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소녀의 해방
게비디와 에리아가 친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런 하프오크보다 훨씬 에리아와 친할텐데.
그런 하프오크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건 그냥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뭘 한건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굴러온돌과 박힌돌같은 농담이나 생각하면서 그녀에게 했던 말이라고는
미친년이니 하는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 자신이라도 호감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제국에서 흔히 하는 농담이었다.
제국은 굴러온 돌과 박힌돌이 지배한다는 이야기.
굴러온 돌은 무조건 당하면서 제국으로 들어오기에
능력이 있어도 출세한 후에는 시스템을 즐기고 변화하려 하지 않는다.
당한 만큼 갚아주기 위해서, 더 억울했던 만큼 누리려고 하는 이들이었고
박힌 돌은 원래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수긍하고 만다는 이야기.
그게 제국의 노예제도를 지탱하고 있다는, 제국에서는 흔한 속담과도 같은 말이다.
무엇이 잘못인지 알고 있지만 아는 만큼 누리려는 자와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자들.
흘러들어왔기에 이용하고, 박혀 있었기에 적응한다. 결국 고여서 썩어버리는 적폐는 그렇게 나타난다.
이제껏 모두를 속였다고 생각한 그녀였다.
완벽한 공작가의 가주를 연기했던 플로라였고 다소 어려움은 있었지만
플로라가 연기한 에반제인의 위엄은 상당했다.
그게 점차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는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걸 바꾼건 하나의 노예였지만 이제는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여성.
플로라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왕성을 향해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앞쪽에서 그녀를 향해 오고 있는 커다란 짐차 한대.
그곳에는 공포에 질린 운전수가 있었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얼굴이 익숙해졌다.
콜로세움에서 겪은 것 때문일까.
괜히 그녀는 그 마차를 눈으로 흩었다.
그리고 차 짐칸에 완전히 구겨져 찌그러진 여자를 보게 되었다.
이상할 정도로 큰 흉부와 둔부를 드러내고 허리가 거꾸로 꺾여 목이 비틀려 죽은 여자.
불쾌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킬레리다. 분명히 왕성에 게비디와 에리아가 있다.
시간이 지나 그녀는 왕성에 도달했고 에리아와 게비디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성 내에 있다고 했다. 자신이 찾아가기에는 명분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카페에 찾아가 목을 축이기로 했다.
"어서오세요 손님, 뭘 드시겠습니까?"
그렇게 인사하는 바리스타에게 말했다.
"홍차도 주문할 수 있느냐."
"아,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홍차는 생각보다 맑고 붉게 나왔다.
붉은 홍차를 바라보면 에리아가 보였던 그 붉은 빛이 생각난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홍차를 마셨다.
집에 있는 것보다 확실히 별로였다.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훌쩍 지났다.
여기까지 나오는데도 시간이 상당했는데 에리아를 놓쳤다는건 상당히 수치였다.
그래서 플로라는 가게를 나왔다.
성 앞에 차를 대고 대기중이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성 앞 경비를 붙잡고 물어보고 말았다.
"여기로 들어간 평민 소녀는 아직 나오지 않았느냐?"
"평민 소녀...말씀이십니까? 그런 건 본 적이 없습니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뻔히 아까 인사하는 것을 보았는데
일개 경비병 주제에 자신을 농락하려 드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표정은 정말 모른다고 말하는 표정이었기에 그녀는 단념하고 물었다.
"그럼 게비디는 여기 벌써 다녀갔느냐?"
아무리 그래도 게비디를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10여분 정도 전에 나가셨습니다."
"아...그렇구나... 알겠다."
"예, 살펴가십시오."
짜증이 난다.
살펴가라니. 마치 자신이 살피지 않아 에리아를 놓쳤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라 그런지 굳이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 잠깐 그녀가 머뭇대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한 남성이 걸어왔다.
"그 혹시 에반제인 공작님 되십니까?"
"아, 누구냐?"
"아, 저는 모놀 자작님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자작님께서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호오?"
편지였다.
