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거짓의 신화
스팅우스는 들고있던 나배주의 병을 벽에 던져 깨버렸다.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이 산산이 부서져 튀었다.
"그 여자는 자신은 정당한 대결을 원한다며 반지를 녹여버렸다네.
나는 알고 있었소. 그 반지를 만드는데 마르커스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마르커스가 주저앉았소. 그때 그 충격은 상당했을거요. 버려진 반지와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
그리고 그 위에서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헤세리티와 수장이 있었으니까.
마르커스는 곧장 일어나 달렸다네. 더 늦어서는 고백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
반지를 다시 만들어야 했겠지. 그러나 이미 그는 가진 재산이라고는 다 털어 반지를 만들 재료가 없었소.
그리고 그는 결국 책상 한구석에 굴러다니던 놋쇠조각을 녹여 반지를 만들었지.
백조와 해의 모양을 본땄고, 그 눈은 유리로 조각했소.
아름다운 반지요. 놋쇠라는 것 말고는 어떤 흠잡을 곳이 없었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말이요. 하지만, 그가 준비했던 반지보다는 훨씬 못 미쳤소.
그래도 아직 그 정도라면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겠지만서도, 안타깝게도.
고백은 실패했소. 아주 대차게 망해버렸지.
사람들을 모으기 전, 이미 헤세리티는 그 반지를 들고 먼저 재클리나에게 찾아간거요.
마르커스가 자신에게 고백했다고, 이미 자신과 혼약을 했다고 말이오.
마르커스가 뒤늦게 재클리나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실망해 떠나버린 후였지."
그렇게 말하고는 스팅우스는 내게 말했다.
"혹시 미안하지만 서랍에서 술 한잔 더 꺼내주겠소?"
나는 그에게 술을 꺼내 건넸다.
"이번에는 던지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노력해보리다. 아까 일은 사과하지.
재클리나가 떠난 후에 마르커스는 스스로 기계파에 상심하고 수장을 하지 않겠다고 단언했소.
수장이 된다면 기록을 도관 속으로 던져넣어 불태우리라고 못박아버렸고 말이오.
그 이후로부터는 수장과 마르커스의 입씨름이 이어졌소.
하지만 변화는 없었고 결국 수장은 헤세리티를 수장으로 인정해버리고 말았소.
마르커스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해놓고 말이지. 그리고 20년이 지났소.
재클리나가 돌아왔지. 딸아이를 데리고. 이미 둘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한 40대 중반이었네.
그녀의 이름은 재클리나 베일슨에서 재클리나 프리스트노브로 바뀌어 있었지.
둘의 재회는 너무나도 어색했고, 또 싸늘했소.
그 광경에 모두는 생각했다오. 대장간을 버리고 고백하려 한 마르커스를 재클리나가 버렸다고 말일세.
또한, 헤세리티가 그렇게... 모두에게 말했거든. 마르커스는 버림받았다고.
그래서 자신이 마르커스의 반지를 녹였다고 말하면 모두 마르커스를 동정했지,
헤세리티를 욕하는 사람들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오.
그때 마르커스는 대장간을 떠나려고 했소. 눈에 생기가 없었고,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 같았지.
그런 그를 막아세운것이 재클리나였다오. 짧은 대화였소.
부탁이 있다고 했고, 말해보라고 했지. 그게 전부였다네.
오해의 골이 너무나 깊어졌지만 서로 그걸 해소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고 있던 거요. 약혼했다고 말한 남자는 여전히 독신이었고,
자신을 속였던 여자는 수장이 되어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잖은가."
"...."
"한마디였소. 단 한마디. 내 딸을 제자로 들여줘.
이유도 밝히지 않았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억지로 딸을 마르커스에게 맡기고 떠났다네.
그리고 그녀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소. 왜 딸을 맡겼는지는 여전히 모른다오.
아마 그녀 본인이나 딸만이 알고 있겠지.
불쌍한 마르커스는 그 부탁을 받아들였소.
그 아이를 제자로 들였지. 제자라고는 하나도 받지 않던 그는 그렇게 스승이 되었소.
아이는 대장간을 원해서 온 것이 아닌 것 같았지. 쉽게 말해 소질이 없었소.
본인도 흥미를 그다지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아이가 대장간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은 5년이 조금 안되었을 때일거요."
"그 아이가 헬렌이군요."
