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귀족은 이어질 것이고
인사를 마치고 차를 대접받은 후에, 살짝 부담스러울 정도의 감사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겨우 나는 플로라의 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빨리 책 펴. 바쁘다고. 널 빨리 가르쳐야 나도 여길 뜨지."
"꼭 떠나셔야 합니까?"
"어... 아마도. 급한 일이 있거든. 그래서 결국 말은 안놓기로 한거야?"
"네, 이제부턴 에반제인 공녀가 아니라 대공 에반제인 플로라로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 잘 생각했네."
한참을 그녀에게 마력의 개념부터 시작해서 가르쳤다.
곧잘 따라하는 그녀였지만 어째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도 있었다.
몇 백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차이다.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마법이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한다고 별 비유를 다 했다.
이렇게라도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 그러니까. 마력은 기본적으로 생명력을 기반으로 하는 물질이라는 건 알겠지?"
"네. 그리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강한 쪽에서 약한 쪽으로 흘러요."
"그래, 그럼 그걸 거스르게 해줘야 영기술이 자유롭게 되는거야.
일반적으로는 마력을 조절하는게 숙달이 되면 할 수 있게 돼.
간혹 그걸 도와주는 물건들이 있지. 강화물이라고 할까?"
"그리고 그게 무령님은 피라고 하셨죠?"
"그런거지. 마력회로의 중심이 어디라고?"
"허리쪽에 있는 12번 척추라고 하셨지요."
"그래, 그럼 마력을 생성하는 요소 두가지는?"
"폐와 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뭐가 이해가 안되는데?"
"영기술사들은 물을 뿜고 불을 토하며, 사람을 치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력만 가지고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보통 소질이 있는 인간은 마력 적성이 있으니까."
"그 적성이 무엇이기에 체내 마력이 불과 물로 변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물질이 아니라니까. 미묘하게 달라. 불로 예시를 들어볼게.
네가 상상하는 마력의 형태를 마력에 이미지하는 거야.
불의 형태, 불의 특성, 온도같은 것들. 그러면 네 이미지 대로의 불이 구현되는 거지.
마력으로 일으키는 불은 정확히 말하면 불과 똑같이 생긴 마력이야."
"그러면 적성이라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라는거야. 마력에 불의 이미지를 넣는건 좋아.
그런데 불을 보고 자신이 상상한 뜨거움의 이미지가 몇 도씨 까지 올라가는지 알아?
사람마다 이미지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단말야. 내가 1000도짜리 불꽃을 피우려고 해도
경험한 적 없는 온도라면, 혹은 이미지 해내지 못하면 불가능해.
그래서 그 부분에 특히 적성이 있는 사람들이 생겨.
그리고 대개는 한번 이미지 해버린 후에 마력이 그런 특성을 띄고 흐르게 되면
그걸 원래의 순수한 본연의 마력으로 되돌리는 것 역시 어렵다는거야.
그래서 본인의 마력을 느끼는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거고.
다시 역으로 이미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고력이 중요한거야."
"영기술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습니다."
"다만 영기술사들이 적은 이유는 마력의 성질이 변하고 나서
마력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죽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인데,
만약에 온 몸에 흐르는 마력이 불과 같은 특성을 지닌 사람이 있어.
그런데, 마력회로가 그 마력을 감당하지 못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타죽는...겁니까?"
"그런거지. 그래서 마력이 한가지로 고정되는 사람이 있는거고.
단순 물질이나 물건을 떠나서 이미지하는 모든 것은 마력의 특성으로 작용할 수 있어.
그래서 어떤 특성을 더 잘 반영하고 이미지 할 수 있느냐가 적성인거야.
마법이 욕망이라고 불리는 이유지."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적성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있으시다고 하셨사온데."
"아, 아까 만들어왔어."
내가 가방에서 둥그런 유리구슬을 꺼내면 그녀는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그 위로 얹어주고 말했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너의 마력을 느껴봐.
적성이 있는 경우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마력에 섞여있을 테니까,
그걸 지금부터 뽑아내는거야."
그녀가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면 천천히 유리구슬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초보자에게 마력을 느끼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곧잘하는 플로라는
한참을 심호흡을 반복했다.
"보인다."
"정말입니까?"
"이제 손 떼도 돼."
그녀가 손을 떼고 구슬을 바라보면 선명하게 새겨진 마력성분이 그녀의 적성을 알렸다.
-가학
"너...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거야?"
"아...아....아아...."
그녀는 짚히는 구석이 있는지 말없이 붉어진 얼굴을 돌린다.
"가학적인 재능이라... 드물기는 해. 혈통에서 기원한 거라고 생각하자.
상대적으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억압하고 강제하는 마법을 잘 쓰겠네."
"그... 소녀는..."
"괜찮아."
"그런데 무령님께서는 적성이 피라거나 하신 말씀을 종종 들었는데..."
"아, 신경쓰지마.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 스스로를 잘 모르거든.
