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규율은 엄격할 것이며
플로라는 식사 후에 일을 해야 한다며 나가버렸다.
나는 티들렌과 둘이 남아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시종일관 품위를 잃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플로라는 아직 너무나 미숙합니다."
"알고 있어."
"그리고 여립니다."
"알고 있어."
"조금만 더 제국에 남아 플로라를 돌봐 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건 안돼. 나도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게 무령이라는 직책은
그저 방해받지 않기 위한 용도지, 내가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휘두르기 위한게 아냐."
"그건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는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플로라를 연구소장으로 만들거야.
지금 에반제인가의 소득은 담배와 역세권으로 들어오는 수입, 지역 세금이지?"
"그렇습니다. 허나 담배는 이미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역세권과 세금으로 대공가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15년 이상의 시간이 걸려.
그래야 대공가로서 명맥이 이어질 정도의 생활 수준이 되겠지."
"그 이전까지는 적자이기에 저희도 어려운 상황이옵니다."
"그래서 연구소를 수입원으로 추가하는거지. 지금 플로라는 영기술을 배우고 있어.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 재능은 단순히 광대나 유희로서의 재능이 아니야.
타인의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적절한 도구로서 기능하겠지.
나는 그 역할을 스스로 온전히 해낼 수 있게 도와줄 뿐이야."
"여기서 더 잡아도 그건 억지일 뿐이겠군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금방 끝났다. 나는 체헤게를 불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 머리가 금방 길어졌네."
[그렇군.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고생한거랑 머리가 자라는건 무슨 연관성이 있지? 빠진 머리는 없었는데."
[하루가 일년 같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실없긴."
체헤게는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여전히 길거리에는 노예들이 있었고 뒷골목에서는 서로 살을 부대끼며 뒤엉킨 이들이 교성을 뱉었다.
귀족들은 여전히 그들을 기피했다. 변한것은 없었다. 하나도.
내가 굳이 이 아침에 거리로 나온 이유는 젤렌지 가문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황제의 명으로 인해 나는 그에게 받아낼 돈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작 당사자인 젤렌지는 도망쳤으니
위협이 될 자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집안에서 일하던 집사나 메이드는 모두 가구가 되거나 박제되었고
대다수는 실혈사나 쇼크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내를 제외한 인간이 아닌 이들은 모두 죽였을 때, 그 집에 남은 거라고는
운전수 하나와 아들, 아내와 비서 하나 정도였다.
우리가 다시 그 집을 찾았을 때, 노예들이 이미 그 앞에 진을 치고 오줌을 누거나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제롬을 모욕하고 있었다.
"야~ 느그 애비는 노예라면서 너는 자작이라고?"
"병신같은 새끼들! 노예를 부리지도 않더니 기어이 거지꼴이 나는구나!"
"인간을 가구로 만들수가 있더냐 이런 천인공노할 버러지들아!"
가만 보니 그 중엔 노예가 아닌 평민이나 남작도 섞인 것 같았다.
이전까지의 젤렌지가 있었다면 가만 놔둘리가 없을텐데 지금은 저 가문 역시 비참하게 몰락한 가문일 뿐이다.
제롬의 얼굴이 창문에서 잠깐 비췄다가 커튼 틈으로 사라진다.
"체헤게."
[무슨 일이냐.]
"저 앞에서 진치고 있는 새끼들 다 죽여버려."
[본부대로 하지요 무령님.]
체헤게가 나타나면 그들은 잠깐 멈칫한다.
그리고 그 뒤에 선 나를 보고 당황하며 뒤로 물러서려고 하지만
그것도 금새 막혀버린다.
체헤게는 길게 끌지 않았다.
한 명당 딱 한대. 그 한대로 그들은 숨을 거두었다.
단순히 주먹을 내리친 정도지만 그들에게는 강한 힘이었다.
머리가 파인 자들도 있고, 목뼈가 뚜두둑 소리를 내며 파고들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나는 체헤게의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다 꺼져. 재수없게 앞에서 판벌리고 떠들지 말고."
