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국가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아니, 그래야 했다.
물이 더 차오르면 분명히 돌아가는 칼날톱의 전류에 닿게 된다.
감전으로 고통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헬라티움 광석을 꺼내들었다.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네."
[전구?]
"반응성이 낮아서 그렇지 에너지 자체만 두고보면 이것보다 위험한 것도 없지."
비상구를 옆은 모래와 아교를 걷어내고 광석을 박아넣었다.
모래는 단단히 굳어 흐를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아마 상당히 강한 폭발이 일어날테니 입구쪽에서는 인원을 물렸다.
그리고 마력을 꾸준히 밀어넣어주었다.
헬라티움 광석이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수백년의 마력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라면 금방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안에 담기는 마력량 하나만큼은
정말 강대한 무기라고 볼 수 있었다.
헬라티움 광석을 묻어준 부분이 둥글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하면 나도 조금 안심이 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력을 더 주입하지 않아도 꾸준히 부풀어올라 굳은 모래벽을 밀어내고 있었다.
"무...무령님...? 저거 괜찮은거겠죠...?"
"지켜줄테니까 걱정 마."
마침내 충분히 부풀었다는 판단하에 나도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물은 가슴 바로 밑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나는 체헤게와 플로라를 안아들고 보호의 마법을 걸었다.
과거 마법사들이 디펜스 쇼크라고 이름붙였던 것이었는데,
충격을 받아도 고스란히 흘려내는 마법이었다. 절상이나 자상에는 의미가 없어서 잘 안쓰지만
파열상, 내상, 기타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히 유용하다.
"뭐해? 너도 죽기 싫으면 빨리 와서 붙어."
내가 그렇게 말하면 플로라는 내 눈치를 살피다가 말을 얹는다.
"무령님께 감사해라 천것. 너 마저도 무령님께서 살려주시는 것이다."
"으...."
그는 터덜터덜 걸어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윽고, 다리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건 흘러들어온 물이 기어이 전기와 맞닿았다는 의미다.
미리 마법을 걸어두지 않았다면 구워지고 있었겠지.
보아하니 다른 일행들도 그걸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으흐그으윽..."
"그렇게 아파?"
"아...아닙니다아..."
이상하게 플로라의 상태는 안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 나가면 따로 봐줘야지.
전류가 흐르는 물은 당연하게도 모래벽 어딘가에 숨어있을 광석에 맞닿았고
내가 억지로 과포화 상태로 만들어둔 마력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펑 터져버린다.
콰앙 소리를 내며 모래가 터져나왔고, 문이 찌그러졌지만 나가는데는 큰 문제가 없어보였고,
터진 문에 깔린 모래들로 물이 스며들면서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한다.
목밑까지 차오른 물이 다시 발목까지 떨어지고 나서 찌릿한 기분이 사그라들었고,
그제서야 우리는 서로 껴안고 있던 몸을 풀었다.
"후우..."
털썩 주저앉는 플로라가 많이 지친 것 같아 일부러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치유주문을 외웠다.
표정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가 다시 화끈 달아오른다.
"죄송합니다... 저때문에 괜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괜찮아. 나가자."
우리는 그 긴 통로를 따라 나갔다.
한참을 걸어도 빛도 없이 이어지는 통로는 일직선이 아니었다면 상당히 빠져나가기
까다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 끝에 다다른 순간 우리는 그자리에 멈춰섰다.
"여기는..."
제국 중상층이 주로 찾는 노예시장의 후문과 이어져 있었다.
통로가 워낙에 길어 통로 내부가 어질러진 것 외에 외관은 문제가 없어보인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람들이 통로 안쪽으로 몰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폭발에 흥미가 동하지 않을리가 없지.
"뒷골목으로 흘러들어왔군요. 우선 무령님께서는 옷을 먼저 입으시는게 좋을 것 같아 보입니다."
"아, 미안. 금방 꺼내 입을게."
"아뇨,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옷을 사 오겠습니다.
마침 소녀도 한 벌 새로 구입해야 했기 때문에..."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고 젖은 치마를 살짝 손끝으로 잡아 우아하게 인사했다.
저렇게까지 예를 차릴 필요는 없는데.
"거기, 너. 따라오거라."
플로라는 팔 한쪽이 잘린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이며 지시했다.
남자는 살짝 당황한 듯 뒤로 주춤하며 거절했다.
"싫다...!"
"아? 아직 정신을 제대로 못차린거야?
"정신? 미친건 너희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 나라에 발을 붙이지 않았을거다!
아까부터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으니까!
젤렌지... 그 자에게 속은 것 뿐이란 말이다!"
"사람을 죽으라고 붙들어놓고, 협박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나는 아니다, 몰랐다.
