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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망각의 미로 (74/303)



〈 74화 〉망각의 미로

결국 다시 딛은 발은 미로 속으로 향한다.
발을 딛자마자 차디찬 한기가 발끝에서 피어올랐다.
자박대는 소리를 반주로 걸으며 다시 오른 손을 벽에 짚고 나아가면
다시 눈 앞으로 안개가 밀려온다.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감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고
감정적인 불안은 눈 앞의 현실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내 뒤에 따라걷는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진정되지 않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까 보았던 해골, 그리고 아까 보았던 것 같은 쥐, 아까 본 것 같은 벌레.
모든 것들이 기시감을 전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또한 낯선 분위기는 내 발을 한없이 무겁게 만들었다.


"체헤게."

[무슨 일이냐.]

"우리 말이야, 지금  번째 들어오는 거 맞지?"

[처음일거다.]


"그래..?"

[아마...]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너무나도 스스로를 믿을  없어서 그 불신이 기억에 근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내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고작 기억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망가뜨릴 수 있다는걸
이제껏 머리로만 알고 있었다.

직접 당해본 혼란은 쉽지 않았다. 머리를 헤집어놓는 것 같은 싸늘한 안개에
나는 몇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하며 발을 뻗을 뿐이다.
다시 주변이 또 어두워진다. 주야가 반복되는 감각은 있는데,
밝기 말고는 그 무엇도 나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건 아주 오랜 시간처럼 다가온 내 망각이었다.
이윽고 내가 발을 뻗을때, 눈 앞을 가리던 안개가 장막이 걷히듯 사라져간다.
어느새 나는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도 여자는 보지 못했다.


올리브가 날 속인 거였나? 여자같은게 있을리가 없나?
그럼 왜 사람들은 이곳을 두려워했는가.
단순히 미로 때문에? 기억을 잃어서? 어쩌면 나오지 못해서?
그럼  사진은 왜 존재하는 걸까.
모든 것이 흐릿하다.

"체헤게."


[왜 부르나.]


"결국 여자는 발견하지 못했잖아. 다시 들어갈거야?"

[다시라고?]


"우리 지금 두 번째 다녀왔어. 알지?"


[무슨 소리인가. 이제 막 들어가는 거잖나.]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갔다 나왔잖아? 아무 것도 없었고 뼛조각이 굴러다니고.
쥐들이 벌레와 함께 쏘다니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데!"


[안되겠군. 일단, 일단 나가지.]


그는 내 손을 끌고 안개밖으로 걸어나갔다.
바닥에 그려진 선. 자갈과 모래의 색차이를 어렴풋하게 구별하면서 걸었다.
원래 자갈과 모래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나의 감각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발에 밟히는 자갈소리는 이상하게 사부작대는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가 걷히리란 믿음을 가지고 걸었음에도
우리는 안개속에 여전히 갇혀있었다.


"체헤게, 우리 언제쯤 나갈 수 있어?"


[이제야 막 들어왔는데 나가자는거냐? 여자를 찾아보고 싶다고 했잖나.]

"무슨...무슨 소리야? 우리 지금 두번이나 둘러봤다고."


어느새 주위를 돌아보면 미궁의 입구였다.
분명히 나가려고 했는데도 나갈 수 없었다.
 공간에 그저 갇혀버려서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고만 있다.


"여기 뭔가 이상한데..."


[이상한건 그 여자를 찾고 나면 물어봐야겠군.]

"그래, 들어가자."

나는 다시 미로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점차 심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사방은 돌로 막혀있고, 이제는 눈 앞만 겨우 보일 수준이다.
여기서 얼마나 더 헤매야 하는지 감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때,
체헤게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우리, 여기  번째 들어오는거지?]


"세 번."


[어디서부터 잘못된건지 모르겠군.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애매하다. 몬갈리오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도는군. 미안하다.]

"일단 진정해. 여긴 기억과 망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고 했으니까.
침착하게 일단 걸어보자. 혹시 우울이나 무기력도 있어?"

[확실히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기는 하다.]


"큰일이다. 빨리 나가자. 뛰어!"

[그래, 일단 가지.]


