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불행할 권리
차량은 한참을 달려 티리시안 산맥에 도착했다.
산맥은 아주 두껍고 높은 돌산이었다.
아무도 그 산에 쉽사리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비로소 더 높아 보이는 그 산은
높디 높은 그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무령께서는 정말로 저 산을 넘으실 생각이십니까?"
고용한 운전수는 내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왜? 무슨 문제 있어?"
"그런게 아닙니다. 단지 오르신다고 하실까 하여 이런 것을 준비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차의 화물칸에서 긴 로프와 정을 꺼냈다.
"혹시 지금이라면 특가로 사실 수 있으신데..."
"괜찮아. 로프도 정도 있어. 너 아주 천상 장사치구나?"
"하하... 그러믄입죠... 이래뵈도 수 년간 그 가학공 에반제인을 상대로 담배 유통권을 받아냈는데요."
"오... 그래?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타바토이옵니다 헤헤..."
"타바토?"
"그러믄입죠! 그 가학공의 면전에서도 기죽지 않고 의견을 관철하고 담배를 구긴 남자라고 불러주시죠."
"담배를 구겨?"
"아무리 대공이라고 해도 터무니 없는 값에 유통되는 담배를 막으려 하시기에
제가 그렇게는 안된다!! 평민들이 담배를 원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했습죠.
그렇게 부당하게 유통해서 서민들과 귀족들의 혈세를 버리게 하느니!
피우지 않는것이 합당합니다!!! 그렇게 말입죠.
옳은건 옳다고 말하는 남자다 이말이죠."
"호오?"
"물론 그 댓가로 저는 담배의 유통과정에서 빠지게 되었지만은...
그래도! 그 목소리를 내는게 대단한 것 아니겠습니까요..."
"너, 작위는?"
"평민이옵니다요."
"너 용케도 살아있네."
"글쎄, 다른 상인들이 그렇~게 죽이지 말아라 죽이지 말아라 간청하는 바람에
그 천하의 가학공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요~!"
"푸흡... 그래, 알겠어. 수고해."
"아 알겠습니다요. 이 타바토! 잊지않고 또 찾아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요!"
"그래. 가봐."
그는 그 길로 차를 몰고 돌아갔다.
[가만 둘건가?]
"왜, 내가 뭐라도 해줘야해?"
[아니, 플로라를 생각해서 이거니 저거니 해 줄거라고 생각했다.]
"놔 둬, 플로라도 이젠 가학공이라잖아. 내가 손해본 것도 아닌데 놔두면 어때."
[상당히 너그러워졌군.]
"그보다는 저 산맥을 어떻게 넘을지나 고민해보자고."
[계획보다는 일단 올라가는게 어떤가. 고민할 시간에 말이야.]
"그래, 가 보자."
산은 생각보다 오르기 쉬운 산이었다. 초반에는.
점차 가파라지기 시작하는 산등성이는 점차 로프와 정으로 벽을 찍으면서 올라가야 했다.
[참, 누구 덕분인지 편하게 오르는군.]
"그러게. 이런걸 챙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결국 전부 뽑아온게 생각보다 유용하게 쓰이네."
산은 돌벽으로 되어 있어서 정을 찍는 것도 상당히 어려웠다.
까딱해서 힘 배분을 잘못하면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한쪽 다리, 한쪽 팔 모두에 힘을 주고 올라야 했다.
손이 바르르 떨리긴 했지만 어떻게든 기어오르려고 하니 못 오를 것도 아니었다.
중턱쯤 도달했을 때, 체헤게가 말했다.
[여기서 더는 못 올라간다. 이 이상부터는 지반이 물러서 정을 꽂아 넣어도 내 무게를 버틸 수 없을거다.
다른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군.]
"하아... 그럼 여기까지 왜 기어올라온거야?"
[미안하군.]
나는 다시 꽂아넣은 정을 하나하나 떼면서 내려갔다.
파인 구멍은 손가락도 쉬이 들어갈 크기였다.
바닥까지 내려가면 위에서 뽑아 던진 정들이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이게 뭐야, 괜히 위로 꽂으면서 올라간다고 벽에 구멍만 뚫어놨잖아."
[그럼 옆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러고 보니 티리시안 산맥 옆으로 대장간으로 돌아가는 샛길이 있다고 했었지."
[샛길은 남쪽으로 있다고 했는데, 아마 지금은 산맥에 가려진 것 같은데.]
"운전사를 보내지 말걸 그랬나봐."
산맥을 돌아걷기 시작했다.
