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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화 〉변화가 시작되리라. (73/303)



〈 73화 〉변화가 시작되리라.

늘 쉬던 저택이지만 초대를 받아 가게 되니 감회가 다르다.
아무래도 조금  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저택이 확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여유로워진 공간에서는
하녀들과 집사 조금이 일하고 있다. 플로라는 하인들을 한번 갈아엎는다는 명분으로
다른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새로 집사와 하녀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종종 그들이 왜 이렇게 적은 수로 저택을 관리하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도도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강압마법을 사용한 후에,

"그대들도 제대로 1인분을 해내지 못하는데 어찌 새로운 하인들을 교육하겠는가.
새로운 하인을 고용하지 않는 것은 아직 그대들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판단에 불만을 제시할 생각인가?
교육을 완벽하게 해내서 내 마음에 들 하인을 만들 수 있는가?"


라고 말했고, 그들은 분위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수긍했다.
나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긴장했었지만
어째 분위기는 풀려있고 다들 손에 술 한 잔씩을 들고 있다.

"다들 좋아보여 다행이야.  금방 익숙해   같네.
벌써 여기서 몇 달을 보낸 것 같아."

"한달 정도 보내셨습니다."


게비디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잔을 기울였다.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샴페인이었다.

"그나저나 황제도 대단한 사람이야. 이렇게나 내 편의를 봐줄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시니까요. 우선 제국 역사상 연구소에서  단기간에 약품이 쏟아져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또한, 크고작은 사건들도 있었잖습니까. 일단 콜로세움 우승부터 젤렌지 후작건도 그렇고.
단순히 이름값만 생각해도 싸게 먹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 하게 되면 늘 느끼는 거지만 이름값이라니?
나만 모르는  아냐? 무령님도 그렇게 계시지 말고 저한테도 알려주세요."

플로라는 아직도 내 나이를 모른다. 마녀라는 걸 밝힐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알려주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쿡쿡 웃고 입술에 검지를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내면 그녀는 입이 뾰족 튀어나와 와인을 홀짝인다.
그리고 바닥에서 고로롱거리는 애니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게비디에게 핀잔을 던진다.

"나중에 따로 자세히 들어야겠어."


"안됩니다. 무령님 명령이시니까요. 하하..."


"그래도 한결같아 다행이네."


나는 그렇게 구워진 칠면조의 다리를 뜯으면서 말했다.
원래 퍽퍽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한 건지 껍질이 바삭하고 육즙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훈연한 향과 살짝 튀는 후추향이 좋았다.


"정말 무령님 덕분에 콜로세움에도 활기가 늘었습니다.
저들은 자세한 내막을 모르니 말입니다. 콜로세움 우승 소원으로 무령이라는 작위를
내려받은 것으로 아는 자들이 늘어나 단순히 노예들 외에도 기사나 용병들도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난이도도 올라가고 인기도 좋아졌지요. 덕분에 요즘 주머니 사정이 꽤 넉넉합니다."

"한달치고는 너무 많이 변했지 아마?"


"아뇨,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국은. 무령님께서 위에 올라서신거죠."


그 말에 플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무령님을 모르는 이들이 거의 없어요."

"제국 내에서만 그랬으면 좋겠네. 굳이 해외까지는... 힘들 것 같아."


게비디는 살짝 손을 흔들면서 부정했다.
두꺼운 손에는 큼직한 고기가 들려있다. 그는 그걸 질게 뜯어내며 말했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국의 노예들은 제국 밖으로 도방치는 일이 거의 없어요.
나가봐야 숨어살게 되겠죠. 애초에 제국의 노예가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안카숲? 그게 아니라면 해로? 안카숲은 헤메다 죽을게 뻔하고, 항구에서 노예가 승선하는 건 불가능하죠."


"아, 너 모르는구나? 퀘트로네스 북서쪽으로 산이 있어. 콜로세움에서 도망친 자들이
주로 거기로 도망친다고 하던데. 그리고 동쪽으로는 미로도 하나 있었지 아마?
서쪽으로 쭉 달리면 티리시안 산맥도 있고. 그 산맥을 넘으면 대장간으로 이어지지."

"아, 그렇습니까.설마 티리시안 산맥을 넘을 생각을 노예가 할 지는 모르겠군요.
거기까지 가는 길만 해도 족히 몇달은 더 걸릴 겁니다. 차를 기준으로 말이죠.
걸어서 도망친 노예가 갈 수 있을리가요. 그리고, 북서쪽의 산 말입니다만, 빠른 시일 내로 조사해보도록 하죠."

"너무 팍팍하게 대하지는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명심은 뭘. 파티잖아? 마셔! 아 그리고  소스 좀  가져다줄래?"