내용은 간단했다. 오전에 있던 회의에서 아내에게 면박을 주었다는 것을 핑계로
아직도 플로라가 만만한 줄로 알고 건드린 것이다.
[역은 포기하겠습니다. 빙 둘러짓죠.]
뚝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씨발놈이..."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나서 시종은 인사를 전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작님께서 그 편지를 전하고 돌아오라고 하셨기에."
철썩.
그건 플로라의 매서운 손이 시종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였다.
매섭게 후려쳐진 뺨이 붉었다.
"이 기본도 안된 자가! 어딜 감히 공녀를 앞에 두고 허가 없이 자리를 벗어나려 하느냐?
또한, 자작님? 미친게로구나? 오냐, 자작님이 무서우신지 공작이 무서운지 한번 맞으면서 잘 생각해 보거라."
쨔악.
쨔악.
말릴 새도 없이 일어난 일에 시민들은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에반제인이기에.
이 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기에. 오히려 이정도로 끝내는건 감사할 일이었다.
그렇게 무려 17대. 양 뺨을 사정없이 몰아친 플로라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댔다.
이미 얼굴이 부어오른 시종은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몰라도,
설령 실수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대드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주인에게 안내하거라."
그제서야 바들대며 떨던 그가 대답했다.
"ㅇ..예...."
자작의 집은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리고 자작의 집 앞으로 에반제인 공작가의 차가 나타난다는 것은
곧 자작부인에게는 공포였다.
오늘 드디어 알아버린 플로라의 모습은 이제껏 자신이 데리고 놀던 모습과는 달랐으므로.
남편이 섣불리 편지를 보내겠다고 할때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분명 정상적인 내용으로 쓰겠다고 했는데도.
곧장 그녀가 온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대문 앞으로 나갔다. 영업용 미소를 장착하고.
에반제인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플로라는 들어가자 마자 자작을 찾았다.
"그대의 남편은 참 지조가 있구나?"
"ㅅ..실례했습니다."
"아니다, 대화를 원한다면 만나주는게 인지상정이지.
대화로 끝날 수 있다면 좋겠구나."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남편은 여유롭게 수면가운을 걸치고 나타났다.
수염도 덥수룩해서는 그녀를 보며 여유롭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 낯짝은.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구나."
"아, 아가씨께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들러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그는 느긋하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 멈칫했다.
아내가 말한 독기의 의미가 이런 거였구나. 눈에 생기라고는 없는 섬찟한 표정.
그녀는 긴 말 하지 않았다.
"죽고 싶으냐?"
"아...아하하... 아닙니다. 그나저나 자택에는 어쩐 연유로 이렇게..."
"철도사업에 관련해서 내 제안이 그리 탐탁치 않았던 모양이지?"
"아... 그것은... 근방 지역 귀족들과 이미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자작이 꿀꺽 침을 삼킨다.
"본 소녀는 허가한 적이 없다."
"그...ㄱ것이... 허가와...는 조금 다르고..."
"답변을 요구하지 않았다."
싸늘하게 얼어붙는 분위기에 조소를 띄우며 플로라가 말했다.
"원래 객에게 차 한잔도 내오지 않고 대접을 하는가?"
그제서야 자작은 무언가가 정말 심각하게 잘못됨을 느꼈다.
"지역귀족. 말 잘했다.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에 아내를 대리로 보내는 것은 무슨 의미지?
그 잘나신 지역귀족으로서 자작의 작위는 그대의 아내가 받은 것인가?"
"아...아닙니다."
그때, 집사가 정중하게 커피를 가져왔다.
방금 탄 것으로 보이는 향이 좋은 커피였다.
플로라는 그걸 가만히 받아들고 빙그레 웃었다.
"커피는 취향이 아니다."
그렇게 말했다.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가 난다.
그녀가 웃는 얼굴 그대로 바닥에 커피잔을 내부쳐 깨버린 것이다.
"차가 좋겠다고 말했느니라."
생글생글 웃는 플로라의 표정. 그 아름다운 얼굴과 매혹적인 몸짓.