쿵쿵 달리면서 우리는 한참을 나아갔다. 미로의 구조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내 기억속 그대로다. 그러나, 미로 속에서 보았던 뼈, 생쥐, 벌레는 왜인지 계속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이러니까 사람이 갇혀도 나올수가 없는거군."

[동감한다. 이런 곳에 방치되면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나가야 하지?"


[나가는 것도 문제지만 일단 머릿속에 옛기억들이 떠오르는 것도 문제군.
기억은 그대로다. 그런데 좋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던 이미지들이 불쾌하다고 느껴져.]

"불쾌하다고 느껴진다는게 무슨 의미야?"


[반 강제로 느껴지는 무기력과 외로움이 감정을 놓아주지 않아서
떠오르는 기억에 스며들어 버리는 거다. 기분이 좋진 않군.]


"빨리 나가야  것 같아."

다시 달리면 이번에는 주위가 조금 밝아진다.
뭐가 바뀐 걸까. 잘 모르겠다. 그저 명암이 공명하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서
나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억은 내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영영 잡히지 못할 곳으로 떠난 것 같다.

"생각이... 나질 않아."

[망각의 전염이라는 건가?]

"아냐, 아주 오래된 기억이 떠오를 것 같은데, 왠지 기억이 불안정해."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라면, 수백년 전인가?]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르겠어.
이건 내 기억이 맞는 걸까? 주입된 기억이라고 하면 어쩌지?"

[그건 무슨 의미냐?]


"미궁에서 내 기억을 간섭하려고 하면, 그래서 나는 엉뚱한 기억으로 살아가면서
정작 가까이 온 단서를  앞에서 놓쳐버리면 정말 스스로 용서가 안될 것 같아."


[걱정하지 마라. 나도 기억 만큼은 그대로인 것 같으니.]

"네 기억은 믿을 수 없을  같아."


[내 기억을 믿을  없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야. 우린 여기 세 번째 들어왔다고. 그런데 넌 아직도 한번이라고 생각하지.
그 자체가 너의 기억을 믿을  없는 증거야."

[오, 그런가? 좋다. 한번 그럼 네 기억대로 해 보시지 그래.]


"우리가 싸우려고 들어온건 아니잖아. 정신차려. 우린 지금 감정적으로 너무 예민해져 있어."


[그래, 그렇군. 진정하지. 이야기하고 싶은 걸 말해봐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기억을 잃기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 사람일까?
어쩌면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


[그럴 수도 있겠군.]


"나는 기억으로 존재하는 걸까? 이 기억이사라지고 나면 나는 내가 아닌가?"


[같은 몸에 같은 뇌를 가지고 같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다른 인간이 된다는 건,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난 이 기억이 이제 내게 남은 모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기억을 잃기 전의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은 이제 한 명도 없잖아. 그럼 기억을 잃기 전에 내가 존재했다는건
대체 어떻게 증명하면 되지? 내가 기억을 잃기는 했을까?"


[좋은 질문이지만, 우선은 여길 벗어나고 계속 생각해보지.]

다시 주변은 어두워진다. 주야가 바뀌는 감각. 그럼에도 온도는 변하지 않았다.
계속 유래없는 우울함을 뿌리고 서늘한 감각 속으로 나를 억지로 밀어넣는 이 공간이
어떻게 해야 나를 놓아줄지 나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온다. 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그 여자를 만나야 할 텐데.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더 착잡하다.

[가진게 너무 많아서 놓을 수가 없으니까 집착하게 된다고 그랬었나?]

"누가, 내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라서 그랬다.]


"가진 것도 없는 우리가 뭘."

[혹시 모르지. 변화가 필요한 걸지도.]

나는 그 말에 내 손을 내려다 보았다.
작은 손. 농담이라도 크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손을 가만히 흩어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샌드위치 대신에 술이라도  병 달라고 할걸.
괜히 뻘생각이 나니까 망설여지네."

[망설여지는건 겁 때문인가?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일단 들어가보는게 나을  같은데.]


"4번째. 우리 지금 4번째 들어가고 있어."

[그렇군.  나는 계속  감각이 낯선 건지 모르겠군.]


"모르는게 정상이겠지. 나는  내가 이런걸 셀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고."


[셀 수 있는게 궁금하다?]

