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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망각의 미로 (75/303)



〈 75화 〉망각의 미로

그냥 보기에는 나이는 상당히 젊어보인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 되어보이는 외모.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 외모에서 10년 정도 늙으면 저렇게 될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늙지 않지만.

"으라라라..."


여자는 확실히 언어체계가 다듬어져있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며 독특한 소리를 내뱉어 경계하는 모습이 꽤 독특하다.
발목에 묶인 무게추가 달그랑 소리를 내며 끌린다.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큰 억제효과는 없어보인다.
긴장감에 침을 삼킨다.

주변을 둘러보면 믿을  없는 모습뿐이었다.
이 곳에 홀로 갇혀있던 사람이 있는데, 먹은 음식같은건 보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배설의 흔적도 없다. 그럼에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다가,
다 뜯어져 헤졌다고 해도 구속복이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누군가 지속적인 관리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같다.
내가 그녀를 보고 잠깐 정보를 얻는 사이에 그녀는 내 근처로 다가왔다.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크르르..."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잠깐 잊고 있었다.
콜로세움을 나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새 누군가와 또 싸우게 되는 것은
나로서도 썩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주춤거린다고 변하는 것은 없다.
볼일을 빠르게 마치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역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여기 갇혀있는거죠?"


"으아으...."


그 순간이었다.
명백한 당황. 그것은 나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당황하며 내 손길을 피해 뒤로 주춤하는 것.
그 짧은 순간은 서로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
분명 듣기로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본의아니게 상처를 입게 되는 일도 잦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모습은 명백히 그것과는 달랐다.
나를 피해 도망치려고 하는 것 같은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리고 미로의 돌벽을 기어올랐다.
분명 돌은 매끈하게 깎여 그냥 보기에도 키의 몇배나 되는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데도
어떻게 그걸 집고 기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기회가 내게 주어지면 나는 보기 싫어도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왼쪽 허리까지 크게 베인 것 같은 흉터.
그리고 어깨쪽에 멋대로 크게 찢긴 것 같은 상처.
원인은 제대로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했다.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분명히 그녀가 사람들이 말하던 미궁의 광녀다.


"싸울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저 잠깐 대화를... 하아...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구나.
어쩔 수 없나. 관심을 어디 돌릴만한게...."

바닥에서 돌조각을 주워 마력을 실어 던진다.
휘리릭 날아가던 돌이 그녀의 시야 위로 박힌다.


따악-

머리 위로 날아든 돌이 자신을 맞출  했다는 사실에 멈칫한 그녀는 부웅 뛰어 땅으로 쿵 착지한다.
한치앞을  수 없을 정도로 자욱했던 안개였는데도
왜인지 그녀의 움직임은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선명했다.
놀랍게도 짧은 시간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그녀는 몸에서 생성되는 마력을 등에난 거대한 상처에서 스멀스멀 흘려냈다.
체내에 저장하는 마력 자체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쏟아내는 몸은 분명히 마력회로 자체가 망가졌으리라.


"대체 어떻게 살아있지?"


아마 그녀의 이름은  것 같았다.


"탈린!"


그렇게 외치면 그녀는 나를  눈으로 똑바로 포착했다.


"탈...린...?"

소름이 돋았다.  한마디를 정확히 자신의 입으로 뱉어낸 그녀가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렸다.
탈린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 여자가 탈린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사실이라면, 고작 12년이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인류의 시작부터 이곳에 갇혀있었을지도 모른다.


"탈린....? 탈...리..인...?"

그렇게 이름을 중얼거리다가 내게로 걸어왔다.
발걸음에는 아까보다 훨씬 차분함이 담겨있었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보며 이름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탈린..."

여전히 탈린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그녀는 탈린이라는 이름을 소중하게 부르듯
아련한 눈빛으로 되풀이했다.

내가 그녀의 몸을 만지면 놀라서 뒷걸음치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경계적으로 돵치거나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거면 진전은 있다고 보아야 했다.

"탈린....타알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에 손을 얹는다.
더 정확히는 내 머리 위에. 그리고 왜인지 가만히 서서 탈린이라는 말만 몇 번  되풀이하더니
이윽고 탈린이라는 말도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으아아... 하으아...."


그리고는 다시 꿈뻑거렸다.
나는 바닥에 둥근 원을 그리고 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당신은 아마 탈린일거에요. 나는 에리아에요.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내 말에 다시 흠칫 놀라며 말하는 그녀는 잠깐  눈에 총기를 보였다.

"탈린! 탈린..."


그렇다고 해도 탈린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내게 뭔가를 전해주고 싶은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 말이 무언지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곧 그마저도 잊어버리고 다시 언어 자체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히 나에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있으리라 생각하니
적어도 내게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아는 것 같았다.
본능적인 직감이리라 생각했다.
혹은 이 곳에 처음 갇히면서 느낀 무언가겠지.


나는 바닥에 그린 원으로 마력을 집중해서 위로 천천히 마력의 장막을 이끌어냈다.
안카 숲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력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아예 쓸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이 흩어지는 속도가 훨씬 빠른 것 뿐이었다.