그 모습에서 공포를 느껴야 했다.
자작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플로라는 테이블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보이며 말했다.
"확실히, 차 한잔에 목숨값은 조금 싸지 않으냐?
만약 소녀의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다면 상당히 웃지못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구나."
집사는 빨리 차를 내왔다.
홍차였다.
"홍차는 방금 마셨느니라. 다시!"
그리고 이번에도 바닥에 잔을 처참하게 깨뜨렸다.
그 이후로 자스민 티, 캐모마일 티, 만다린 티, 라벤더 티가 도착했다.
"너무 저렴하다."
쨍그랑
"맛이 없다."
쨍그랑
"좋아하지 않는다."
쨍그랑
"어울리지 않는다."
쨍그랑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웃고있다.
"어...어떤 차를 원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무슨 차를 원하는 것 같은가?"
결국 한참을 더 바닥이 흥건하게 젖고 나서야 플로라는 물잔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대의 차는 하나같이 부족하구나. 물이 아까울 지경이다."
그렇게 말하며 물을 마신 플로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높은 굽의 힐이 깨진 컵조각을 바스락대며 밟는다.
"좋다.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역을 돌려 내고, 철길을 돌려 깔아라.
소녀는 신경쓰지 말고. 한번 어디 알아서 해 보아라."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죽여버리고 묻으면 될 일 아니던가? 라고 생각하던 자작은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플로라는 돌아갔다.
그 압박감에 자작은 자신이 계획했던 철도계획을 전면 취소하고
플로라의 영지에 역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플로라는 차에 올라탔다.
"돌아가자."
그렇게 말했다.
오늘따라 잘 풀린다고 해도 기분이 썩 나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도 불쾌했다.
결국 플로라는 자신의 영지에 역이 들어서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늘 불쾌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비웃듯이 입술 사이로 식은 바람과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그러고 있는 와중에 차가 갑자기 덜컥 멈춰섰다.
순간 몸이 앞으로 쏠리는 것을 참아냈다.
"비켜라! 에반제인 아가씨의 앞이다!"
운전수가 누군가를 향해 그리 말했다.
"누구더냐."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변변찮은 자라면 목을 칠 생각이었다.
"예, 얻그제 맨데일이 데려왔었던 소녀입니다. 상당히 여유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콜로세움에서 한번 이겨먹었다고 귀족의 앞을 막는 미친년이 있다니...
제가 적당히 치워내겠습니다."
뭐라고? 흠칫했다. 머릿속에서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목소리.
'찾아갈게.'
"아니다. 차를 세우거라. 잠시 이야기나 하다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그리고 창문을 내리자 에리아가 거기 있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응어리진 감정이 확 풀어지는것이 느껴져 설레기 시작했다.
"그래, 작은 아이야. 어서 오거라, 내 옆자리에 타도 좋다.
무슨 일로 날 찾은건지 들어나 보고 싶구나."
"옆에 로봇이 있어서 안되겠는데요."
"뭐...라...? 겁을 상실한게냐? 누구의 앞인지 제대로 알려주어야 하는게냐?
보통 귀족들도 내 앞에서 무릎을 들지 못하거늘 어찌... 어찌 소녀를...!"
앙큼한 도발에 넘어가줄 플로라가 아니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에리아에게 자신의 위력을 보일 생각이었다.
"아주 천천히 가겠다고 맞춰주시면 로봇 정도는 옆에서 걷게 해도 괜찮겠죠."
그러나 오히려 그녀는 당돌했다. 여전히, 아니 한층 더 밝아진 외모가 자신을 매혹한다.
더 뻔뻔해진 태도가 쉼없이 변화하는 에리아를 보여줬다.
가지고 싶었다.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다.
"하, 웃기는구나.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내가 뭐가 아쉬워서 너의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이냐!
너와 소녀의 사이에는 넘지 못하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겠더냐?
냉큼 이리 오거라. 순순히 예뻐해 줄때 말을 듣는 아이는 싫어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운전사가 말했다.