"그렇다오. 알고 있었나보오. 헬렌이 대장간에서 떠나겠다고 말하자마자 마르커스도 짐을 챙겨 함께 떠났소.
나는 그 빈집을 정리하다 줍게 된 거요. 이 녹슨 반지를."
그가 목에 걸고있던 목걸이를 들어올리자 목걸이 끝에 달랑거리는 백조 조각의 놋쇠반지가 있었다.
"참 안타깝다고 생각한다네. 그는, 행복했는가... 난 그랬으면 좋겠네.
이 반지는 내가 속죄의 의미로 가지고 있었지.
자네가 가져가게. 이 반지는 내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네."
"그런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고 하지 마세요.
반지가 더는 부끄럽지 않게 되면 그때는 그걸로 마르커스를 추억해주세요."
"그렇군... 고맙네...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좀 낫군."
"그런데 스팅우스씨는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시죠?"
"난 배신자였으니까 말이야. 마르커스의 제일 친한 친구이면서,
그의 신뢰를 받아놓고 반지의 위치와 재클리나와의 약속을 헤세리티에게 흘린
더러운 쓰레기니까 말이지... 적어도 떠나는 그에게 결국 한마디도 해주지 못했군."
"드릴 말씀이 없네요."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게."
"아뇨, 욕보다는 그냥 가만히 관조하겠습니다. 벌은 제가 주는게 아니니까요.
전 그럴 자격도 없고요. 이미 벌을 받고 계시는 중 아닙니까?
그냥 제 의뢰를 받아주세요."
"그래, 사람을 모아보겠네. 이정도면 대충 5일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어디서 묵을 생각인가? 마땅히 장소가 없다면 내 자리를 알아봐 주지."
"고맙습니다."
"후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체헤게를 수리할 사람을 찾았다.
차세대 수장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인물을 모았다며 내게 만족하느냐고 물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에서 5캐럴 지폐를 꺼냈다.
"여러분이 빨리 고칠수록 더 많이 드리겠습니다.
현재는 5일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일 단축할 때마다 1캐럴씩 올려드리죠. 물론 그렇다고 대충 떼우시면 안됩니다."
"5...5캐럴..."
"나...나 저 여자 알아... 제국의 무령이야..."
"씨발... 그런 여자가 여기까지 왔다고..?"
웅성이는 소리가 잦아들 쯤 내가 웃으며 물었다.
"하실 수 있죠?"
"""네!!!!"""
상당히 열이 붙은 것 같다.
나는 미리 준비한 돌에 영혼회로를 그려놓고 체헤게의 영혼을 옮겼다.
그리고 나서 그들에게 본체를 맡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다시 1층으로 올라오면 내 앞에는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헤세리티가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많은 인원들이 따라 서 있었다.
"지금 뭘 하고 올라오는 길이오?"
"의뢰를 맡겼습니다."
"누가 수장의 허가도 없이 의뢰를 착수했는지 몰라도 가만 두지 않겠네.
대장간은 그대를 환영하지 않네. 분명 축객령을 내렸을텐데 어째서 아직 여기 있는가?"
"대장간의 종파는 셋으로 아는데요. 기계파의 수장이라고 하시면서 대장간의 수장인 마냥 행동하시네요.
그리고,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나이도 어린게."
"뭐...뭣? 저자를 잡으시오! 부정한 영기술사요!"
그녀의 옆에서 기술자들이 망치나 끌, 혹은 연장을 들고 나를 둘러쌌다.
나는 말 대신 손을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빙 둘러본 후에 싸울 생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직접 만든 에스테리카를 꺼내 컵에 따랐다.
"여러분들 고생하시는 거 저도 다 알아요.
저는 대장간에 손님으로 왔습니다. 친구가 만든 로봇을 고치고 싶어서 말이죠.
혹시 기계파의 수장이면 여러분의 생업을 통제할 수 있는 겁니까?"
"닥치시오! 우리 기술자들에게 말을 걸어 선동하려 들다니!"
"선동이라니, 그냥 묻고 있잖아요. 무기 하나도 없는데 연장부터 빼들고
여자 하나를 둘러싸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후우... 뭘 원하는거요?"
"말하잖아요. 이 아래에서 수리중인 내 로봇이 고쳐지면 가겠다고."
그렇게 말하자 이들역시 웅성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무엇이 그리 문제냐고 말하는 여론이었고 개중 일부는 영기술사라는 말만 가지고도
나를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헤세리티님, 아까 드렸던 말은 전면 철회하겠습니다.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지셨더라구요? 사랑을 짓밟고 올라설 정도면 뜨거운 자리겠네요 수장이라는 직책도."