그들은 나를 보고 허겁지겁 도망쳐버렸다.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그들이 남긴 것은 흑갈색으로 더럽혀진 천조각이었다.
나는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안쪽에서 덜그럭 소리가 나면서 휠체어가 나왔다.
젤렌지의 아내였다.
그녀는 말 대신 무어라고 손을 움직일 뿐이었고 옆에 서 있던 제롬이 우리를 맞았다.
"이렇...게 먼 걸...음 하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무령님..."
더듬더듬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의 어머니가 일러주는 대로 나에게 읊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됐어. 가봐야 하니까 돈이나 가져와."
그 말에 제롬이 탁탁탁 튀어 방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능히 200캐럴을 넘길 것 같았다.
[체헤게, 들어.]
상자를 체헤게가 받아들고 나서 우리는 말 없이 돌아섰다.
"저...저기... 벌써 가십니까?"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축복같은건 못해주겠는데, 너도 악착같이 살아남아.
패배자 떨거지들한테 무시받지 말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저택을 나섰다.
내가 그렇게 노예를 죽였는데도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널브러져 죽은 시체 6구는 금방 치워졌다.
이번 사건으로 황실에서는 귀족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결론을 내렸다.
효율을 중시하고, 실적이 없으면 강등시키는 원초적인 방식을 택했고,
전체적으로 오등작의 수는 또 감소했다.
그렇게 또 2주가 흘렀다.
콜로세움은 새로운 도전자를 모집하고 있었고,
플로라는 약학의 기본과 심화를 공부해 실전에서 쓸 수 있게 되었고,
줄어든 귀족들은 더 가혹하게 노예를 굴렸다.
"이 나라는 이래도 변하지 않는구나."
[변할 수 없는게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거지.]
"불평등함이 방치되었지만 효율성은 늘어났어."
[결국 노예는 어떻게든 보충이 되는군.]
법이 수차례 개정되었다.
결국 원인이라고 하면 나와 젤렌지였다.
그러나 그걸로 변한 것은 왕의 기분 정도였고, 실제로 변한 것은 없었다.
노예들은 여전히 살기 힘든 시대였다.
며칠간 게비디와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게비디는 내게 생각보다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연구소에서 새로 만들어낸 신약에도 흥미가 많아 보였다.
일전에 내가 콜로세움에서 맞았던 질퍼스를 연구하던 와중에
주 성분의 비율을 달리해서 냉각했을 때, 생기는 침전물을 따로 덜어내니
효과좋은 마약이 탄생했는데, 쾌감은 별로 없지만 중독성이 심각했다.
그걸 게비디는 한몫 단단히 챙겨 뒷세계에 유통했고, 이것으로 부를 축적했다.
질퍼스는 금새 국외 반출이 금지되었다.
나는 그다지 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대 연구소 총 책임자 중 제일 유능한 인재가 되었다.
이 물질은 어쩌다 내 이름이 붙는 바람에 에라옥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에라옥신 덕분에 담배의 유통은 점차 사그라들다가 꺼져버렸고
플로라는 드디어 지긋지긋한 담배 유통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연구소에서 제조된 에라옥신의 수익 일정 %가 에반제인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처사에 우리는 대개 기뻐했으나 이를 탐탁히 않게 받아들인 자들 역시 존재했다.
다른 대공가의 경우에 영지에서 온통 뻑뻑대며 피워대는 에라옥신의 연기에 중독되지 않은 이가 적었고
이로 인해 피해를 크게 보고 있다며 화를 내기도 했으니까.
그걸 황제가 적당히 조율해 주겠다고 말하며 방치했다.
플로라는 언제든 에라옥신이 아니더라도 살 길을 마련해둬야 한다며 에라옥신에 의지하지 않고
연구소에 꾸준히 투자했다. 확실히 더 현명해졌다.
플로라는 에라옥신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체내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하더니 마약 성분이 조금이라도 들어오면 다시 방출하거나 없애버리곤 했다.