차로도 밤낮없이 8시간을 달렸는데 이제서야 걸으려니 왠지 오히려 피곤이 쌓이는 것 같았다.
산맥을 따라 빙 둘러 걸으면 아마 이전에도 이 근방에 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의 동료였던 산악대장 젠을 기억하며.
-젠, 오늘따라 네가 그리워. 기어이 티리시안을 정복하지 못했구나.
-네 아내 소피는 걱정마. 내가 잘 돌봐줄게. -너의 절친한 친구 브루스.
-소피는 브루스와 재혼했어. 불쌍한 새끼. 기어이 아내도 친구도 잃었군.
"참 세상에는 우스운 일들이 많네."
[신경쓰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확실하군.]
산맥 옆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초소가 있었다.
산을 파내고 그 내부에 시설을 가져다 놓은 정도의 초소였다.
다 낡아 떨어져가는 초소는 이제 누구도 지키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앞에는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너덜거리는 판자로 만든 출입구가 있었다.
우리가 그 앞을 지나갈 때, 그 앞으로 나타난 것이 수염이 더벅하고 잘 씻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인물들로 구성된 산적이었다.
남자는 그렇게 보였고, 그 뒤로 나이들어 보이는 노파 하나와, 살이 쳐진 후덕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작은 꼬마 아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들 역시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 앞을 지나가려면 자릿세를 내야 한다. 보아하니 돈 깨나 만지는 것 같아 보이는데,
순순히 두당 5델을 낸다면 그냥 보내주지."
"내가? 그냥 순순히 길을 터. 굳이 힘을 쓰고 싶지 않아."
"길을 터라? 누구에게 건방지게 명령하는 거냐. 나는 법 위, 그리고 신 옆자리의 검이야!"
"신의 옆자리든 법 위의 남자든 상관 없어."
"하, 말이 통하질 않는군. 죽어라 그럼."
그는 허리춤에 달아둔 검집에서 곡도를 뽑아들었다.
휘어진 날이 나를 가리킬 때 체헤게가 내 앞으로 슬쩍 나선다.
"메카닉이다 이거냐... 개같은년이..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거지?"
"메카닉이든 아니든 지금 나는 내 앞을 막지 말라고 말했고,
그걸 듣지 않으니 무력을 행사할 뿐이야."
"무력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다.
그건 여기 있는 꼬마도 알고있지."
"맞아!"
작은 꼬마는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고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시선을 피하지 않는 내가 두려웠는지
앞서 나온 산적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그 뒤로 숨어서 오들오들 떨었다.
이제 막 5살 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아이는 그렇게 나를 바라보다가 혀를 내밀고 베에~하고 말했다.
"딸이야?"
"그런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렇게 보면 알겠네. 저기 저 노인은 어머니일거고, 거기 뚱보. 너는 뭐야?"
"나...나는 형님의 오른팔...!"
"오른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다 쓰러져가는 산적단이 무슨 오른팔이야.
가족관계 아냐?"
"동...동생입니다."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면 수염이 덥수룩한 산적이 그를 타박했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딸내미 보는 앞에서 산적질하고 그러면 창피하지 않아? 차라리 도와달라고 말을 하던가.
가족을 길거리에 앉혀놓고 씻지도 못해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제에 솔직하지도 못해서
딸을 그렇게 강도질에 가담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그건..."
"저 경비 초소에 누가 있었는지나 말해봐."
"거기 있던 자는... 죽었다...!"
"죽었다고?"
"그렇다. 우리가 죽였지!"
"참 요즘에는 누굴 죽였느니 누굴 때렸느니 하는 이야기를 참 아무렇지 않게 한단말야.
그게 자랑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텐데. 딸이 보고 배워 이 아저씨야.
애도 산적으로 키울거야? 애한테는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거 아냐?"
"ㄷ..닥쳐라!"
"어휴..."
나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금화를 5개 꺼내 던졌다.
바닥에 짤랑이며 떨어지는 금화를 보고 후덕한 인상의 산적은 그걸 줍기 시작했다.
"야이...! 그걸 주우면 어떡해 임마!"
"그치만 형님, 우린 이 돈이 필요하잖수..."
"그런다고 그 돈을 주우면 우리가 뭐가 되냔 말이야 임마!"
"체면이 돈보다 중요해? 체면 차리고 죽으려면 계속 그렇게 있던가.
적어도 아이한테는 당당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거 아냐?"