그런 식으로 발빼고 도망갈 생각인가? 나는 대공이다.
손짓 하나로 네 얄랑한 목을 쳐 날려버릴 수 있는 대공.
이 나라에 대공이 얼마나 되는지 네가 감히 알기나 하더냐?"
내가 궁금해졌다.
그러게. 대공이라는 작위가 있는데 에반제인 공작이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긴 하다.
"아 그런데, 플로라.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공이라고? 공작이라고 했잖아?"
"아, 그거 말씀이십니까. 대공은 이 나라에 3명 존재합니다.
제 아버지셨던 에반제인 대공, 돌로레스 대공, 핀체른 대공이죠.
대공의 딸이었던 저는 공녀임과 더불어 공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저는 대공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비록 아들은 없었지만 황제께서 용인하셨고 허가하셨으니 문제는 없겠죠.
그래서 대공입니다. 그런데, 다들 공작이라고 부르더군요.
소녀 역시 자격을 따지기 부끄러워 공녀라고 하고 있사옵니다."
"대공이라는 게 왜 존재하는건데? 공작은 있다고 했잖아?"
"제국은 원래 4개의 나라로 분화되어 있었으니까요.
그 중 하나였던 거죠.
선대 황제님께서 통일을 이루시고 각 국가의 왕은 대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대에 이르러 계속 이어진 것이옵니다."
그제서야 대충 퍼즐조각이 들어맞았다.
황제 아래에 대공가 셋. 그리고 그 아래로 오작이 따로 나뉘어 있는 거라면
국가는 사라져도 오등작과 대공은 기본적으로 아주 큰 차이가 있다.
그럼 여기서 의문점이 또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럼 무령은 어디서 끼어든거야?"
"무령은 선대 황제께서 3대공을 견제하기 위해 그 위로 놓인 자리입니다.
사실상 형식만 존재했고 방치되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군요.
대공을 물리고 새로운 자를 대공에 앉히는 것은 반발이 심할 테니까요.
그래서 무령이 생겨난 것입니다."
"제국 역사는 좀 까다롭네."
"나중에 역사서를 따로 가져다 드리지요."
오래 살아도 기본 상식과 역사의 흐름은 또 다른 거니까.
관심이 없기도 했었고.
그러고 보니 제국은 다르말록을 숭배하던 국가였으니
본질적으로 나를 노린 것도 어쩌면 이들인지도 모르겠다.
"야, 거기 외팔이."
"나 말인가?"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순순히 따라가줘. 나한테 한 짓은 봐 줄테니까."
"하아... 알겠다."
그도 사람이긴 한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순순히 따라가기로 한 것 같다.
한 30분 정도 지나면 그들이 괜찮은 옷을 구해왔다.
내가 입으면서 가격을 물으면 후후 웃으면서 적당히 구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 옆에서 입이 떡 벌어진 남자의 표정은 덤이었다.
나는 체헤게를 데리고 연구소로 먼저 돌아가기로 했고,
플로라는 남자를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하기에 그러라고 허가했다.
왠지 미소를 보이는 모습에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하고 보냈는데,
그건 아무래도 내가 몰랐던 그녀의 모습이 잠시 비친 것이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오전, 거리 광장에는 남자의 목이 걸려있었다.
-이 자가 제국의 무령을 해하여 죽이려 하고, 본 공녀를 범하려 하였기에
나는 본보기로 이 자를 처형하여 목을 걸어둔다. -에반제인 플로라
그리고 그 목 옆에는 과시하기 위한 목적인지 잘린 남성의 하반신이 있었다.
그 의미는 아마 나에게 그가 한 짓이 원인이겠지.
그리고 또한 거리에는 큰 방이 붙었다. 빨라도 너무 빠른 일처리다.
언제 일처리를 마친 건지 무령을 해하려 하고 플로라를 죽이려 한 죄를 물어
젤렌지 후작을 잡아들이라고 써 있었고 이 시간 부로 젤렌지 후작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며
그를 잡아오는 자에게 남작위를 내리겠다고 적혀있었다.
황제의 인장이 함께 찍혀 있었기에 상당히 빠른 진행이라고 한 것이었다.
"아주 오등작이 동네 우물이야? 퍼다 주면 되는 줄 아네."
그렇게 중얼대면 어느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야 제국은 유지 될 수 있으니까요."
뒤를 돌아보니 킬레리가 서 있었다.
"아, 킬레리."
"네. 찾고 있었습니다. 주문하셨던 상담소의 제작이 모두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아, 그거 벌써?"
"네. 인력을 갈아넣었으니까요."
"갈아넣는다고 그게 그렇게 빨리 지어질리가 없는데?"