내 마력이나 몸 구조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니까,
일단 기본적으로는 피와 생명에 관한 것들이더라고."
"무령님은 그래서 마력을 쓰실때 붉은 연기같은 것이 날리는 거군요."
"어, 평소에는 없어도 되는데 마력을 집중해서 강화하려고 하면... 자."
내 손 끝으로 붉은 전류같은 것이 튀었다.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고, 물같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한데..."
"마력이지 뭐. 마력이 강화되면서 강화한 부위 주위로 날리는거야.
술에서 알코올 날리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저는 좀 놀랐습니다. 아직도 무령님은 어딘가 높으신 것 같아서."
"아냐..."
아직 플로라는 날 잘 모르니까 아주 뛰어난 영기술사, 마술사 정도로만 알고 있다.
뭐 사실 거기까지 알면 마녀라는 사실을 몰라도 거기서 거기긴 한데,
죽지 않고 늙지 않는다는 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또 다르니까.
"자, 그러면 가학에 관한 내용을 생각하면서 마력을 집중해봐.
그리고 충분해졌다 싶으면 앞으로 방출한다고 생각해."
"그, 대상이 없어도 괜찮사옵니까?"
"맞아줄게. 난 마력내성이 높으니까 어느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나한테 쓰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
"그...그게..."
"농담이야. 빨리 시작해."
플로라는 손으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보통은 손으로 모으는게 제일 편하기도 하니까.
눈을 꾹 감고 모으는 기운에 손 주위로 검붉은 기운이 모여든다.
저건, 버건디? 버건디색같은데. 한번 설명한 걸로 이렇게나 깔끔하게 모은다니
내가 보아도 상당히 엄청난 재능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그녀가 허둥거리며 물어왔다.
"그... 무령님!! 이거 어쩌죠 이제..?"
"던진다는 느낌으로."
"네...네에...으아앗!!"
플로라가 마력을 흩뿌리면 그대로 내게 맞는다.
묵직한 느낌이 몸을 옥죄어온다.
이건 아무래도 구속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그, 잘 된 것 같은지 말씀해주시면..."
"처음치고는 완벽한데? 몸이 묶였어. 이 정도면 마력 내성이 없는 사람은 움직이지 못해.
알다시피 마력 내성이라고 해도 체내 마력량이나 운용 수준이니까 그리 크게 저항이 가능한 사람은 잘 없어.
물론 그래도 나는... 흡...!"
구속을 찢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생각보다 많은 마력이 소모되는 바람에 당황했다.
원래 기합까지 필요한 정도로 강한 마법을 쓸 수있는 수준이 아닐텐데.
"어... 플로라..."
"네?"
"너... 아무래도 천재 같은데?"
"예?"
"이미지가 완벽했나봐, 아니면 욕망이 강했거나.
푸는게 생각보다 어려웠어. 이대로만 하면 금방 그 책은 다 마스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부족합니다."
"아냐아냐~ 자, 다음것도 해볼까?"
우리는 그렇게 밤새 수련을 이어갔다.
생각보다 플로라는 마법에 재능이 있었고,
그날 밤이 지나고 나서 플로라는 기본적인 마력 운용과 흐름은 완벽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 침대에서 뭉그적대면 플로라가 나를 조용히 흔들어깨웠다.
내가 일어나면 그제서야 플로라는 나란히 누운채로 활짝 웃어보였다.
활짝. 이제껏 본 웃음중에 제일 가식없고 아름다웠다.
서로 잠옷바람으로 누워서 웃고 있으면 그녀가 말했다.
"일어나셔야지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네가?"
"네, 요리는 자신있으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멍하니 꿈뻑이면 밖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아마 샤워라도 하는 중이겠지.
플로라는 늘 느끼지만 나와 다르게 신체가 입체적이다.
자면서 조금만 뒤척여도 느껴지기 때문에 나는 밤새 그녀가 뒹굴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분이라도 좋은 것인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잠꼬대를 하기에 이젠 행복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해
기분좋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무래도 뿌듯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불행한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그녀를 따라나서면 산해진미라고 생각할 수 있을 요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티들렌은 나를 보고 지난 밤에는 잘 잤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히 긍정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을 치유해 준 것보다는
딸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을 조금 더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무령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사건에서 저희 딸에게 그 남자를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령님께서 너무 많이 챙겨주시는지라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플로라는 무령님께서 오신 이후로 너무나 변했습니다.
더 기품이 있고 우아해졌으며, 성숙... 그래, 사랑을 배운 것 같사옵니다.
이제 에반제인의 가주로서 몫을 해내게 된 것 같아, 이년은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괜찮다. 그래서 딸을 내 아래로 들이려고 하고 있는게 아니더냐.
그리고 아직 멀었다. 내가 직접 관리감독하고 지원하는 만큼 반드시, 이전의 명성 이상 부흥해야 할 것이다."
역시 이런 말투는 익숙해지지 않았으나 티들렌이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무 죄송하다고 말하고 내 품위를 세워주려고 하는 바람에 별 수 없었다.