그렇게 말하면 저택에 있던 하녀 하나가 달려와 소스를 가지고 돌아간다.
블루베리로 만들었다는 소스가 상당히 산미가 있고 달콤해서 좋았다.
고기에 찍어먹기 좋은 소스다.
우리는 밤 새 마시고 떠들었고 밤이 늦어서는 거의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대화를 했다.
하인들은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미리 음식을 일정량 덜어주고 자리를 물리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에 심히 기뻐하며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렇단거지!"


"아아니이~! 그게 아니라요오! 제가 워내서 그런게 아니자나요오~"


우리는 가학적인 성향의 마력이 나타난 플로라를 놀리고 있었다.

"구..구루케 따지면 언니두 피가튼 마붑 쓰자나요오!!"

"나는 생명력이거든? 난 건전하거든?"

플로라는 술이 약했다. 나와 게비디는 취하지 않아 대화가 자연스러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어쩌면 게비디도 술에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냥 저게 취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건 붉은 얼굴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두분은 참 사이가 좋군요. 저도 마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군요.
분명 저도 가학이나 피 사이 무언가였겠죠."

"그런가?"


체내에 마력이 없는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게비디는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게비디는 엘프의 피가 섞여 있으므로 마법 적성이 높다.
자기 스스로 오크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마력은 신체를 강화하는데 온전히 쓰이고 있다.
나는 그렇게 순도높은 마력을 본 적이 없다. 마력의 특성 자체가 단단하고 오밀조밀하게 구성된 튼튼한 마력이다.
그런 마력을 어지간한 마력회로를 가지고서는 버틸 수 없다. 혈관 찢기듯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그의 마력회로 자체가 너무나 튼튼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엘프의 마력에 오크의 육체. 그가 콜로세움의 지배자로 군림할  있는 이유이다.
그걸 굳이 내가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밤을 보내고 다음날이 되었다.
나는 체헤게와 짐을 챙겨 밖으로 나섰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마중을 나와준 플로라와 킬레리에게 인사를 했다.
게비디는 바빠서 나올  없었다고 한다. 하긴 콜로세움이 또 새로운 시즌을 시작했으니까.


"그놈의 콜로세움이 뭐라고 무령님 배웅도 나오지 않고. 건방진 자가."

"죄송합니다. 대신 사죄드립니다."

"킬레리 주제에 네가 뭐라고 대신 사과를 해?"


"그만해 플로라."

내가 한마디 하자 언제 그랬냐는  표정을 푼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겠지.


"네, 면전에서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콜로세움 주기가 한달이라고 했나?"


"네. 과거 기록을 보면 원래 날마다 진행하던 것을
규모를 확장하면서 그렇게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참가자는 난전의 형태로만 진행했다고 나와 있었기에 선수들의 휴식이 부족했고,
실력이 없는 자가 승리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렇구나."


[언제까지 이야기 할 건가?]


[왜 그렇게 심통이 났어?]

[어제 음식이며 포도주며 상당히 고급품 같더군.]

[안줘서 삐쳤구나?]


[하아... 먹지도 못하니 의미야 없다.]


[허세는. 됐네요. 그렇게 계속 꽁해있어라.]

"그래, 잘 있으라고 전해줘.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올게.
그리고 알지? 부탁한 상담소. 네가 운영하는거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그들과 인사를 마친 후 국경밖으로 나갔다.
눈이 밝은 노예들 몇몇이 뒷골목으로 도망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품에 안은 것은 분명히 총이었다. 권총.
아무래도 제국에는 또 한번 변화가 시작될 것 같았다.
어떻게 끝날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국경 밖이라고 해도 내가 왔던 길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남문으로 들어왔지만
지금은 동문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동문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따라가면 오래 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미로가 있다.
자갈길은 걷다보면 점차 마른 흙으로 변해가고, 흙길로 이어진다.
바자락거리는 바닥을 밟으면서 나는 계속 걸어갔다.
분명 차로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걸어서는 훨씬 걸릴 것이다.

당연히 노숙을 해야 했고 플로라가 따로  줬던 샌드위치는 첫날에 다 먹었다.
둘째 날부터는 그냥 굶으면서 갔다. 원래 요리도 신선할 때 먹어야 한다.
아껴두면 썩기밖에  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날을 걸었다.
내가 지쳐 쉬었다 가자고 말했을 쯤, 체헤게가 내게 말했다.


[그렇게 피곤하면 내가 안아들고 가도 된다.]


"됐어. 승차감 별로라니까."


걷다보면 주변에 서서히 안개가 끼는 것이 느껴진다.
표지판에는 <이 앞으로 기억의 미로> 라고 쓰였다.
발은 멈추지 않는다.
그걸 위해 여기로 온 거니까.