여타 귀족들의 중독증세가 점점 더 심해질 수록 플로라의 입지는 빠르게 상승했다.
그리고 확실히 제국의 귀족들은 둘로 나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독자들과 에라옥신 미흡연자. 그러나 실상은 에반제인 대공가와 엔시온 대공가로 나뉘었다.
이들은 국가를 휘어잡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에라옥신에 빠져든 데레코즈 대공은 실권을 거의 잃었다.
그저 명성만으로 유지되며 종종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사간다고 말하곤 했다.
플로라는 적당히 일을 정리하고 대공으로서 업무와 연구소장으로서 업무 두가지에만 집중했다.
황제의 신임을 얻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녀는 황제와 안면을 튼 사이였고, 그녀의 재능은 황제도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나와 플로라를 묶어 '제국을 중독시킨 여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일부 시민들이나 귀족들은 대공이나 무령이라는 직급보다 포이즌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덕분에 체헤게는 또 바닥에 드러누울 것처럼 웃어댔다.
나는 연구소에서 지급되는 모든 도구를 직접 챙겼다.
어차피 내 앞으로 내려온 것이니 가져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재료로 다양한 도구나 포션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 과정 중에서 우연히 알게 된 유전자 연구에서 크기와 질량을 결정하는 요소에
마력이 실리게 되었을 때, 이를 임의로 약품을 가지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내 가게로 만들어진 상담소를 어디서나 불러낼 수 있었다.
공간을 옮기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는 곧 내가 어디에 물건을 놓건 바로 내 앞으로 공간을 이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웜홀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연구소에서 나온 포션을 상담소에서 판매했다.
그건 규모가 상당히 작았지만 줄은 상당했다. 마치 내가 운영했던 카페처럼 말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전에도 그랬듯 예약제로 바꿔 운영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나라고 상담소에 하루 종일 쳐박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연구소에서 나름 총 책임직을 맡은 사람이었고, 플로라를 가르치기도 했으므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내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걸 내가 스스로 느끼고 있어서인지 플로라, 체헤게, 게비디 그 누구도
내게 언제 갈 것이냐는지 하는 질문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하루하루 늘 내 앞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게 내게는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다.
우리가 가까워질 수록 떠나야 할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먼저 입밖으로 내고싶지 않았다.
각자 서로 맡은 일에 충실하고 싶었다.
누구 하나도 떳떳하지 않았고 더욱 그럴 수 없었다.
솔직하게 가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고,
또한 가기 싫지만 가야 한다고 말하는 내 얼굴을 웃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나도 어떻게든 웃어보였지만
그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불만족일 뿐이었고 마뜩찮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오랜 눈치게임을 끝낸 것이 나였다.
"다들 너무 고마웠어. 난 내일 제국을 떠나려고 해.
물론 보고싶을 거고, 생각나면 언제든 돌아올거야.
내가 어떤 생각으로 이 말을 꺼낸건지는 다들 알거라 생각해.
나는 이 나라에 모험가가 되기 위해 왔고, 필요 이상으로 잘 해준 너희에게 고마워.
이제껏 했던 것처럼 명령할게. 웃어. 알겠지?"
"푸흐흐.... 마지막까지 한결같으십니다 무령님.
저 게비디, 무령께는 그런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가시면서 뭘 그렇게 오늘 분위기를 잡으십니까?"
"맞사옵니다. 공녀 또한 아직은 이별을 전하기에 이르다고 생각하옵니다.
우선은 오늘은 편히 쉬시지요. 음식은 준비할테니 함께 만찬회라도 가지시지요."
"대공, 저도 껴도 괜찮겠습니까."
"어머? 여자들끼리만 놀려고 한 건데 오려고?"
"아..아닙니다..."
"농담이야. 네 자리도 준비되어 있느니라. 시간 맞춰 오거라. 밤 10시다."
"꼭 찾아 뵙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이 제국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되었다.
여차저차 그렇게 오늘, 나는 일과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