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오래된 집착
우리는 미로를 빠져나와 한참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미로는 아까보다 짙은 안개가 깔려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는 모르겠다.
[이제 어디로 갈 거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퀘트로네스에서 엠페레스로 가는 항구가 있다던데."
[아, 그 순환선 말이냐.]
"그래."
[그럼 우리는 엠페레스로 가는건가?]
"아니, 우선 그 전에 널 먼저 고쳐야지. 대장간으로 가자."
[대장간... 대장간이라... ]
"퀘트로네스 서쪽으로 가야할것 같은데."
[어려운 길이 되겠는데. 지금 보면 확실히 오른팔이 움직이질 않는군.
오른팔과, 다리가 찌그러져서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
"그러니까 가자고. 생각같아서는 엠페레스로 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바로 갈 수가 없으니까
우선 대장간에서 수리부터 해야할 것 같아. 그러고 나면 마르커스씨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테니까.
그러고 나면 엠페레스 동쪽으로 가면 오르그가 있다고 했으니까 그쪽도 들르자고."
[상당히 시간이 걸리겠는데. 가는 길에 이야기나 듣지. 그 안에서 대체 뭘 본거냐.]
"뭘 보았느냐라... 그래 중요한 이야기이긴 해. 가면서 이야기 할까."
[동쪽으로 한없이 뻗으리라 생각했는데, 서쪽으로 방향을 꺾으려니 난감하군.]
"고작 그정도로 난감하면 안될걸. 지금부터 더 난감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
[난감한 이야기?]
"미로 안에서 너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첫 만남의 거짓말이라고.
무슨 소린지 잘 몰랐어 처음에는. 그런데 잘 생각해보니까 떠오르는 게 있더라고."
[첫 만남의 거짓말이라. 잘 모르겠는데.]
"분명히 맨 처음 내가 널 유령으로 되살려냈을 때 너는 분명히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내가 누군지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죽인 마녀가 너무 많아서 잘 모르겠다고."
[그랬다.]
"그런데 같이 다니면서 보여준 네 행동은 정 반대였어.
나를 죽이지 못했다는 것도 스스로 알고 있었고,
날 잡을 사냥꾼은 너밖에 없다고 스스로 당당히 이야기했었지."
[그래.]
"나는 왜 아무 생각 없이 의심하려 들지도 않았던 걸까.
너는 날 알고 있었어."
[중간에 떠올랐다는 말을 하면 믿어줄건가?]
"미안하지만 안돼. 우리가 이전에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던것 기억해?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난 유령은 뇌가 없는데 기억을 어떻게 보전하는가에 대해서 말했었어."
[언제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콜린에서였지. 그때 너는 분명히 내게 말했어.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사후를 회상하면서 마녀의 주술로 되살아나면서 기억이 군데군데 비어있다고."
[아아, 그랬지. 문제가 되나? 난 그 군데군데의 기억에서 널 잠시 잊은 것 뿐이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잊은 것 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거야?
네가 말했잖아. 기억은 불안정하다고 말해놓고, 죽기 전의 상황은 기억하고 있지.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하면서 몬갈리오의 이야기도 했지.
그리고 분명히 알고 있잖아.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그 부분의 기억만 없다는게 말이 안돼. 다 알잖아?"
[그래, 알고 있지. 더 숨겨도 의미는 없겠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마녀의 주술로 되살아났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무슨 소리지?]
"내가 널 살렸다고 했을때, 난 너를 어떻게 살렸는지 이야기하지 않았어.
주술인지 마력인지 혹은 아티팩트인지도 말한 적 없었다고.
다시 물어볼게. 너 어떻게 안거야? 그리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진짜 이유가 뭐야?"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
"중요해. 지금 미로에서 내가 들은 것중에 지금 찾아갈 수 있는 제일 가까운 해답이야."
[그래, 말해주지. 나는 회의감에 빠져 있었다. 알고 있었겠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일은 보람이 없었다.
나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살인자였으니까. 그 당시에 그건 옳은 것이었다고 하지만
분명히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그건 살인일 뿐이라는 걸.
내가 죽었던 날의 이야기를 해주지.]
"죽었던 날?"
