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나락으로 떨어진 신의 이름 (69/303)



〈 69화 〉나락으로 떨어진 신의 이름

상황은 변했고 당황한 젤렌지의 표정은 상당히 볼만했다.
그는 까득 이를 갈더니 벽쪽으로 물러나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냈다.


"크크크크...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일에 대비하지 않을 인간도 아니죠.
아마 여기서 도망쳐도 미래는 없겠죠. 이 버튼을 누르면 저택에 심어둔 폭탄이 터질겁니다.
이 공간은 지하입니다. 당연히 우르르 매몰되어 나란히 흙먼지에 깔려 죽겠죠.
다 뒤로 꺼져!"

그 말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플로라를 보고 젤렌지가 웃었다.
내 하체를 잡고 있던 거구의 사내는 내 하반신을 돌아가는 톱니에 가져다대고 말한다.

"한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다리를 갈아버리겠다!"


"그냥...좀 놔둬라... 안그래도 아프니까..."


"씨발... 징그러운 새끼... 이래도 죽지 않는다니..."


젤렌지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했다. 그 상태로 시간을 벌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벽을 주먹으로 때려댔다.
휘릭 돌아가는 벽면에는 비상구가 숨어있었다.


"크크... 씨발... 날 방해하고 무사할 것 같으냐...
로봇은 죽지 않을거고, 마녀도 거르면, 아이고... 제가 죽일 수 있는게 하나밖에 없군요?
공녀님께서 순순히 자리를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 인질로 따라오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젤렌지는 총을 들고 좌우를 흩어보며 위협을 시작했다.
플로라는 가만히 그를 노려보다가 눈을 감고 계단앞을 비켜섰다.

"비켜줄테니 빨리 꺼져."

체헤게가 그녀를 둘러싸듯 막아준다.

"로봇이라고 아주 기고만장하군요... 이미 죽은 자가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기분이 나빴다. 분명 나만이 그를  수 있었는데, 소통은 나의 특권이었는데.


"어떤 신이라도 결국 인간의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겁니다.
그걸 제가 바랬기 때문이고, 그걸 인간이 바랬기 때문이죠.
신은 전능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인간의  아래 두길 바라고,
또 내가 그 위에 서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너무나 완벽합니다 에리아."

"안타깝게 됐네."


"안타깝다? 당신은 죽지 않아요. 그리고 난 당신의 피를 기억했어요.
날 벗어날 수는 없을겁니다."


"본능적으로 느껴져.  놓아주면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아."


어느새 피가 내 몸으로 하나하나 스멀스멀 모여들었고 공 정도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팍 하고 터져 핏덩이가 이리저리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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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뭐였을까.
나는 그런건 듣지 못했다.
마녀를 조사하며 당연히 마력회로의 중심은 허리쪽에 존재하는 척추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과감하게 도끼로 내리찍은 거였는데 눈 앞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아까부터 바닥에 스멀대며 움직이던 피. 이미 그것부터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에반제인 공녀가 마녀에게 묘하게 집착하고있다.
저 차가운 여자가 비명을 지르면서 내게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더 기다릴  없다. 이미 모은 피도 저 마녀쪽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지체하면 피를 갖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그래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피를 마셔버리기로.

피는 구슬 모양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불사의 비법은 피였으니까.
그리고 지금 저 광경. 도저히 피에 비밀이 있는게 아니고서는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피를 움켜쥐었다. 사방으로 피가 튄다. 손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안돼!!!"

그렇게 외치는 에반제인 공녀가 달려온다. 아마 로봇도 마찬가지.
내 승리다. 나는 피를 한움큼 움켜쥔 것을 입으로 흩뿌리듯 집어넣는다.
혀가 따갑다. 많이 마실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한 모금.
꿀꺽 하고 목 울대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피를 마셨다.


효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제부턴 도망이다. 무조건 도망을 쳐야한다.


"씨발!!!"

나는 미리 벽을 두드려 열어놓은 비밀 탈출구로 몸을 던진다.
동시에 미리 그들을 협박할때 쓴 버튼을 꾹 누르면서.
쿠르릉 소리가 나면서 비상구는 빠르게 닫힌다.
이제 그 공간은 볼일이 없다.


다들 거기서 죽어버리겠지. 아마 영원히 고통받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것도 운명이니 자신을 탓하라고.
난, 신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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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후들거린다.
젤렌지는 도망쳐버렸다.
내가 짐덩이가 된 것 같아서 괴롭다.
에리아를 볼 낯이 없다.
무엇보다 에리아는 저렇게 상체와 하체가 나뉘어버렸다.
이제  죽겠지. 나 때문에. 그게 괴롭다.


"무령님..."

"괜찮아."

목소리는 거의 내뱉지도 못하면서 입모양으로 헛숨을 겨우 내쉬는 그녀의 표정은
확실히 너무나도 창백했다.

"어...젤렌지!!! 배신한거냐!!!"


