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불타는 대지에서도 사랑은 꽃피우는가
"계속 말해줘. 그래서 그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는 뭘 했는지."
"그는 막 자리에서 일어난 내게 말했소.
혹시 이곳에 엘라 세리타인이 오지 않았느냐고.
나는 오지 않았다고 답했소. 대장간에 찾아온 손님이라면 명부가 있을테고,
기술자라면 내가 모를리 없었으니까.
그 당시 대장간에서는 늦은 시간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기에
우리 모두 그가 상당히 바쁜 용무가 있으리라 생각했소.
그리고 그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소.
그 남자는 그저 찾으러 다니던 길에 대장간에 들렀다고 말했다오.
나는 여자의 정체도 남자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네.
사실 손님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그다지 반갑다고 생각지도 않았다오.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던 것도 인정하지."
"퉁명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나한테 하는 태도를 보면 알아."
"하아.."
그녀는 말없이 또 사발로 술을 퍼 마셨다.
벌컥이며 들이키는 호쾌한 성격을 보면 대장간의 거친 환경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더랬소. 이 곳은 신성한 기술의 현장이고,
끝없이 배우는 이들이 모인 곳이라고, 시덥잖은 연애 감정을 가지고
기술자의 공간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지 말라고 말이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는 나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네. 그리고 말했지.
지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네.
아까운 시간을 38초 빼앗겼다. 라고 말했다네.
그리고 그는 대장간으로 걸어들어갔네. 나는 그를 막아세우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지.
나는 그의 허리춤을 꽈악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그에게 끌려 들어가는 형국이었소.
그는 정말 가차없게 나와 일하던 동료들을 손짓 한번에 죽여버렸소.
눈과 코, 입에서 피를 뽑혀 말라가기 시작하는 동료들의 모습은 시시각각 변해갔소.
그 피는 마치 수채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물처럼 그의 손을 통해 빨려들어갔소.
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말이지. 그는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 나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오.
정말 누구라도 그 표정을 보면 반해버릴 것 같았다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두려운 감정이지만, 나는 그때 한순간 그 남자에게 홀렸다오.
사랑이라는 감정과 동떨어진, 그러나 강렬하고 거부하기 어려운 감각.
그건 말 그대로 홀렸다고 보는게 맞을거요.
흔들다리 효과라고 하던가? 공포로 인해 그런걸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나는 거부하지 못했지.
그는 그런 내 모습을 비웃듯이 말했다오.
정말 여긴 오지 않았군. 이라고.
나는 정신을 쥐어짜낼 것 같은 심정으로 소리쳤소.
내 동료들을 돌려내라고 말이오.
아아... 그 순간은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오... 아아..."
그녀는 부르르 떨며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진정되지 않은 것 처럼 두려워하며 바르르 떨어댔다.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겨우 부여잡은듯 말하는 그녀의 아래로 축축한 웅덩이가 생겼다.
고작 떠올린 것 만으로도 이렇게나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고?
"하아... 그는... 손을 뻗었소. 그 손은 가는 섬섬옥수였지.
내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는 멍하니 손을 쳐다보는 내게 말했네.
동료들은 여기 있다고 말이오.
손등의 잔근육이 일그러지고, 그 위로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하나같이 괴로워보이는 표정이었다오.
절규하는 망자와 같았지. 남자는 날 보며 말했다네.
오래 전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말이야. 피는 곧 생명이라고. 그렇게 말했다네."
"피는 곧 생명이다...엘라 세리타인... 아...!"
머릿속을 채찍질하듯 스치는 기억의 편린. 아주 옛날, 내가 기억하기 이전의 무언가를 겨우 낚아챈 것 같았다.
어쩐지 느껴지는 그리운 감정. 그리고 에스트로가 날 알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느껴진다.
"뭔가 떠오른 것 같군. 아무튼 우리는 그 남자를 증오하고 있소.
생명을 담보로 부리는 능력이라니. 나는 그 책임마저 순진한 기술자에게 돌리는
그 더러운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단 말이오.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모욕할 수 있소?"
"뭐 듣기좋은 말인건 인정하는데,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있어?
이야기만 들으면 너도 어지간히 쓰레기야."
"그건 모두를 위한거였지. 대장간에서 기계파의 명맥을 끊을 수는 없잖소.
나는 그런 일로 마르커스가 수장직을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소.
난 둘 다 전력으로 대결하고 승자를 가리고 싶었지.
그리고 지금도 나는 그를 뛰어넘지 못한 것 같단 말이오."
"그런건 스스로 생각하고, 제안을 다시 하지.
내 로봇을 고치는데 힘을 빌려줄 생각은 여전히 없나?
마르커스씨의 유작이 이젠 내 로봇 말고는 없을텐데."