[그래. 나라고 뭐 편하게 늙어죽을만큼 착하게 산 것도 아니니까말이다.
걸맞은 결말이라고 보는게 자연스럽겠지.
내 나이 마흔을 넘기고 였을까.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다.
내가 마녀를 모두 죽여버렸으니까. 물론 너를 놓치기는 했지만 마을은 평화로웠다.
마녀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고 다들 생각했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많은 여성을 죽여버렸다는 점이었지.]
"여성을 그렇게 많이 죽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그 당시 죽은 마녀라고 국가에서 조사했을때는 60명 정도 나오지 않았나?"
[그랬지. 60명 정도. 국가에서 일처리를 그렇게 허술하게 할 리가 없다.
정확한 수도 판별하지 못하고 정도라는 말을 쓰는 나라가 있을리 없잖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147명이다. 내가 죽인 사람들만 말이다.
죄책감이 사라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죄책감은 남는다.
믿던 말던 상관은 없다. 그렇게 죽인 여자들이 꿈에 나오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곤 했다.
처음에는 괜찮아질거라고 생각했다. 금방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던 여자들이
꿈에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저주의 말을 뱉어낼 때매다 나는 그저 부정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신병을 얻었다고 해도 되겠군. 그 당시에는 정말 대인기피증도 생겼었으니까.
집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다. 모두가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그런 내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는 나를 사랑했다. 나 역시도 그녀가 필요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순탄했어도 인간적으로는 서로 곪아있었던 거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사무적이고 회의적인 일상의 반복에 서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서로 늙어가면서 나이탓을 하고, 이럴 시기는 지났다고 말했지.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버티는게 익숙해졌고, 아내는 그저 그런 나를 간호하는 것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때 내가 생각한 것이 너였다. 네가 만일 그때 내게 잡혀서 죽었다면. 그랬더라면.
내 인생의 반은 너에게 투자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내보다 너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투자했다.
그렇게 했어야 내가 옳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죄책감을 명성으로 덮고 싶었던 나에게는 절실한 일이었다.]
"나를 죽였어야 했다는거지? 하아... 참 뭐라고 말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는데,
난 그래도 괜찮았을 것 같아. 어쩌면 나도 한편으로는 느끼고 있었으니까.
나에게 그만큼의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어.
어쩌면 그 다른 인연의 가능성은 나든 혹은 너든 누군가가 잘라낸 거겠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죽지 않는 다는걸 확인하고서도 나를 끝까지 따라오던 사냥꾼은 하나뿐이었고
그래서 나도 네 생각이 문득 났기 때문에 널 되살렸는지도 모르겠어."
[관심이 집착으로 변하는 것은 생각보다 멀지 않다. 난 오래 전부터 해갈되지 않을 집착을 하고 있었지.
내가 죽은 것은 어느 겨울이었다. 492년의 눈내리는 날이었지.
아내는 그날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했지.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사실 믿지 않더라도 내게 손해가 될 일은 하나도 없었기에 큰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 날도 꿈자리가 사나웠지. 눈을 뜨면 같은 천장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땀을 닦고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늘 밖에 나가보고싶으니까.
그리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허무함이었다.
나를 최고라고 치켜세워주던 이들은 금새 나를 잊었다.
이미 평화로워진 마을에는 내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지.
그때 나는 동네에서 쑥덕이는 여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나는 마녀사냥꾼이 아니라 정신병자인 폐인이 되어있었다.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그래도 내 마음 한구석에 남은 서운함은 어쩔 수 없더군.
그리고 나는 몬갈리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녀가 떠올랐다.
내가 잘 한걸까 하고 몇번이나 물었다. 대답은 돌아올리가 없지.
그러나 스스로 이미 답을 내렸지. 그럴리가 없지 않느냐고.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말이다.
결국 몬갈리오도 그 소녀도 내가 죽인 것 같았지. 나는 뭐든 죽일 수 있었다.
그걸 긍정해주는 인간이 내 옆에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분위기에 취한건지도 모르지.
누군가가 나를 긍정해준다는 그 사실에 눈이 멀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내가 마지막까지 죽이지 못한 것은 너 뿐이었다. 너, 그리고 후회 뿐이었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엽총을 입에 물었다. 그게 내 인생의 전부였다.