"이...이 아이는 행복하게 살게 할거요! 적어도 그러려면 자기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세상의 더러운 꼴도 못볼 꼴도 결국 보게 될 거고! 그래서 내가 산적이 된거고, 이 아이에서는 그 대를 끊을거요!
이 아이는 불행한 나처럼 되지 않게 할 거란 말이오!"
"좋은 생각이네. 못 볼 꼴 다 보고 행복해지는거. 환상같은 이야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적어도 아빠에게서 마주하는 것만큼은 피했어야지. 정말 딸을 생각한다면."
"이..이 애는 행복할거요."
나는 무릎을 낮추고 아이에게 물었다.
"얘야, 이름이 뭐야?"
꼬마는 빽 소리를 질러 나를 거부했다.
바닥에서 모래도 한 줌 쥐어 내게 뿌렸으나 얼굴 위로는 맞지 않았다.
"아빠가 모르는 사람한텐 이름 가르쳐주지 말랬어!"
"똑부러지는 아이네."
"우리 애는 행복해져야 하오."
"꼬마야, 넌 행복하고 싶니?"
"응..."
"행복의 기준이 뭐야?"
"기준...?"
그렇게 소녀가 망설이는 사이 건달이 소녀를 뒤로 물리며 성질을 냈다.
"우리 아이에게 이상한 걸 묻지 마시오!"
"꼬마야. 행복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려. 불행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지 마."
"불행할...권리?"
"뭐 그건 나중에 아빠랑 잘 이야기해보렴."
그렇게 말하고 나는 살짝 미소지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수염비 덥수룩한 산적을 바라보고 말했다.
"잘 생각해봐. 뭐가 딸을 위하는 건지. 행복이라는건 뭘 위한거고,
왜 행복해지려고 하는지. 무게를 견디기 전에 왕관을 왜 쓰려고 하는지 먼저 생각해봐.
너무나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타척인 척은 혼자 다 해놓고
결국 딸한테 못 보일 꼴을 하고 있었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그 사이로 지나갔다.
산적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 뒤로 노파가 내게 팔을 뻗어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누구기에 그런 말을...."
"글쎄... 불행할 권리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일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산을 에둘러 걸었다.
산을 한참을 둘러 걸어도 여전히 길은 멀었다.
능선을 따라 걸으면 완만한 경사로가 나타났는데,
결국 그것도 꼬박 3일을 걸어야 했다.
주변에는 야영을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남긴 쓰레기나 식량 쓰레기 등이 남아있었다.
쓰레기를 굳이챙겨 줍지는 않았다. 그럴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야 했으니까.
대장간을 굳이 가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하필 이 로봇은 쓸데없이 세밀하게 찌그러져서는.
그냥 휜 거라면 모르겠지만, 휘어서 팔이 움직이지 못하고 다리로 균형을 잡지 못하면
내 수준으로는 처리가 쉽지 않다. 조금 짜증이 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일단은 걸어봐야지.
[불행할 권리? 그건 또 뭐냐.]
"왜, 그런 이야기 있잖아. 도박 중독자들이 끝끝내 집도 차도 없을때 노예 계약을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그건 다시 말하면 그 순간의 쾌락을 위해 자신 스스로를 팔아버린다는 의미지."
스스로 불행할 권리를 선택한거잖아. 어찌보면 근시야로 인한 맹점일 수도 있지만
그는 스스로의 의지로 계약을 체결했어. 이후 결과에 따라 불행해질 수 있겠지.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 그 가능성은 배제했어. 물론 느끼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노예계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그 권리를 박탈당하니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하다고 봐.
우선은 그래. 누구와 성관계를 맺던, 누구를 좋아하건, 누구에게 집착하던.
자기 감정을 어떻게 표출하던. 결국 그게 인간성 아닐까.
그걸 잃으면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한다고 봐. 그 잘못된 선택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거야."
[불행할 권리라.]
"세상에는 반드시 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어.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선하지는 않아. 결국 완벽한 건 없고.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하나의 쾌락이라도 더 알고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도록 돕는거지.
책임은 '누군가는' 질 테니까. 또 혹시 모르잖아? 불행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하는 경우.
아까도 그랬지. 스스로 산적질을 하며 불행한 인생이라고 말했지만 딸은 행복하게 해 주려고 한거.
자신이 불행해질 권리는 누려놓고 딸에게서 그걸 박탈했어.
너무 건방진 일이지. 무릇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실패, 좌절, 고통과 포기. 모든것을 배워야 할 아이에게 그 기회를 박탈하는건
어른으로서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잘 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