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소녀의 구원 (64/303)



〈 64화 〉소녀의 구원

플로라는 곧장 오늘도 콜로세움으로 달렸다.
벌써 며칠째 콜로세움이라니.
어제도, 그제도 콜로세움에서 돈을 썼다.
자신이 혐오했던 귀족들의 태도가 이해되는 것 같아 괜히 고개를 저었다.

콜로세움의 문이 열려도 경기는 곧장 시작하지 않았다.
이제껏 나온 경기를 복기하고 선수의 소개를 하는 부분부터,
사회자의 인사, 후원자의 함성... 결국 다 쓸  없는 일들이 오래 이어졌다.
그러다가 거대한 남자 하나가 쿵쿵 구둣발로 콜로세움 한가운데 서고 나서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흠흠, 아. 아."

남자는 마이크에 대고 목소리를 시험해보는  행동하다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콜로세움의 관리인을 맡고있는 게비디라고 합니다.
오늘 결승전에 모여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렇게 인사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콜로세움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여러분. 도전하십시오. 그리고 장렬히 산화하십시오.
그게 제가 여러분께 드릴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이고는 마이크를 사회자에게 돌려주고 사라졌다.


"저 미친놈... 언제봐도 싸울 엄두가 안나."


 옆에서 중얼대는 소리. 그건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는  번의 반박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선수들이 입장하고 플로라는 입을 다물  없었다.

누더기.  정확하게는 음부만 겨우 가릴 수 있는 거적데기를 걸치고 나온 에리아와
질질 끌리는 거적데기를 입고 나온 결승자. 자신이 들었던 것보다 훨씬 구차해보이는 남자와
추레한 옷가지. 그런 결승전을 보고나면 정상적인 전투라기보다는 이제 진흙탕 싸움이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처참하다고 말해도 좋았다.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에리아는 반격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정말 저러다 죽어버리는 것 아닐까 싶은 정도로.
플로라가 눈물을 살짝 훔칠 때쯤이었을까,
어딘가 기류가 달라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 원인은 이제껏 맞고만 있던 에리아였다.
붉은 물결같은 것이 움츠러드는 느낌. 그 앞에서 그녀가 걱정을 이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플로라는 똑똑히 보았다. 에리아의  주변을 반짝이며 돌고 있던 붉은 기운을.


"영기술사...?"

그녀는 에리아가 기어이 상대를 죽이는 것을 보았다.
나란히 쓰러져  옆으로 털썩 소리를 내며 엎어지는 것도 보았다.
곧장 경기장을 돌아나갔다.
에리아가 나타날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에리아는 나오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생각은 조용히 일렁이다 점차 커져간다.


두려웠다.


죽었을까.

 때문에?


내가 돈이 있었더라면.

내가 맨데일을 죽였더라면.


그런 생각은 그녀의 머리속을 메우다 못해 흘러내렸다.
조용히 발끝을 적시듯 뚝뚝 떨어지는 것은 단순히 생각의 조각이나 편린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건 눈물이었고, 그제서야 플로라는 현실을 직시했다.

뭘 한걸까. 왜 1캐럴을 버렸으며 왜 50델은 버린걸까.
자신은 왜 무엇조차 하지 못하는 주제에 아버지의 명성 뒤에서 그렇게 숨은 주제에
어머니를 생각한다는 알량한 핑계만을 댔을까. 그리고 왜 흥분조차 다스리지 못해
헛된 기대를 하고 말았을까.
두 다리가 그렇게 무너져내리려고 할 때였다.

"누구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
그건 게비디였다.
플로라는 생각을 억지로 주워담았다.
그리고 소매로 눈물을 슥슥 훔치고 일어났다.


"아, 아무 것도 아니니라. 발을 접질리는 바람에 그랬느니라."

"오, 발을요? 조심하셨어야죠. 도와줄 사람을 불러드리죠."

"괜...찮느니라."


"많이 아프셨나보군요."


"그래, 조금... 아프구나."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떤 일이십니까 에반제인 아가씨."

"우승자를 축하해주기 위해 왔느니라."