"아...아가씨... 저... 옷은...."
"무슨 옷을....아...!"
머리가 멍해진다. 오늘 들어 제일 어리석었다.
시야갸 하얗게 변해간다.
그제서야 경비병이 한 말을 떠올렸다.
평민은 없다고 했었는데. 그렇다면 작위를 받은 것이었는데, 그걸 가능성에서 지워두고 있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대화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에리아 뿐이었고, 화끈거리는 얼굴은 진정되지 않는다.
어느새 자신을 뛰어넘어 더 높은 자가 되어버린 그녀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손이 닿지 않을 곳에서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만이
플로라의 가슴을 뛰게 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서도
정신은 없었다. 그냥 모든 순간이 행복했다.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괜히 그녀의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싶어진 플로라는 괜히 타는 목을 물로 달래며 말했다.
"홍차를 준비하지 않고 뭘 한것이냐.
소녀는 물은 무미건조하여 싫다지 않았느냐!"
그 말을 들은 에리아가 물었다.
"커피는 좋아해?"
커피? 물을 것도 없이 싫어했다. 그러나 그녀가 커피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어른스럽다고 느껴지는 에리아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아...네, 베루티노는 좋아합니다."
"베루티노? 그거 엄청 달달한거?"
"네. 그렇사옵니다."
"입맛이 어리네."
"그...그렇사옵니까..."
나는 가방에서 커피를 담은 보온병을 꺼냈다.
그리고 조금 따라 모았다.
"에스테리카는 좋아해?"
"그건 서민들의..."
"마실만 해. 내가 주는건데 안마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
마지못해 커피를 받아들었다. 긴장이 된다. 마신 커피가 좋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는 살짝씩 김이 나는 커피를 마시며
괜히 붉어진 얼굴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녀가 내준 커피는 너무나 맛있었다.
"감사합니다.."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저택으로 돌아오면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품었던 생각들. 제국의 현실, 그리고 그녀와 이어지는 것 같은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에 경청하며 공감해주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서 묵는다고 말한다. 벌써 꿈이 이뤄진 것 같았다.
추잡한 망상은 그칠줄 몰랐다.
우리는 친구라는 이야기도 했다.
친구. 그 울림은 가슴 깊은곳에 있던 먹먹함을 지워내는 것이었다.
저택에 도착해서 보니 어느새 플로라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이어진 어머니의 이야기에 멈칫한건 덤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에리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별별 직업을 눈 앞에 늘어놓고 자신을 믿어보라고 하는 그녀의 말을
플로라는 거부할 수 없었다.
아마 자신에게 몸을 바치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도 거절하지 못했겠지.
몇 번이나 둘러대려 했지만 결국 허락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그녀를 어머니께 들였다.
그리고, 일은 일어나버렸다. 어머니는 눈에 보일 정도로 쾌차했고,
자신은 그저 신기함에 눈을 꿈뻑일 뿐이었다.
영기술? 연금술?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점점 마음이 커져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 그녀가 무언가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머니의 회복, 에리아의 모습.
모든 것이 행복 그 자체였다. 가정을 다시 일으켜준 에리아를 다시 보았다.
"플로라라고 불러도 되지?"
"네...!"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을 처음으로 이해해줬다.
자신을 추잡한 변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공감해주었다.
자신의 아픔을 이겨내게 해 주었고힘든 점을 정확히 찔러 말해준다.
그래서 그녀를 왈칵 껴안고 울었다.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건 플로라에게 있어서는 구원이었다.
눈 앞에 확실히 존재하는 구원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녀는 거부하지 못하고
에리아에게 중독되어가고 있었다.
"너 스스로가 중요하다. 그때 흔들렸던거 알려나 몰라? 연기도 못하잖아."
울컥하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는 달콤하게 심장에 스며든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도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네...맞아요.... 흐윽....흐어엉...."
플로라의 등을 그녀가 두드린다.
"편히 울어. 고생했어."
"힘들었어요...!"
당신이 없었던 삶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