 어딘가 차분해 보이는 것이 플로라를 당황스럽게 했다.


'혹시 이미 에리아는 결정을 마친 것은 아닐까. 나를 거절한다면 이후에는 어쩌지?'

그런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빙빙 떠다니며 이렇게 포기하겠느냐고 반문해왔다.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생각해 보거라. 아무에게나 이런 기회를 주지는 않느니라."

"그건  알고 있습니다."


숨이 턱 막힌다. 대체 왜...? 빨리 생각을 해내야 한다.
어느새 로봇은 고양이를 데리고 사라져 있었다.
이제는  둘의 심리전이라고  수 있었기에 오히려  손에 힘이 들어간다.
메모한 내용을 복기하듯 손을 빙글빙글 돌렸다.
머리를 굴려야 했으니까.

"알고 있느냐? 너의 가치는 이제껏 없던 수준이다. 여성 노예에 메카닉.
게다가 콜로세움에서 게타르크를 쓰러뜨리면서 능력 또한 증명되었지.
내가 섣불리 제시했던 3캐럴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지금  밖에는 얼마라도 너를 구입하려고 하는 자들이 지천에 널렸다.
다 너의..."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아랫배를  찔러보았다.
자궁이다. 찔린 손가락은 무색할 정도로 힘이 없이 떨어진다.
아직 벗지 않은 몸에 딱 달라붙는 고무재질같은 옷이 손끝에 스치면
말랑말랑하고 동시에 매끄러운 질감이 느껴진다.
분명 에리아의 자궁을 찔렀는데 달아오르는 것은 플로라였다.

"이걸 노리는 것일게다. 잘 처신하거라. 그리고 내 제안을 받건 거절하건,
나는 네가 우승하기를 바라고 있느니라."


"저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주시는 이유가 뭐죠?"


"음... 그냥 가지고 싶었다고 해야겠구나. 원래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그곳에 신경을 쏟아 최상의 상태로 수확하기를 바라는 법이니라."

플로라는 빙그레 웃었다. 느낄 수 있었다.
에리아는 운명이 이어준 거라고.


"그럼 저는 이만 가봐도 될까요?"


"아니, 아직 하나 남은것이 있다."

에리아의 어깨를 열어젖힌다.
선명한 낙인이 있었으니까.
플로라가 만든 것보다 확실히 약했다.
빛도 연했고 무늬도 그닥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사라져 있다.
플로라는 입에 침을 바르듯 혀로 입술을 훔치고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그녀가, 에리아가 우승하게 되더라도 찾아갈  있도록
무언가 연은 이어놓아야 했기 떄문이다.
이대로 헤어져서는 그녀에게 남을 자신의 인상은 이상한 귀족 변태 정도로 남을 테니까.
그렇다고 변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플로라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다만 그녀를 속일 아량으로 플로라는 거짓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역시나."


"음...."


"아느냐? 너에게 새긴 낙인을 만든자는  전속 각인사로,
이 나라에서는 이 자 이상의 실력자가 없지."


"그렇습니까?"

"그래, 이 나라의 황제의 눈에 나서 내쳐진 것을 내가 고용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런 자가 새긴 낙인을 일개 메카닉이 풀었다?
그럴리가 없다. 맨데일을 어떻게 속여넘긴 것이냐?"

자연스러웠다. 자신의 스펙을 자연스레 어필하며 플로라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덮었다.
 혀가 자신의 것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상대는 자신에게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녀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에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에 따라 휘두르던 눈이 정착한 에리아의 입술은 너무나도 맛있어보였다.

"속이다니요?"

"네 팔에 새겨진 문양이 그리 간단히 지워질리 없다.
낙인이 새겨지지 않는 경우는 노예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을 때 뿐이다.
이 경우 낙인은 사라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너는 어깨에 낙인이 있었다. 내가 확인했느니라. 거짓을 고할 생각은 말거라.
그러나 그걸 것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럴리 없느니라.
즉 모종의 방법으로 그대는 낙인인 척 어깨에 문양을 새겼다는 의미겠지. 언제든 지울  있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대는 애시당초 노예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뭐지?"


알고 있는 내용을 복기해냈고 입으로 흘리고 있었다.
말해놓고 나니 그제서야 머리가 따라가기 시작한다.
몸이 기억하는 지식을 읊고 나니 그제서야 그녀의 낙인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노예가...아니다? 콜로세움에 도전했는데 제국민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라면,
답은 늑대 뿐이었다.


"소원을 빌고 싶었으니까요."

그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플로라는 알 수도 물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진정성있는 조언을 건넸다.


"그런가. 그렇다면 낙인이 애초부터 없었으니 맨데일의 허가 없이도 등록이 가능했겠구나.
황제가 들어주는 소원은 제한적이다. 너의 소원은 최악의 형태로 이루어질게 분명할 터인데,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콜로세움에 도전했다는 건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이겠지?"

"...."