그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마력으로 대기중의 수분과 안개를 이용해
빛을 굴절시켜 거울을 만들었다.

"탈린! 여길 봐줘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린 그녀가 마주한 것은 나, 그리고 거울로 비친 자신의 모습.
그제서야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아무 말도하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몸은 무너지듯 내려앉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 스스로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눈에서 흘러내리는 수분에 당황하는 것 같은 표정.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의 몸이 살짝 빛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파...."


"아프다고요?"


"아파..."


그렇게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반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내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신적으로 아이보다 못한 것 같았다.
기쁨, 슬픔같은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아이들보다 더 까다로운,
감정 자체도 옅어질 만큼 옅어진 상대에게 나는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동을 멈춘 로봇처럼 드러누웠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그녀는 내가 만들어낸 거울을 보고 있었다.

 구속복에 손을 뻗으면 이미 누더기가 된 옷은 너덜거렸다.
구속복으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한다.

"죽어야 하나?"

그때 내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쩌면 이 여자가 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내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자 놀란 것처럼 탈린이 손을 휘두른다.
반응하기도 전에 후려쳐진 손이 복부를 세게 후려친다.

콰앙!


그대로 맞고 날아와 돌벽에 쳐박혔다.
등이고 머리고 몸이 터질 것 같은 감각.
그대로 주르륵 몸이 벽을 따라 기울어진다.
철퍼덕 앞으로 쓰러진 나는 흙바닥에 엎드려있었다.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깨진 것 같다. 후두부가  패인 감각이다.
등에도 멍이 들었겠지.


물론 치료가 불가능한건 아니다.
다만 어쩐지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런 공간이니까.

"으아? 하아악!!"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내게 달려온 탈린은 곧장 미안한 표정을 띄운다.
그리고 내 몸을 어쩔줄 모르겠다는 듯이 더듬으며 말했다.


"아아...아아....아가라아아...."


본능적인 당황의 표정. 문명과 동떨어진 순수한 감정이다.
그리고 나는  몸에 닿는 따뜻함을 느꼈다.
따뜻함. 순수한 마력. 눈을  보니 탈린이 당황하며 나를 메만지는 손에 마력이 담겨있었다.
아마 스스로는 마력을 어떻게 제어하고 통제하는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등에서 새어나오던 마력을 본능적으로 손끝으로 끌어와 내게 뿌리고 있다.
이렇게 하면 덜 아프리라는 것을 아마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놀랐던 것은, 처음에 내 등에 손길이 닿고 마력이 흘러들어왔을 때,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마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내 몸에 닿자마자  몸의 마력과 완벽히 동화된 것처럼 순환하는 것은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고위 마법일 것이다.
그래서 이 여자가  궁금해진다. 대체  여기 갇혀있는지,  말을 하지 못하는지.
다시 마력을 끌어모았다.
어느정도 이 여자가 나를 회복해주는 걸로 기력은 되찾을 정도였다.
아마 탈린이라는 여자도 본성은 착한 것 같다.


내가 그녀의 마력을 역으로 타고 들어가면 그녀의 오랜 기억을 읽을 수 있었다.
마인드리딩이라는 마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아마 아주 오래전이라도 그녀가 기억하는 장면을
나와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 기억은 낯선 장면이었다.
기억의 공간은 텅 비어있었는데, 점차 천천히 밝아지는가 싶더니 곧 흐려졌다.
마침내 내가 그녀의 머릿속 기억을 들여다 보았을 때, 나는 놀랄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것은 미로였다.
나와 그녀가 현재 갇혀있는 미로. 과거와 미래는  공간에 없었다.
그녀의 기억은 온통 뿌연 안개로 둘러싸인 미로 뿐이었고, 약 5초가 지나면 그 기억들도 사라져버렸다.
 미로를 둘러보면 그 사이에 내가 존재했다. 나와 그녀.
 정확히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내 등에 손을 얹고 마력을 부여하는 탈린.
그녀의 기억속에는 이 미로와 자신,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나 뿐이었다.
내가 그녀의 기억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을 때, 연결이 끊기듯 나는 그녀의 기억에서 튕겨져나왔다.
눈을 떴을 때는 머리가 상당히 지끈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쓰러져 그녀에게 마력을 받는 중이었다.


"내가 큰 실례를 했네요. 고마워요. 이 미로는 당신이 만들어낸 거였네요."


"으아으..."

그녀의 기억이 만들어낸 공간. 그래서 기억의 미로인 것이다.
아마 아르간티아가 처음 그녀를 이 공간에 봉인했을때는 미로가 아니었겠지.
무덤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정확하게 탈린의 무덤이다.
그녀 스스로의 기억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있도록 만들어진 고차원 마법의 무덤.
그러나 그녀의 기억은  비어있었고, '영원한 망각'인 그녀는 기억들을 잊어가서
결국 이런 안개낀 미로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리라.