죽은 이후로 안식이 주어질 거라고 했던가. 그런건 내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사후세계라는 것은 너무나 허무했다. 똑같이 왕이 존재했고, 죽은 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자신 스스로는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상대는 그 누구라도 알지 못하지.
당장 연인, 부모, 자식, 원수. 그 누구를 만나도 서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 얼굴을, 목소리를, 키를, 감정과 성격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데도
막상 눈 앞에서 구별하지 못하지. 눈 앞에 있는게 그 상대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내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와 왕 뿐이었다.
그들은 그 공간을 네메시스라고 불렀다. 네메시스의 왕 말고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공간을 메우고 있는 영혼일 뿐이었고 주체로 존재하는 것은 그 하나 뿐이었다.
우리를 구분하는 것도 그 하나 뿐이었다. 우리를 구별할 수 있는 자 역시 그 하나 뿐이다.
그때 나는 네가 생각났다. 에리아. 너만은 나를 기억하리라 믿었고
또 너만은 나를 추모해줄 수 있을 거라고 헛된 희망을 품었다.
그래야 내가 해둔 행동들 모두가 의미를 가질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내 앞에 작은 줄이 내려왔다.
줄을 잡았을때, 눈에 보인 것은 너였다. 네가 그 줄 끝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줄을 잡고 악착스럽게 기어올랐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시간은 무의미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너무나 생생하게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게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그건 분명히 주술이었겠지. 널 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집착당하는 감정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는걸 알았어. 결국 규율은 어겼구나.
죽음을 발설하는 죄는 무거워. 알고 있었던 모르고 있었던 결국 똑같은 벌을 받게 되지.
네 자리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괜찮다.]
"아무래도 우리, 죽음이라는 것. 그 네메시스의 왕을 한번 만나봐야 할 것 같은데."
[어째 너랑 있으면 일이 편하게 풀릴 일이 없군.]
"다행히도 네메시스라고 하니까 짚이는게 있거든."
[아는게 있다는 의미냐?]
"아르간티아의 아버지, 도르테우스. 네메시스의 수장이라고 했어.
아마 내가 알기로는 유레크로스에 도르테우스의 신전이 있었으니까 거기로 가봐야겠네.
뭔가 알아낼 수 있겠지."
[유레크로스로 가겠다고? 지금 이 상황에 말인가?]
"별 수 있어?"
[아니다... 가 보지.]
대장간으로 가기로 하면서 안카숲을 다시 지날 용기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이 티리시안 산맥을 넘기로 했다.
며칠 밤낮을 거치고 나서야 미리타엔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오자마자 거리는 생각보다 북적대고 있었다.
미리타엔에서 차를 구해서 티리시안 산맥까지 가려고 했는데 바뀐 분위기가 낯설어 멈춰서게 된다.
"여기 무슨 일이 있었나?"
[어...? 저건...]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너머를 바라보면 노예 하나가 족쇄가 매인채로 커다란 말뚝에 묶여있었다.
이미 얼굴에 난 상처는 진물이 흐를 만큼 짓물러 고름이 맺혔고,
몸에는 생채기가 잔뜩 난 채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표지판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적힌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이 자는 반란을 모의하여 황궁으로 노예를 이끌고 습격을 강행하였기에
이자를 묶어 이 곳에 걸어둔다. 무기류의 사용은 일절 금한다.
일주일 후, 이 자가 숨이 붙어있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그 밑에 적힌 이름이었다.
에반제인 플로라라고 적힌 이름에 그녀의 고상한 사인이 적혀있어 모를 수가 없다.
그녀는 정말 여왕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도도하고 잔혹한 여자가 되어있었다.
그녀의 미모는 더욱 물이올랐고, 그녀에게 청혼하는 자들 역시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요구를 거절했다.
사람들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자가 황제라면 둘째는 플로라, 셋째는 고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고양이를 늘 데리고 다닌다고 말하기도 했고, 고양이를 모욕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인다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이전의 어리숙한 이미지는 벗어버리고 이제는 가학공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그것도 그녀가 선택한 길이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적당한 차량을 구매하고 서쪽으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