목적같은거, 자신이 이뤄줄 수 있는데. 그저 몸만 오라고 말했으면 되는데,
자신은 뒤늦은 결심에 후회하면서도 한마디  줄수 없었다.
주머니속에서 잡히는 연막이 애처롭게 굴렀다.
에리아는 몇가지를 더 물었다. 기껏 생각한 가능성, 늑대는 그렇게 부서졌다.
정신을 파리면 눈 앞의 에리아가 묻고 있었다.


"저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주시는거죠?"

그녀는 겨우 무거운 입술을 뗐다.
옅은 기름냄새에 섞인 피와 꽃향이 섞인 냄새가 공기중으로 퍼졌다.
에리아의 상태를 다시 바라보았다. 고생했구나. 그게 한 눈에 느껴진다.

"글쎄다. 저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과 같은 목적이다.
너에게 반했기 때문이고, 너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내가 싫으냐?"


"아뇨, 어설픈 사상으로 불가능한 걸 밀어붙이려고 하는 교회의 머저리들보다는 좋아합니다."

교회... 제국은 교회를 혐오한다. 단순한 혐오가 아니라 배척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플로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에게 같은 권리와 책임을 강요하는 교회를 제국이 반길리 없었다.
결국 교회에서도 본성은 같지 않은가. 포장만을 번지르르하게 하는 족속들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만일 진정으로 그게 아니었다고 하면 아직도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계실리 없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와 통했다는 사실 자체가 플로라에게는 소소한 기쁨이었다.


"건방진년. 마음에 들었다고 웃어주었더니 밑도 끝도 없이 무례하구나.
너를 길들이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웠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나, 교회의 머저리라는 말은...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플로라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멈출  없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결국 계급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게 사라지는건 아닙니다.
결국 효율을 추구하면 인간은 계급사회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부정하려 드는건 바보라고 해야겠지요.
중요한건 그 계급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아닐까요."

"미친년. 하하하!! 다른 자 앞에서도 이런 소리를 하였더냐?"


"아닙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굴러온 돌과 박힌돌 이론이 있었으니까.
결국 썩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그래, 조심하거라. 다른 이가 들었다면  머리가 두번 다시 목에 붙는 일은 없을테니.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구나. 자, 받거라."

그녀에게 주머니에 있던 연막을 건넸다.
줄  있는게 이런게 전부라서 조금은 미안하고, 또 부끄러웠다.
다른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
만일 그들이 에리아를 만났다면 나보다 더 많은 양의 돈은 줬겠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은  내가 선택한 자가 결핍해짐을 이르기도 하는 것이다.


"연막이니라. 위급할 때, 그걸 던지면 내가 준비한 용병이 도움을 줄게다."

"도움...알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기억하거라. 그 순간부터 너는 나와 떨어지지 못하게 될 테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쓴 우승의 축포 값은 받아내고 말리라 하는 욕망의 반증이었다.
어떻게든 이런 식으로 인연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아 만들어낸 얕은 속임수다.
이젠 에리아의 선택과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묘한 확신과도 같은 감정은 생겼다.
연민이나 동정과는 다른 감정.
이제껏 느낀  없던 그 감정은 아주 무겁고 버거운 것이었다.

보고싶다 안고싶다 같은 일차적 욕망에서 벗어난 복합성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깨달았다.
에반제인 플로라는, 에리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 성적으로.
그 표정을 들킬 것 같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 자신은 내일도, 그 다음날도 이렇게 찾아올 것 같았다.


자신은 표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있을까.
되풀이된 의문은 이윽고 하나의 결론으로 떨어진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그녀는 연막을 건네주고도 에리아의 대기실 주변에서 괜히 서성였다.
에리아가 떠나고  이후에는 즉시 콜로세움의 자리로 돌아가서 경기를 시청했다.


사회자가 바뀐 경기의 룰을 알릴때 내심 속으로 안도했다.
새로운 룰이 자신의 한심한 실수를, 변명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곧 에리아가 바뀐 룰에서 로봇을 데리고 출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게 되고 나니 놀랍게도 다른 경기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확신했다.
그런 사랑을 하게 된 스스로를 연민하며 그녀는 죽음속에 피어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경기가 끝나갈 쯤, 그녀는 연막을 터뜨렸다. 연막에 가려 에리아는 그녀를 보지 못한다.
플로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그러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도 경기를 볼 수 없었으니까. 연막이 걷히고 나서 플로라는 떨리던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킨다.
손은 어느새 말아쥔 건지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죽다 살아난 얼굴을 하고 경기장 가운데서 피를 닦는 에리아를 보고
플로라는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더러운 귀족이라는 말을 통감했다.
고통을 이겨내고 겨우 서 있는 에리아의 애처로운 모습에 이제껏 없을 정도로 흥분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에리아의 대기실로 달렸다.

"에반제인이야.  열어."


그녀가 말했다. 설렘이 담긴 목소리에는 품위가 없었지만
그건 이미 그녀의 통제를 떠난 것이었다.


"그래, 역시 내 도움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했느니라."

"덕분에 목숨을 빚진 셈이네요."