방금 전까지 에리아의 다리를 붙들고 있던 거구의 남자가 소리지른다.
그리고 그가 비상구를 쾅쾅 두드리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쿠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우리가 걸어온 계단의 위에서 커다란 창살이 쿵 하고 떨어진다.

"이건  무슨...?"


양 손으로 힘을 줘 흔들어보지만 철책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시작된건가."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말했다.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이렇게 죽고싶지 않아...죽기전에... 너라도...!"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게 달려들었지만  움직임은 빠르게 막혔다.
에리아의 로봇이 그를 막아내고 역으로 밀쳐낸 것이다.
이 공간은 고문실인지 여러 고문 도구가 존재했는데,
마침 그가 기울어지며 에리아의 하반신을 놓치는 바람에 피를 흩뿌리며
하반신은 우리의 앞까지 미끄러져왔고, 남자는 중심을 잃고 돌아가는 톱날에 팔을 잘렸다.


"으아아아악!!"

남자는 잘린 팔을 부여잡고 비틀거릴 뿐이었다.

"하아..."

숨이 가빠진다. 눈 앞에서 벌써 몸이 잘리는 것을 두 번이나 보았다.
평소같으면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사람이 잘리는 모습같은건 보지 않았을텐데.
소름이 돋았고 구토감이 몰려온다.
나는 벽을 짚고 속에 담아낸 것을 쏟아낸다.

"우에에엑!! 우웨엑!! 우욱!!"

토사물이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뿌려진다.
로봇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같았다.
내 등을 토닥여주면서 쓸어주었다.
가만 보면 꼭 정말 사람같은 모습이 있어서 더 어색하다.


"하아... 진짜 너무 싫어."

톡.

그 잠깐의 서늘함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물?"


물이 떨어졌다고 말하자마자 구석에서 잘린 팔을 옷으로 묶던 남자가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미세하게 가슴팍이 떨린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소름돋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웃어대는 그가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젤렌지... 기어이 우릴 수장시킬 생각이군..."

"뭐?"

천장을 바라보면 확실히 아까보다 많이 젖어 물을 뚝뚝 흘려대는 천장이 있다.
그렇다는건, 이미 위층은 물난리가 났다는 의미였다.
여기는 지하실이니까 결국 여기로 물이 고일 것이다.
비상구라고 하나 있던 것도 막혀버렸다.


"ㄱ...ㄴ...차....ㅏ..."

남자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에리아를 들어 던져주었다.


"씨발... 그깟 여자 하나 때문에 여길 오는게 아니었는데."

에리아는 바닥에 쿠당탕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렀다.
거칠게 썰린 에리아의 몸은 주르륵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내장은 쏟아지지 않았다.
겨우 숨을 허덕이는  같았다.

"다리....가져와줘...."

그녀의 다리를 곧바로 붙여주면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아까와 같이 피가 모여들었고, 스멀스멀 모인 피는 그녀의 잘린 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사르륵 녹아내리듯, 혹은 피부 안으로 스며들어버린 것처럼 사라진  아래,
잘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어으... 죽겠다..."

"어...어떻게...?!"


그녀는 대답 대신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쉿 이라고 작게 속삭인 후에 그녀가 말했다.


"체헤게, 문 부숴줘."

로봇은 멋대로 철책을 쾅쾅 내리치더니 안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다.

"벽은 부수더니 철책은  부숴?"

그렇게 말하면 로봇은 마치 대화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보고 끄덕인다.
어쩌면, 혹시 그녀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삼킨다.


그녀가 신음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제대로 다리가 붙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탁탁 다리를 털어보인다.

"너...어떻게...!"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진정하고


"아, 그랬지...그랬군..."


이라고 말하며 외투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하아... 소용 없을것이다.
이제 곧 나란히 황천길 갈 사이에 숨길 것도 없겠지.
그건 후작이 비밀리에 사들인 럼버레인으로 만든것이다.
그리 간단히는 부서지지 않아."

"럼버레인? 그런걸 이렇게나 모았단 말이더냐?"


럼버레인. 잘은 몰라도 분명히 전차를 만들때 쓰는 광물이라고 했다.
충격에 강하고 불, 물, 전기를 포함한 각종 부식에 면역이 있는 정도라고 했는데.
그런걸로 철책을 만들었다니 정말 몸에서 기운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단 위로 보이는 복도에서 물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느긋한 속도였지만 분명히 물은 흘러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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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버레인. 지룡의 비늘화석.
지룡의 비늘은 단단하고 저항이 높다.
그런 물건이 퇴적되어 압력과 열로 변성된 것이 럼버레인이었다.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지룡의 생태를 추적하게 해주는  안되는 고리인데,
그런 물건이 결코 저렴할리 없었다.


허리를 움직이면 뚜두둑 소리가 난다.
어떻게든 매끄럽게 움직여보려고 하면 잘린 바지가 주르륵 내려간다.
하필 도끼로 썰리기도 애매하게 썰려서 바지는 입는 의미가 없었다.
원래 굴곡이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바지를 허리를 돌리자 마자 벗겨져 내려갔다.