"우리는 경쟁자였지, 동료...그가 나를 동료라고 생각했는지 난 잘 모르겠군.
내 눈앞에 지금 그가 전력을 다한 작품이 있는데, 그걸 돕는다?
솔직히 말하지! 배알이 꼴리고 참을 수가 없소! 여전히 넘어서지 못할 벽이니까!
당신이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길 바랐소! 그런 완벽한 작품을 들이밀면
내 패배감이 더 증폭될 뿐이니까! 나는 정당하게 이 자리에 서고 싶었소.
또, 그렇게 하려고 했소! 마르커스가 도망친건 내 계획에 없었단 말이오.
이제 와서 죽었다고? 유작을 남기고? 그게 압도적인 기량의 차이로 다가올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겠소? 불쾌하오! 그리고 역겹소!
왜 신께서는 내가 아니라 그를 택하신 것인지! 그리고 왜 다시 내 눈앞으로 그의 흔적을 들이미시는지!
오히려 그가 지레 겁을 먹고 떠났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내가 병신 머저리 같소!
그런 유작을 당신이 더럽힌거요! 영혼을 가둬? 미친소리! 그딴게 생명이라고?
난 그런건 인정할 수 없소!"
"하아... 그래.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니 오히려 후련한데."
"난, 로봇을 만들거요. 그딴 구식 스팀엔진 대신, 내가 개량해낸 전기 엔진으로.
순혈성? 집어치라지. 기계파, 땜장이파, 회로파 모두를 모아서 그 로봇을 뛰어넘는 걸작을 만들겠소!"
"체헤게를 뛰어넘겠다... 영혼이 담겨있는 걸작을 만들지 않으면 불가능할걸.
아 물론 말장난이야."
"체헤게? 로봇의 이름인가?"
"그래."
"3일만에 이뤄냈다고 했나. 나는 2일. 2일만에 만들어내리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기어이 술독을 들어 벌컥벌컥 마셔대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하아아아악!!!"
"괴짜라더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네."
"괴짜는 없소. 죽어버렸지. 그대의 말대로요. 집착할 대상이... 사라졌거든."
"뭐?"
"어디까지 스팅우스에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는 내 욕심도 있었소.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그에게서 반지를 받는 모습같은건 보고 싶지 않았거든.
혼약... 그렇게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야기는 끝이오. 사라져 주시게."
"그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했다.
[사랑이라는게 참 여럿 피곤하게 하는군.]
"저게 사랑같아보여? 저건 집착이야."
[플로라가 생각나서 익숙하던데. 플로라는 사랑이고 저 여자는 집착인가?]
"헤세리티랑 플로라는 다르잖아?"
[다르...겠지...]
체헤게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돌조각에 갇혀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너도 이번 기회에 로봇 여자친구라도 만드는게 어때? 저 아주머니가 만들어 주신다잖아?"
[로봇끼리... 어울리긴 하는군. 자식새끼하나 못보고 가는 것도 우습고.]
"농담이야. 널 그렇게 간단히 놓아줄 수는 없거든. 이것도... 집착인가?"
[소유욕이지.]
"그래, 소유욕이지."
그렇게 대장간의 1층에서 대기하고 있었더니 한 여성 기술자로 보이는 자가 걸어왔다.
그녀는 유난히 키가 작았다. 아돌퍼스와 비슷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는데,
외모가 상당히 둥근 편이었다.
"에리아님 되십니까?"
"맞아."
"반갑습니다. 스팅우스 오빠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장간에서 여관을 하고 있는 네네미라고 합니다."
"반가워. 너는 다른 기술자들이랑 말투가 다르구나."
"아, 저는 기술자가 아니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말투라거나 행동이 옮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할 줄 아는 기술도 없고, 공방으로 내려가지도 않으니까요.
나이도... 젊은 편이잖아요? 후후 안내해드릴게요. 따라와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네네미는 토실토실한 몸으로 통통 튀듯 뛰어갔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가면 커다랗게 벽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갔다.
구멍은 마치 여관의 복도처럼 길게 뚫려있었고, 그 옆으로 수많은 구멍이 뚫려 문이 달려있었다.
"여긴 여관이에요."
"직접 뚫은거야?"
"아뇨, 공동이 생긴거에요. 도관이 하나가 터져버린거죠.
화산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낸 구역을 저희가 보강한거에요.
땜장이파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었죠.
그래서 이 구역은 자연스럽게 생긴 방이라서, 큰 방, 작은 방 같은 것들이 나뉘어져 있어요.
어떤 방이 좋으신지 고르시면 알려주세요."
"적당히 괜찮은 방으로 줘. 오래 있지는 않을거야."
"음, 그러면 6번 방으로 가시겠어요?