"그래, 나에게 고마워 하도록...이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고용한 검투사는 없었어.
갑자기 룰이 변경되는 바람에 들어가지도 못했으니까. 그건 내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내는 행동이었다고.
너는 알고 있었겠지? 미리 룰이 변경되어 다른 사람이 참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네."

그렇게 말하며 내면으로 기쁨을 삼켰다. 그러지 않으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쏟아지고, 흩어져버리고 나면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을테니까.

"하아... 그래, 그럼 대체 그 연막 안에서 뭘 한것이더냐? 빨리 나에게 말해보아라."

"심장에 말뚝을 박았어요."

"뭐? 야만적이구나. 그건... 마치 고서적에 나오는 흡혈귀라도 잡는  같지 않으냐.
연막값을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아무리 보아도 너는 놀라운 아이다. 나를 이런식으로 농락하는 아이는 없었거늘.
무엇 하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느니라. 그래서 소녀, 너에게 명한다.
살아 우승하거라, 그리고 나서 나를 찾아오는게다. 내 너에게 지위를 주마."


"필요 없어요."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금방 받으면 실망할 것 같았다.
자신이 알던 에리아는 그런 가벼운 여자가 아니었으니까.

"걱정 마라, 널 구속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잠깐의 여흥을 즐기자는 것이지.
너도 원하게 될 것이니라. 보아라, 아름답지 않으냐 네 눈에 비친 나는."

치마를 가볍게 들었다. 혹시 이렇게 될까 싶어서 일부러 챙겨입은 옷이었다.
살면서 이제껏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탐내던 몸이던가. 일부러 가문을 실추시키고 플로라를 가지려  자들도 많았다.
자신의 외모가 뛰어나다는 것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여자가 보아도 확실히 그녀는 대단한 여자였다.


"그래,   보아라.  머리에 소녀의 인상을 깊이 남기거라."

나를 떠날  없게. 라는 생각을 기꺼이 삼켰다.
그녀의 눈에는 이글거리며 깊은 고요속의 정념이 타오르고 있었다.


"참, 당신은 귀여운 사람이네요."

멈칫.
그대로 얼어붙었다.
귀엽다니. 이제껏 자신이 들어온 칭찬은 그런 것과는 달랐다.
그런건 이제껏 느낀 적 없던 것이었다.


"소녀가 귀엽다? 건방지구나. 이제껏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없었느니라.
어떤 자신감으로 그런 망발을 하는 것인지 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전 두 번 말하지 않아요. 들으신 그대로에요.
기대하세요. 우승하고 나면, 또 당신이 상상하지도 못한 소원을 빌어줄 테니까."

침을 꼴깍 넘긴다.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음란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수한 눈매로 자신을 한없이 끌어들이는 건방진 아이,
에리아를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었다. 자신이 안달내서는 안된다.
 표정에 반드시 곤란한과 난처함을 띄우고 말리라는 생각이 발끝부터 기어올랐고
이윽고 손 끝은 찌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그래, 기대해 보겠느니라. 허나, 이번에도 소녀를 농락했다가는 가만 두지 않겠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에리아는 방금 전까지 플로라를 향해 건방진 말을 내뱉던 입으로
살짝 웃어보였다. 말려올라가는 입꼬리. 그리고 옅은 분홍빛으로 빛나는 입술,
살짝 터져 피가 번져보이는 그 얼굴. 몰랐던 가학성향을 깨우는 것 같았다.


"노예 주제에... 노예 주제에 너무 건방져..."


사랑이 꼭 하나의 형태일 수는 없는 것이지 않던가.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관심을 빙자한 하나의 사랑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날 밤, 플로라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에리아는 어머니를 위해 찾으려고 했을 텐데,
그냥 아이가 조금 갸륵해 거둬두고 싶었을 뿐인데
어째서 자신이 그렇게 휘둘리는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병세를 확인하러 가지도 못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병세를 확인하기가 부끄러웠고
어머니를 뵐 면목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아직 주머니에 남은 돈을 만지작 거리며 생각했다.

"내일도, 콜로세움 경기 보러갈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왠지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성욕이 마구 들끓어오른다거나 하는 그런 감상은  아니었다.
플로라는 이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다만 자신은 방법을 몰랐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은 뒤척인 끝에 지쳐 쓰러지듯 잤다.
다음날 그녀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오전 8시. 아직 일과를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그녀는 차분했다.
마치 도박중독에 빠진 사람의 피폐한 눈.
그런 눈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아마 플로라 스스로도 몰랐겠지만.
그녀는 곧장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한다.
그리고 누워있는 티들렌을 찾아갔다.
아침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플로라, 오늘은 일찍 일어났구나."

티들렌의 목소리가 깊이 플로라의 가슴을 찌른다.
마치 오늘은 일찍 일어나게  무슨 사유가 있느냐고 되묻는  같았다.


"아니에요 엄마. 그냥,  일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눈을 티들렌은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지. 우리 아가. 잘 다녀오렴.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말고."

"네. 아시잖아요. 전 엄마가 제일이라는거."


 말에 티들렌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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