"비정상 가운데에 정상이 하나 있다면  자리에서 제일 눈에 띄는건 정상이잖아.
 걸리는 망각의 전염이 나를 빗겨간다는건 나도 무언가 있다는 이야기일텐데."

[확실히 너에게 뭔가가 있는 것 같군.]


"다시 들어갈까."


체헤게를 뒤에 두고 다시 미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벽면에 손을 짚지도 않았고 따로 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어떻게든 되라는 생각을 하고 발을 내딛었다.
분명 단 두걸음.  발자국 떼었을 뿐인데 뒤 돌아본 자리에는 체헤게가 없었다.

"어...?"

다시 뒤로 돌아 나가려 하면 방금 들어온 입구였음에도 사라져있었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내가 알던 아까 본 그 길인데,
뒤를 돌아보면 그 무엇도 알던 것과 거리가 있었다.


[체헤게, 들려?]

[.....]

뭐라고 전하려는 것 같은 신호는 분명히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내가 그걸 해독할 수 없는 이유는 모종의 이유로 가로막혔기 때문이겠지.


[들리면 말이야, 체헤게 너는 미궁을 돌파해서 그대로 나가.
그리고 입구에서 대기해줘. 나가지도 말고, 들어오지도 말고.
나가기 바로 앞에서  기다려줘.]

[......]

이 정도면 충분했다.
분명 답장이 왔다는 건 저쪽에서도 내가 한 말을 들었다는 의미니까.
심호흡을 깊게 했다.
폐 안쪽의 공기를 싹 내뱉는다.
눈 앞을 가리는 안개를 마신다. 미적지근하던 감각이 날카롭게 식어간다.
손끝에 스치는 감각, 목에 닿는 바람, 안개 모든 것들이 나를 인도하는  같았다.
어쩌면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미로에 발을 들인 이상, 정공법으로 공략하려고 하면 안되는 거였다.


이 미로는 탈출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감금과 안식을 목표로  것이다.
당연히도 원형 미로 내부에 2차 입구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밖을 둘러싸는 원만 디디고 걸어서는 내부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닿는 곳으로 달렸다.
아마 미궁 중심부까지 가려면 며칠 밤을 이렇게 보내야 할 것이다.
주린 배를 부여잡아야 할 것이고, 눈꺼풀을 강제로 밀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뼈와 쥐, 벌레 외에 새로운 대상을 만났다.

"마르커스?"

마르커스로 보이는 옅은 푸른 빛의 인영이 일렁거리며  앞을 막아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유령과 같은 형태는 가만히  자리에서 날 바라본다.

"미안해요. 체헤게는  관리할게요. 정말 고마웠어요."

그 말을 하자 마르커스의 유령은 철퍼덕 쓰러져 사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그리고 몇 걸음  걸어가면 콜로세움에서 내게 편을 만들어 대항하자고 한 남자의 유령이 나타났다.

"난 후회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서 쟁취한 인생이에요.
그래서 더 감사하고 그래서 당신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로 했어요.
고마워요."

그 말에 그 유령 또한 목이 베이듯 갈라져 사라졌다.
조금  걸어가면 내가 기억하는 체헤게가 나타났다.
로봇이 아니라 수백년 전쯤 나를 죽이려고 하던 그때의 젊은 체헤게의 모습을  유령.


"넌 아직이야. 대기 순번 한참 남았잖아?"


그렇게 말하면 조용히 그의 목소리가 울린다.

-내 집착은 사랑이었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유령은 한마디를 더 했다.


-나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만남의 거짓말을.


그렇게 말하고 유령은 바닥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졌다.
나는 의아함을 버려내지 못하고 얼마 못가 주저앉았다.

"좀 쉬어야겠어."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 30분 정도 가만히 앉아서 명상했다.
마력을 몸으로 순환시키면서 피로를 회복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미로를 찾아갔다.
마침내 내가 그 끝에 도달했을때, 거기에는 나와  닮은 것 같은 여자가 있었다.
키는 2m가 조금 안되어 보이는데, 몸에 근육이 자글자글하게 갈라져있고,
벽 끝에 커다란 족쇄와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구속복을 입고 있었다.

"당신이군요."

"흐아...?"


그리고  여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흐리멍텅하게 비어있는 눈동자에 한줄기 빛이 내려앉았다.


"흐...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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