나름 아늑하고, 근처에 마그마 도관이 있어서 따뜻해요."
"그거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땜장이파 친구들이 제대로 보강해 두었으니까요.
지금껏 14년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그리고 마그마라고 해도 거리가 꽤 멀어요.
한 50m 정도는 떨어져 있다고 말했으니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에요.
그리고 혹시나 해서 방 가장자리에는 계단식으로 바닥을 파 뒀으니
점성이 강한 마그마라면 그 안으로 고일거에요. 그런 상황까지 온다면 열기로 아실테고요."
"뭐 이런 방이..."
"그래도 가격은 다른 방에 비해서 70%는 저렴해요."
"하아... 다른 방으로 줘."
"알겠습니다. 그럼 12번 방으로 가시겠어요?"
"그래, 거기도 매물이 이상하지는 않겠지?"
"넓고 비싸서 그래요. 하룻밤에 1델 정도 나와요."
"델? 왜 그렇게 비싸?"
"요즘 불경기잖아요. 먹고 살기 힘들어요 요새.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무령이시잖아요?"
"벌써 이야기가 다 퍼졌어?"
"네. 대장간이 아무리 고립되어있는 지역이라지만 소식통 하나는 빠르거든요.
러너들이 있으니까요."
"러너?"
"대장간에서 고용하는 민첩한 아이들이에요. 대장간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기술자로 일하지만,
종종 저나 러너들처럼 생계에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러너는 각자 파견되는 지역으로 가서, 정보를 수집해오는 아이들이에요.
100m를 11초 내로 달릴 수 있는 아이들이 선발되는데, 장로님께서 선발하세요.
러너 말고는 저처럼 여관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샵, 그리고 기타 직종을 담당하는 사람들인 니더들이 있어요.
"니더?"
"수요에 따른 공급을 책임진다는 의미에요. 정치는 장로님과 수장님들께서 하시니까요.
저희는 그냥 맡은 자리에서 일할 뿐이죠."
"대장간은 기술직이 정치를 병행하는거였어?"
"네. 그런거에요."
"참 이 나라도 재미있는 곳이네."
"대장간은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의 마을이자 도시죠.
도시 정도의 경제체제나 법체계는 없어요. 여러모로 부족하죠."
"그래도 꾸준히 수요는 있잖아? 불경기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설명이 복잡한데, 여전히 수입은 많아요.
한달동안 대장간의 평균수입을 10이라고 가정할게요.
원래 대장간에는 10명의 사람이 있었으니까 각자 1씩 나누면 되는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장간 자체에 워낙에 인프라가 잘 갖춰져버려서
인구가 20, 30씩 늘어버린거죠.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입은 그대로인데,
나누기가 어려운거에요. 그래서 부의 재분배는 고사하고 모두가 공멸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젊은 기술자들은 기술을 배워서 빨리 대장간을 뜨는 것이 목표죠.
수장님들과 장로님이 막고 계시지만 욕구를 그리 간단히 잠재울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개중에 탈주하는 사람들이 나오곤 하죠. 메카닉이나 영기술사로 나가던가,
아니면 유레크로스나 아라카스트 쪽으로 나가는 거에요."
"장로님이 누구야?"
"은퇴하신 수장님중에 제일 나이가 많으신 분이에요.
매번 그렇게 교체되죠. 은퇴한 수장님들 중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이으세요.
대장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신 정치를 담당하세요.
원칙적으로는 대장간에서는 권한이 없지만, 전관예우라고 할까, 아니면 존경이라고 해야 할까.
모두가 그분의 말씀을 듣죠. 지금 장로님께서는 도토크님이세요.
드워프시죠. 덕분에 장로직을 40년째 하신다고 들었어요.
대장간은 드워프들과 인간이 공존하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나면서 인간과 드워프의 경계가 모호해졌어요.
저도 드워프의 피가 많이 섞여있어요."
그제서야 나는 이들의 작은 키의 이유를 알았다.
[정말 위대한 사랑이군. 종족차도 뛰어넘다니.
분명 그 작은 드워프가 상대라면 상당히 조여들겠군.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긴 한데.]
[체헤게!]
[아니, 집 크기라거나... 물건 같은 거나... 문화차이로 인한 심리적 압박 말이다...]
[어휴... 성욕이 대체 어디서 솟아나는거야? 이미 근간이 없을텐데.]
[영혼에 새겨진 본능인가보지. 난 그 순간만이 다른 모든 죄책감과 후회를 잊을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사랑받는다는 감각? 혹은 채워진 충족감? 어떤 이유에서건 여러 이유로 중독성이 짙었으니까.]
[진지하게 핑계대지 마. 그런건 그냥 변태라고 하는거야.]
[인정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