덕분에 종종 체헤게가 그걸 보고 내 말을 따라하며 나를 놀리곤 했다.
죽은지 백년이 지났는데 철이 안드는게, 남자는 그런 생물이라고 말하던 마녀가 떠올랐다.
"그 말이 맞사옵니다... 정말..."
티들렌은 나를 너무 맹신하고 있었다.
신은 이런 기분이구나. 나쁘지 않았다. 조금 부담스러울 뿐.
그건 아마 내가 신이 아니라서 이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뤄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부담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무령님, 젤렌지의 아들과 부인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혹 모르신다면 제가 설명해드려도 괜찮겠사옵니까."
"마침 궁금했어."
"황제께서 명하시길, 아들은 그 저택을 물려받게 될 것이며, 작위는 자작으로 격하한다.
또한 그 아내를 제외한, 인간으로서 대우할 수 없는 이들은 모두 화형될 것이며,
그 죄에 따라 200캐럴을 무령 에리아에게 배상하라. 고 하셨사옵니다."
"성대모사 잘하네?"
"헤헤, 연습 좀 했사옵니다."
"무령님, 너무 받아주지 않으셔도 괜찮사옵니다. 플로라. 너도 자중하렴.
대공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경박하게 무엇하는 것이냐."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님."
"그래, 그러면 되었다. 그런데 무령님. 혹시 그 창고에 거대한 기계는..."
"아, 내 것이다. 혹시 문제라도?"
"아, 아니옵니다. 특별히 어제 공수해온 고급유로 닦아 광을 내고 솔질을 해 두었사옵니다.
무령께서 그 기계를 종종 타고 다니신다고 들었기에..."
"그런가. 고맙다."
이 말투 너무 거슬려. 체헤게라면 아무 문제없이 밥먹듯 하겠지만,
나는 이런 딱딱한 말투는 싫었다.
"그리고 고양이는..."
"애니 말이냐?"
"예. 저를 참 잘 따릅니다. 무얼 먹여야 할지 잘 몰랐기에 정어리와 염소젖을 먹였습니다.
정말 길이 잘 든 아이라 그런지 무령님의 격을 잘 알 것 같았습니다."
"애니는 마음에 드느냐?"
"너무 귀여운 아이였고, 플로라가 저택을 나가면 저를 적적하지 않게 도와주어,
무령님께서 얼마나 공들여 키운 아이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를 불러야겠구나."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티들렌은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가서 애니를 데려왔다.
아주 편안하게 안겨 갸르릉대는 모습이 무슨 인형같다.
하긴 순수한 고양이도 아니고, 사역마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애니, 편하니?"
"애옹."
"전에 말했잖아. 언젠가 헤어져야 할 거라고."
"냥..."
"난 그래서 에반제인 부인에게 널 맡기고 싶어. 어때?"
"냥냥..."
"무령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받을수가 없습니다!
어찌 무령께서 키우신 고양이를..!"
"그 고양이는 나와 함께하지 못한다. 나는 이제 그 아이를 키울 여유가 없느니라.
그래서 애니에게 묻는 것이다. 혹시 애니가 있으면 불편한가?"
"아니옵니다... 오히려... 얌전하고 착한 아이라... 적적하지 않고 좋습니다.
고양이를 하나 입양할까 생각한 차였나이다."
"애니, 결정했니?"
애니는 티들렌에게 얼굴을 부비며 갸르릉대었다.
대답은 더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 애니는 부탁하지."
"하지만, 저는 받을 수 없나이다..."
"왜지?"
"저는 이제 얼마 살 날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내 피를 받았다. 문제 없을 것이다.
그대의 수명은 보아하니 앞으로 50년 남짓은 남아있다. "
"이 고양이가 먼저 떠난다면 저는 더 외로울 것입니다."
"그 고양이는 아직 8번의 목숨이 남았지. 애니가 너를 먼저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니가 한 번도 허투루 죽지 않는다면 그대의 10배는 족히 살겠군.
늙어죽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이 고양이는 그럼 이후로 누가 관리하겠나이까..."
"플로라가 관리할 것이다. 플로라. 손을 내밀어라."
"네, 무령님."
나는 그녀의 손으로 천천히 계약의 주문을 옮기기 시작했다.
애니를 처음 고양이로 환생시켜 사역마로 부리기로 했던 순간의 계약.
그것의 소유주를 내가 아닌 플로라로 옮긴 것이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티들렌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죽겠지만
플로라는 내가 관리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검은 기운이 스르륵 옮겨가고 플로라의 손 위로 검은 색 고양이 무늬가 새겨진다.
고양이의 측면을 옮긴 듯한 무늬. 그 무늬 한가운데에 흰 글씨로 8이라고 써있다.
"애니는 이제 너의 사역마가 되었다.
그 손등에 새겨진 숫자가 0이 되기 전까지는 애니는 죽지 않는다.
애니를 부탁하마."
"무령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기르겠사옵니다!"
아무래도 역시 여기에서 지내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