이 공간은 즉, 그녀의 기억이다.
그래서 서서히 잊어가는 것이었고, 어둡고 우울한 감정을 전하는것이었다.
적어도 내 이론은 그랬다.


나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 말했다.

"난  미궁을 둘러보고 싶어요. 당신을 돕는다고 말할수는 없어요.
아직 아는게 너무 부족해요. 그래도 난 탈린, 당신을 알아보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이기적이라는건 알지만, 부탁해요."

그녀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탈...린...."


"네... 부탁할게요 탈린."

"엘....라...."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돌아섰다.
아무  하지 않고 족쇄를 질질 끌며 막다른 골목 끝 벽에 서서 말했다.

"으아으...으아아아아아!!!"


소리는 벽을 타고 지축을 울렸다.
그리고 쿠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 울린다.
땅은 덜덜 떨리고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
5분간 그렇게 떨렸을까. 진동이 멈추자 미로의 지형이 변해있었다.
내 앞에 있었던 탈린에게 가는 길이 벽으로 막혀있었다.
그리고 내 뒤로 새로운 길이 열려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허가를 받은 거겠지.
다시  길로 발을 옮겼다.
내 앞으로 보이는 아까는 보지 못했던 공간.
그리고 천천히 나타나는 푸른 인영들.
이건 내가 알기 한참 이전의, 탈린의 기억이겠지.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나를 기억하는가...

"탈린은 당신을 기억하고 있어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이 미로에 당신이 존재하잖아요."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일렁이는 무언가는 내 뒤로 스쳐지나갔다.
몇 걸음  걸으면 이번에는 상당히 키가 크고 외모가 훤칠한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단아함이 느껴졌다. 이후로는 불길함이 느껴졌고, 그 다음으로는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모양이 일렁이더니 다시 내 앞으로 나타났다. 선명하게 나타난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은 단정했고, 또한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피가 아니라면 너무나도 고급스러워보이는 자였다.


-여전히  사랑해?


"당신을 기억하고 있잖아요. 이렇게나 선명하게."


-말뿐이라도 고맙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희미해져 사라졌다.
그리고 또 몇 걸음을 더 걸으면 바닥에서 솟아나온 장발의 남자가 나타났다.


-내 억지에 널 끌어들였구나. 미안하다. 그래서 넌 내게 오지 않는 거겠지.

"아직 사과할 준비가 안된 것 뿐일거에요. 기다리면 분명히 찾아갈 거에요."

-그런가... 웃으며 기다리지. 부디 천천히 오길.


그렇게 말하며 장발의 남자는 다시 땅속으로 사라진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존재감은 그 뒤로도 수백, 아니 수천, 수억의 유령들이 있었다.
그 많은 유령들이 그의 존재감 하나에 가려져있었다.
유령들이 땅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나는 앞으로 걸었다.
맞은편에서 남자가 하나 걸어왔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색채가 있는 사람이다.
이 공간에 두 발로 걸어들어온 자였다.
금발의 남자. 적당히 호감형인 미모의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너구나. 네가 탈린의 마음을 돌린거구나. 그래, 그게 네 운명이지."


"날 알아요?"

"알고말고."

"당신은 누구죠?"


"난, 탈린의 오랜 친구야. 넌 탈린의 기억을 본거지?"


"네. 봤어요."


"난 그걸 볼  없었어. 그건 잊혀진 기억이거든."

"무슨 소리죠? 당신이 누구냐고 묻고 있잖아요."


"음... 그건 다음에 만나면 가르쳐줄게. 앞으로 계속 걸어가렴. 네 로봇 친구가 기다린단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뒤로 걸어갔다.
바람을 타고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를 구해줘서 고마워. 고화수는 잘 마셨어."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고화수!
 전혀 기억도 못하고 있었을까.
왜 처음 보는 사람 같았을까.
말하기 전까지는 느끼지도 못했는데
알고나니 그가 전에 가게에 왔던 손님이라는게 느껴진다.
등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대체... 뭐였지...."


나는 터덜터덜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반쯤 부서진 것 같은 체헤게가 있었다.

"체헤게!"


[아, 왔나... 늦었군.]

"왜 이런 꼴이야?"

[아아, 도저히 나갈 길이 안보여서 말이지, 돌벽을 기어오르다가 떨어졌다.
그래서 좀 부서졌지.]


"아이고... 그래, 고생했다. 이제 나가자."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너도 본거야? 금발의 남자?"


[금발의 남자? 나는  기억이 없다.]

"그래... 그렇겠지."

나는 체헤게를 데리고 미로를 탈출했다.
확연히 걷힌 안개는 우리가 나갈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나왔네."

[나는  모르겠다. 들어간 기억이 없다. 그래도 몸이 부서진 걸로봐선...
그래, 네가 드디어라고 하는 걸 보니 잘 끝난 거겠지?]

"당연하지. 가자. 우리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미로를 빠져나오면 놀랍게도 시간은 처음 미로에 발을 들였을 때로부터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어쩌면 정말 망각의 미로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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