한참을 더 걷다보면 드디어 저 멀리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는 돌의 미로가 있다.
내 키의 세 배는 되어 보이는 돌들이 늘어서있는 미로 앞으로는 점차 안개가 심해져
발 밑에 색을 다르게 해 둔 길이 아니라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똑바로 걷는다고 느껴도 결국 틀어질 수밖에 없다.

"기억의 미로라."


[왜 기억인지는 알 것 같다만.]

"미로의 특성이 망각이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비석들이 길거리에 투박하게 박혀있다.
이 미로에서 숨을 잃은 자들의 묘비인 것 같았다.
제일 오래된 것 같은 비석에는 휘갈긴 것 같이 쓰인 고대어가 있다.

"고대어네? 요즘에는 이런거 읽지도 못할텐데."

[뭐라고 써 있지?]


"어디보자, 내 오랜 전우이자 스승인 영원한 망각의 탈린을 이곳에 두고 간다.
이곳은 영원히 잊어가는 그녀의 안식이 되어주길 바라며 나는 이곳에 그녀를 봉인했다.
최초의 인간 아르간티아가...? 아르간티아라고?"

[상당한걸 읽어버렸구만.]


"영원한 망각? 뭐지..."


[그걸 알아보려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 아니냐. 가자.]


"응..."

[왜 그러나?]


"뭔가 불안해서 그래. 신경쓰지마. 별 일 아니겠지. 가자."

커다란 미로는 얼핏 보기에도 어지간한 도시 하나정도의 크기 같았다.
여길 헤메는 걸 생각하면 벌써 막막했다.
모든 미로는 왼손이나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따라가면 출구를 발견하기 마련이다.
그걸 알고있으면 절대 헤매지 않는다.
우리는 그 입구로 발을 디뎠다.
미로 안은 역시나 당장 1M앞의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발을 들이자마자 올리브가 말한대로 아주 깊숙하게 침투해오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나를 지치게 했다.
이 감각을 이겨내고 안쪽으로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그 밖의 함정은 없었다.
오히려 평온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벽에서 손만 떼지 않으면 나는 반드시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리고 들어오는 길을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미로의 구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돌아갈수 있다.


"최근에는 구조가 변하는 미로도 많으니까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닌데,
아니길 빌어야지. 일단 여기서 죽은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하니까."

[여차하면 정말 갇힐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길 바라는데, 고대에 그런 기술력이 있었는지는 모르니까."


한참 걷다보면 군데군데 죽은 인간의 뼈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
쉽게 부러지는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피가 튀었다거나 한 것은 없어, 보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가끔 코너를 꺾으면 쥐나 들짐승들이 돌아다니곤 했다만 그정도 외에는 큰 위험은 없었다.


[정말  끝에  여자가 있다는 건가?]


"그렇다고 하니까 가 보려고. 아마  여자가 탈린이겠지."

[그건 모르는 일 아닌가?]

"일단은 만나야 물어볼 수 있겠지."

그렇게 한참을 걸었지만 여자는 고사하고 무엇도 나타나지 않았다.
밤낮이   바뀌었을까, 잠을 자지도 않고 한참을 미로에서 헤맸다.
그럴 때마다 제국에서 편하게 지냈던 생각이 난다.
잠깐 지냈을 뿐인데 대우받고 살던 순간의 기억은 뒷목을 타고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런 감각. 잃어버린 쾌락을 다시 얻고 싶어하는 기억이 제국을 만들었다고 했지.
그런 의미에서 이 미로가 제국 옆에 있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대체 누가 처음으로 이 미궁을 발견했을까.
물론 지어놓은 것은 아르간티아일 것이다. 고서적에서만 보았던,
그리고 성서에서나 등장하던 아르간티아가 지어놓은  건물.
지금까지 고대어를 쓰는 연구자가 나만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걸 발견할 때까지 이 미로의 출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 고대어를 아는 인간들은 미로에 홀려 미로에 관한 기억을 잃었거나,
빠져나오지 못했단 의미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점점 이 공간에 흥미가 돋는다.
그렇게 우리는 미로의 처음으로 돌아왔다.
허탈함에 체헤게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건 이제 들어가보면 알겠지.]

"뭐?"


[들어가보지도 않았는데 뭘 기대하는 것인가.]


"방금 들어갔다 나왔잖아?"


[그럴리가. 난 들어간 적이 없다. 빨리 들어가지.]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들어갔다고 착각한 것인가?
이 미로는 명백히 나를 유인하려고 하고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과 기계의 기억력. 그 차이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평소 같다면 당연히 내가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공간의 짙은 안개는 정말 내가 들어간 것이 맞는지 의문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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