"흠... 우승자는 현재 지쳐 쓰러진 상태입니다. 쉬게 내버려두시죠.
저희 위원들이 따로 마련한 숙소로 운송중입니다. 걱정 마시죠.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에리아양은 이제 노예가 아니니까요."

게비디 역시 그녀의 말을 믿을  없음은 같았다.
에반제인 플로라. 처녀인 노예를 다수 사들여 하룻밤을 즐기고 길거리로 내쫒는다는
추악하고 사치스러운 여성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녀의 소문은 그렇게 와전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어설픈 연기는 싸늘함과 까칠함이라는 변명 속에 진실로 굳어진 것이다.
게비디로서도 기껏 관심이 생긴 에리아를 그렇게 보낼 수야 없었으니까.

"그 말은 지금, 내 앞을. 대공녀 에반제인 플로라를 가로막겠다는 것이냐?"


그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분노로 얼룩진 얼굴이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닙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에리아양도 많이 지쳤을테니 쉬게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콜로세움은  영역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양해를 부탁드리는 것이죠."


때려죽이려고 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했지만 게비디는 침착하게 말을 돌렸다.
 말에 정신이  든 것일까.
플로라는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달리 갈 곳은 없어 결국 저택으로 돌아왔다.
왜,  변한건 없을까.


여전히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진 플로라는 최근 어머니를 만나기를 자주 주저했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닦고 나서 화장을 고쳤다.
그리고는 티들렌의 방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렴 플로라."

분명히 아닌  티를 냈지만 티들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플로라 너, 울었구나."

"아니에요."


"아니긴, 이리오렴."

티들렌은 플로라를 살짝 안아주고 등을 토닥였다.


"뭘 하고 계셨어요?"

"식사를 조금 하고 있었단다. 보렴. 오늘은  개나 먹었어."


그녀의 옆에 놓인 호밀빵 봉지에는 오전에 체크한 것 보다 정확히 두  줄은 빵이 들어있었다.
플로라는 어머니를 놔두고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했다는게 부끄러웠다.


"엄마, 오늘은 좀 괜찮아요?"


"어제랑 비슷하단다. 알잖니."


한껏 가늘어진 팔과 부어오른 목과 관절.
괜찮을리 없었다.
그런 어머니께 1캐럴 하고도 50델이라는 거금을 함부로 날렸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조용히 입술을 뜯으려고 하면 티들렌이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그러지 말렴. 자책하지 않아도 돼. 넌 에반제인이잖니. 항상 당당해지렴."


플로라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터뜨렸다.
 없이 그 자리에서 울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방을 나선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노트에 해야할 일을 정리했다.
 잘 해야 했는데, 아직 미숙한 이대로는 안되는데, 다른 곳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되는데.
그런 말들로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말이다.


하루 종일 그녀는 기운이 없었다. 마른 공책에 서걱이며 새겨넣었다.
만년필에 들어간 힘이 상당해 종이를 북북 찢어낸다.
그러나 진정이 되지 않았다.
한참을 같은 자리를 문지르던 펜촉에서는 이미 잉크가 번졌다.
다시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종이에 적었다.

-더 강해지길. 더 높이 올라가길.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손에서 놓치지 않길.
나를 깔보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사람이 되길.
에반제인을 다시 당당하게 만드는 가주가 되길. 황제의 친애를 받을  있길.
나는 소망하고 희망하고 간절히 원한다. 내 머리에 왕관이 돌아오길 바란다.

그리고나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채소를 조금 가져와 간단히 발사믹식초를 뿌리고는
우아하게 씹어먹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몸매에 살이 붙지 않는 것은 유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그녀는 먹는 것 자체에 그렇게 신경을 쏟지 않는다.
위의  자체가 상당히 줄어있는 상태였다. 거식증은 아니었다.
다만 양이 워낙에 줄어 몸매가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미모는 빛을 냈다.

"게비디..."


그가 부러웠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았음에도 콜로세움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되며, 공간 안에서는 그 누구도 그보다 위에  수 없고,
타인에게 열망의 시선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많은 관객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걸 무능한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되었으니 플로라는 적잖이 배가 아팠다.