"아뇨, 길드측에서 가게 하나를 빠르게 매입하고 리모델링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무령님께 연락할 수단이 없다고 마스터꼐 연락드렸으므로 알려드리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아, 고마워. 덕분에 빨리 찾아갈 수 있겠네. 위치는?"
"연구소 동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가게 수용 인수는 한 명입니다. 건물은 철근을 박은 후, 목재로 덮었습니다.
기존 건물의 낡은 외벽을 뜯어내고 내부 철골에 맞춰 목재를 튼튼히 이어붙였으며,
지붕은 생활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었습니다.
이전의 카페 디자인을 참고하여 백향목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센스가 좋네."
"용역들은 마스터께서 지원하셨습니다."
"게비디가?"
"네, 그렇습니다."
"고맙다고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녀를 따라 가게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전 카페보다 더 적은 수를 받는다.
그러나 확실히 안락하기로는 이곳만한 것이 없었다.
이제 나도 슬슬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연구했던 공간의 사유화를 빨리 마무리 해야 했다.
근 7년은 그 연구가 메인 테마였으니까.
아마 내 예상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구가 끝나리라고 보는 편인데,
이상하게 한 부분이 풀리지 않는 것이다.
이 연구가 완성되면 도망칠 때마다 집을 불태울 필요가 없을텐데.
매번 재료 구해서 지어놓으면 버리고 도망가는것도 아까웠다.
"그래도 이정도면 나쁘진 않네."
[높이도 적당한 것 같군.]
"아마 널 배려해서 더 높게 지었을걸."
"야옹."
애니는 어제 하루 게비디와 지냈던 것이 내심 두려웠는지 내게서 떨어지려 들지 않았다.
참 일방적인 관계였구나 너희. 하긴 고양이 말을 누가 알아듣겠냐만은.
결국 틀어박혀서 물약 연구 진척도를 둘러보고 연구를 하다 보면
시간은 또 훌쩍 지나가 있었다.
[질리지도 않고 매번 그런걸 잘도 하는군.]
"존재의의니까."
[존재 의의? 안죽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
"글쎄, 단순히 죽지 않는 걸로 내가 나라는 확신이 생길까?
난 내가 마녀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라고 생각해.
단순히 도태되어 죽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정말 비참했을 것 같다고."
[동의한다. 그나저나, 오늘은 플로라를 보러 가야겠다고 하지 않았나?]
"아침에 눈뜨면서 그랬었지."
[벌써 7시다.]
"뭐? 빨리가자! 내 정신좀 봐. 어떻게 이렇게 몰랐지?"
체헤게는 나를 집어 어깨 위로 휙 올리더니 이전처럼 나를 안은 채로 달린다.
"이거 하지 말라니까!"
[늦을수는 없잖나. 플로라 성격 모르나?]
"야옹"
"플로라가 왜? 늦는다고 나한테 화내고 그러지 않을걸?"
[그래, 너한테는 그렇겠지. 너한테는.
어제 네가 젤렌지에게 납치당하고 나서 나는 플로라와 저택에 남아있었다.
그때 그 공녀가 어땠는지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만. 남 이야기를 뒤에서 하는 건 좋지 않아. 아무튼 늦으면 안된다는 거잖아?"
[그래.]
"엉덩이 아프니까 잘 받쳐들어. 쿠션도 없으면서 쿵쿵 뛰지 말라고."
[검토는 해 보지.]
"검토는."
그렇게 내가 엉덩이를 8분정도 더 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에반제인 대공가에 도착했다.
우리가 노크를 하지도 않았는데 에반제인이 곧장 우아하게 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그래, 플로라. 왠지 좀 숨이 가빠보이네?"
"아, 조금... 일이 있었사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작은 소동이랄까...하하..."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옆으로 할 말은 많아보이지만 입은 열지 못하는
애처로운 표정의 운전사를 보고 나는 수고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왠지 표정을 보아하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혼이 난 모양이다.
그녀는 곧장 웃으며 자신을 방으로 안내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쾌차한 티들렌이 그녀를 말렸다.
"플로라. 무령님께 실례란다. 방금 막 오셨는데 무례하게 굴면 안되지?"
"아, 네 어머니."
플로라는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내게 정식으로 다시 인사를 했다.
"에반제인 대공가의 가주, 플로라. 무령님께 인사드리옵니다."
"어미 되는 티들렌이라 합니다."
둘의 정중한 인사에 나 또한 인사를 하려 했다.
티들렌이 화들짝 놀라며 내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구두 인사로 가볍게 했다.
"그... 무령 에리아다... 오랜만이군."
이런 귀족들의 허례허식. 적응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