"스팅우스.... 기어이...."
나는 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저 여자의 본성을 모르는건가?]
[그렇겠지. 굳이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 엉망이 될 테니까.
나는 계획대로 몸이 고쳐지면 받아서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상관 없어.]
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확연히 달라진 관계에서 연장을 든 기술자들을 물려보내며
헤세리티가 나에게 말했다.
"그대는... 누구요?"
"나도 그게 궁금해."
"자신이 누군지 확신할수 없는 이라, 의문은 들지만 말이네.
일단은 자네가 소집한 그룹을 내가 임의로 해체할수는 없잖은가."
"그렇지."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소.
자네의 영기술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기술이네. 알고 있겠지만 말이지.
솔직히 마르커스가 내놓은 답이 정답이 아님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분명 그 로봇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말도 내게는 영 헛소리로 들리지 않으니까."
그녀는 술을 꺼내 한바가지를 깊게 퍼서 마시는 중간에 말했다.
"내가 취한건 신경 쓰지마시게. 어느 정돈 생각할 수 있는 정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그리고 체헤게를 돌아보며 말했다.
"기술자는 어떻게 더 구할 수 없어?
"기술자가 모두 한가한건 아니니까 말이오."
"그렇기야 하겠지. 한가한 기술자를 모아달라는 말이었어."
"더... 낯짝이 두꺼워지셨소. 어째 잠깐 못 본 사이에 더 대담하시고,
이미 포섭은 해 두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 이건가?"
"이쪽도 쓸만한 무기를 찾았으니까."
"스팅우스... 그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오?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그대에게 독이 될거라고 생각하오만."
"아니면 뭐 어때? 너나 나나 이 바닥에 진실은 없는 것 같던데."
그녀는 주먹을 쥔 손으로 바닥을 쿵쿵 찍으며 말했다.
울분을 표출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배려해줄 아량은 없었다.
"내가 그걸 허용할 거라고, 아니. 모아줄 거라고 생각하시오?"
"그럼 됐어. 지금도 모으기는 했으니까.
더 모이면 내가 더 빨리 대장간을 뜨겠지."
"거절하겠네.
이 시간부로 기계파기술자들은 자네를 돕지 않을 것이오.
스팅우스. 그 자는... 하아... 머리가 아프군. 이만 돌아가 보겠소."
"에헤이, 말이 안끝났는데 어딜 가려고."
"무...슨...?"
"그 창백한 피부에 키가 컸다는 남자 이야기. 더 해봐, 궁금해졌으니까.
죽음의 기운이라는걸 보통 일반적으로 느끼기는 어려운 일이잖아?
들을 수 있을 때 들어둬야지."
"왜 그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서 좋을 이야기가 아니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소."
"판단은 알아서 할게. 말만 해."
"아주 확고하시군. 좋소. 말해드리지.
그건 12년 전이었다오. 아직 내가 수장이 되기 이전의 일이었지.
그날은 달이 유난히 밝게 뜬 날이었다오. 시각조차 기억하고 있소.
밤 11시 27분, 내가 우연히 작업 중에 물을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이지.
그는 대장간에 홀연히 찾아와 물었다네.
혹시 엘라 세리타인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느냐고."
"잠깐, 엘라 세리타인?"
"그렇소."
머리가 아팠다.
지끈거리는 감각 속에서 무언가 가능성이 떠오른다.
분명하다. 망각의 미로 내부에서 보았던 그 창백한 남자.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히 탈린의 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 혹시 피를 흘리고 있었나?"
"아니, 피는 흘리지 않았소. 오히려... 피를 부리더군.
38명. 그가 한번 휘두른 손길에 죽은 기술자의 수요.
온 몸에서 피가 빨려나가 말라 비틀어져 죽어버렸지.
그렇게 기술자들을 죽인 후에 말하더군.
엘라 세리타인을 찾고 있다고 말이야."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남자가 탈린의 기억속에 남은 그 사람이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요.
자기가 그렇게 말했다오. 그리고 혹시 나중에 엘라 세리타인이라는 여자를 찾는다면
자신이 기다리겠다고 말해달라고 했었소."
피. 그리고 죽음. 어쩌면 나는 이 남자를 찾아내야 하는게 아닐까.
내 기원이 그곳에 있을 것 같다는 아련한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