분명 그렇지 않았다면 에리아를 데리고 돌아왔겠지.
그녀는 몰랐겠지만 그녀의 안에서 에리아는 이미 한번 놓친 것이 되어있었다.
다시말하면, 모르는 새에 플로라가 에리아에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단순한 필요나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집착이 되어버린 애정이
결국 그녀의 목을 죄이는 것 같았다.


집착은 욕망을 흐트린다.
억지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목적을 망각하게 한다.
플로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영리한 머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에리아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어머니의 핑계를 다시 대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본능에 충실한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도 나는 젤렌지보다는 낫겠지 하는 생각.
그게 그녀의 집착을 정당화했다.
누구보다는 낫겠지라고 타인을 깎아내리기 시작할때,
본인이 비로소 그와 같은 위치에 선다는 것은
그를 끌어내렸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자신이 점차 그를 닮아감을 내포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던 도마뱀의 꼬리와 같은 것이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을 보고 비웃는 자의 뒤에 어떤 위험이 닥쳐도
꼬리가 잘린 도마뱀은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늘어날 뿐이라는 사실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조금만 생각해봐도 간단한 사실을, 플로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있는 전화가 울렸다.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받은 전화는 당연하게도 바라던 전화는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담배 유통의 새로운 허가를 내 달라는 상인단의 요구전화였고
그녀는 내일 직접 만나 이야기하자고 못을 박았다.
플로라는 눈을 감았다. 조용히 침대에 누웠고, 말 없이 그대로 잠을 택했다.
고민을 하루 늦추는 일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그녀는 오랜 꿈을 꾸었다.
아버지였던 에반제인 대공이 플로라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꿈.
아버지는 늘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노예를 수없이 거스리고 다녔던 그는 누구도 에반제인가를 넘볼 수 없게 했고,
담배에 무자비한 세금을 붙였다.
자신의 앞을 막는 자는 가차없이 숙청했고, 길거리의 노예와 평민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일처리는 언제나 확실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였기에 플로라는 압박감을 받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그런 아버지가 자신에게 흔들어주는 손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언의 응원이었다.
플로라는 이 꿈을 3년째 꾸고 있었다.
이제 그 모습은 그녀에게 압박감을 부여하는 악몽이었다.
웃는 아버지는 점점 희미해져 사라져버리고 사방에서 들이치는 창칼과 웃고있는 상인단.
기어이 그 끝에 목이 내달리는 플로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이미 꿈의 결말은 알고있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꿈이기에  그만큼 괴로웠다.
절실함에 내민 손에 피가 주르륵 흘러도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무뎌진 건지 아니면 그냥 꿈이라서 그런건지는 모른다.
그녀가 말없이 지쳐 고개를 떨구면 발끝이 묘하게 빛난다.

그리고 손 끝이 묘하게 찌릿하다.
익숙한 느낌, 그러나 낯선 시야에 비치는 그림.
깊은 구덩이 사이에서 들어올려지는 감각.
고개를 들었다.
그 창칼의 끝에는 커다란 얼음덩이가 붙어있었다.
언젠가  얼음덩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던져진 플라스크는 깨지면서 무수한 빛으로 흩어졌다.
그건 에리아의 플라스크가 만들어낸 얼음이었다.


"나를 위로하는거야?"


에리아였다.
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그녀가 뻗은 손을 따라서.
에리아는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꿈이라지만 플로라는 행복했다.
창칼을 겨눈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졌고, 그 끝에서 붉게 타오르는 피가 휘날린다.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의 에리아는 그런 여자였다.
왠지 이겨낼  있을 것 같다는 감상이 들어 에리아의 뒤를 따르면
에리아는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자신이 선물한 연막이었다.


눈 앞이 검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리아는 그렇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글자.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못한다고 했지?]


 말에 플로라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버둥대고 있었다.
그리고 플로라는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쿠당탕.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나서 플로라는 눈을 떴다.

"아... 엉덩이..."

그리고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히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머리 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찾아갈게.]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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