"어멋...!"


플로라는 놀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지만 그럼에도 흥미가 있는지 힐끔힐끔 바라보았고
체헤게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주었다.

"참... 이렇게 길게 끌면 안되는 거였는데."


[어지러운가?]


[조금은.]


[나갈 방법은 있나?]

[없지는 않아. 철창은 부수기 어렵고, 벽을 부숴야지.]

[벽을?]


[비상구 부숴줘. 나 지금 조금 어지러워서 직접 하기가 좀 어렵네.]

체헤게는 말없이 벽면을 때렸지만 이미 문 뒤에는 모래와 아교, 돌덩이들이 섞여
지나갈 수 없었다.

"아주 꽉 틀어막혔네요."

플로라는 굳어버린 모래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하하!!"

실성한듯 웃던 남자는 플로라에게 달려들었다.
언제 챙긴건지 내가 묶여있던 침대에 꽂힌 도끼도 챙겨들었다.
휘두르는 도끼날이 날카롭게 플로라를 노리고 있었다.


"멈춰!!"


플로라가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 도끼가 플로라의 목을 치는 일은 없었다.
강철이 부딫히는 소리. 체헤게가 그 팔로 도끼를 막아냈다.
물론 철골은 또 휘어졌다.

[참, 어쩔  없는 내구성이군.]

[내가 강화부를 얼마나 붙였는데. 강화부가 아니었다면 잘려나갔을걸.]

[그래도 도끼를 봐라. 더 이상 쓸 수 없을거다.]

그 말대로다. 도끼는 체헤게의 철골에 휘어 찌그러졌다.
체헤게는 그를 벽에 몇번이나 집어던지고 진을 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겨우 간간히 떨고 있는 팔과
멍들어 부어오른 얼굴, 피가 터진 입술과 코가 묘하게 움찔댄다.
이미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물은 정강이 높이까지 차올랐다.

"무령님. 어떻게든 해주세요. 할 수 있으시잖아요!"


"걱정 마. 모래와 돌, 아교로 만들어진 벽이 물을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

나는 벽을 퉁퉁 두드렸다.

"참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했네."

[난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젤렌지라는 자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상을 가지고 있어.]

"놔둬. 신을 목표로 하는 인간이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잘 알잖아."

[신을 발 밑에 두고싶어하던  너와 같았다.]

"신이 되려고 한 건 나와 달랐잖아.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신을 그 발 아래 두게 돼.
나는 그걸 알 수 있어. 어쩌면 그게 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나는 확신할  있어.
그래서 말하는 거야. 젤렌지는 내 피를 마셨으니까 분명 어떻게든 대가를 치르겠지.
그리고 그 피가 끝날 때까지 얼마나 자신이 부질없는 짓을 했는지 알게 되겠지.
난 그 피 한모금으로 행복을  것 같아."

[그래, 성장했군.]

"그래서 말인데, 기껏 준 혈구는 왜 안쓴거야? 내가 반토막 났을 때 썼으면
이렇게 개고생 안해도 되는 거였잖아?"

[그거 말이냐? 애니 목걸이로 달아줬다. 예쁘더군.]


"맞다. 애니는?"

[그 하프오크가 데리고 있다. 상당히 좋아하더군. 입양이라도 하고싶다고 했으니까.]

"그래, 차라리 걔도 거기가 행복하지 않을까?"

[내 생각은 다르다. 일단은 조금 더 데리고 다니는게 좋아보이는군.]


"그래, 알겠어."

[생각보다 금새 수긍하는데?]


"애니, 귀엽잖아?"


"저...저도 예쁜 걸로는 지지 않사옵니다!"

"어... 플로라? 갑자기?"


플로라가 발끈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살짝 의욕이 과다해보인다.
귀여운 짓을 하고 싶었는지 얼굴이 붉어져서 나를 바라본다.
외모도 수려한 아이가 저러니까 정말 귀엽긴 하다.

"그렇사옵니다. 여길 나간다면 무령께서  매력을 톡톡히 느끼도록  드리죠!"

나는 플로라 역시 참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플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린 주제에 키는 애매하게 커서 쓰다듬기 힘들다.
그래도 난 어른이니까 여유를 보여야겠지.

"후후, 기대할게."

플로라는 의욕이 잔뜩 붙어서 기뻐했다.
슬슬 차오르는 물이 엉덩이를 적시고 있었다.


"물이 슬슬 차오른다."


"네... 다행입니다..."



"무슨 소리야?"

"아...! 그... 그런게 있사옵니다!"


"옷이 젖을테니까 빨리 나가자."


"ㄴ...네, 따르겠습니다!"


역시 플로라는 너무 귀엽다니까.
젖어서 문제될 건 없지만, 그래도 체헤게의 머플러에 물이 들어가면 난처하다.
슬슬 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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