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기술자들
그가 알려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상당히 긴 길이었다.
지하 5층은 최하층이었고, 그 이전에 입구를 지키는 니더들이 있었다.
내가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그 앞에서 니더 하나가 내 앞을 막아섰다.
"손님, 이 앞으로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십시오."
아무래도 샵이나 니더들은 상대적으로 거친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헤세리티수장님께 볼일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허가할 만큼 그렇게 가벼운 문은 아닙니다만.
급한 용무가 있으시면 따로 전해드리지요."
"그럼 에리아가 뵙기를 원한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음... 알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전해드리지요."
그렇게 말하고 니더가 사라지면 난 그 앞에서 다른 니더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저기, 감사합니다."
"감사라고요?"
"이야기는 러너들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갇혀있던 제 친구를 구해주셨다고요."
그 말은 아마 칼데라로 무너지는 화산 아래 매몰되었던 인간 중 하나였겠지.
신경을 쓰고 한 일은 아니었다. 잘 생각해도 빚을 지워둘 생각으로 했겠지 싶은 정도였다.
그래도 뭐 이런 식으로라도 결과를 봤으니 다행이었다.
"그냥 사람이 갇혔다니까 꺼낸거죠."
그 말 한마디에 주변에 있던 니더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호감을 사기에 충분할 것이다.
"대장간에 찾아주셔서 다시금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도 되게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감사하지 않으셔도 돼요."
"겸손하시네요."
"그냥... 제가 없었어도 큰 차이 없었을 거에요."
적당히 말을 붙이며 그들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야기를 전해주겠다고 했던 니더가 돌아왔다.
그는 돌아와서 내게 말했다.
"들어오시죠. 헤세리티님께서 출입을 허가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들은 다시 문을 틀어막고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헤세리티는 이미 다른 기술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기다릴 정도로 나를 신경쓰지는 않는 모양이다.
"헤세리티님, 그래서 말입니다. 이번에 그런 의뢰가 들어왔답니다."
"어떤 미친놈들이 악기를 그렇게나 쓴다던가..."
"이번에 캐럴본을 대량으로 만들어달라고 합니다. 악기를 이번 기회에 정비하고 공연을 준비할 생각이랍니다."
"어디서 요청하던가?"
"악단이라고 합니다. 악기를 가르치기도 하는 교향악단이라더군요.
새로운 인원이 많이 들어와서 충당하기 위함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180대는 많지 않나?"
"그렇게는 생각합니다만 일단 의뢰는 받아둔 상태입니다. 선금으로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장로님께서도 이정도면 일단 불경기 기술자들에게 보상을 할 수 있을거라고 추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대장간이 더 알려지면 의뢰가 늘어날지도 모르잖습니까."
"어차피 그런 홍보는 일시적이라고 말하잖은가.
어차피 대장간을 찾는 자들은 모험가들이고 무기를 손본다고 말하지.
그깟 악기 몇 대 만들어준다고 그들이 우릴 찾겠는가?
좋은 기술을 갈고 닦아서 고작 악기나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라네."
"하지만 수장님!"
"그 많은 황동은 누가 감당할건가? 대장간의 비축분이 캐럴본 180대를 만들 정도로 넉넉한가?"
"아슬아슬하게 그렇답니다.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충당가능하답니다.
유레크로스에서 양에 맞춰 수입을 해 오면 되는 정도입니다.
필요한 물량이라고 해도 2~300kg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진행하게. 하아... 얼마나 걸리겠나?"
"최대한 빠르게 납품한다고 가정했을 때, 4일 정도입니다."
"4일? 빠르군?"
"네. 캐럴본 정도는 기계파, 땜장이파가 둘 다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 없습니다.
물론 금관악기라서 재료가 엄청나게 들어가긴 하지만."
"유레크로스에서 물량 확보는 했소?"
"그 건에 대해서 러너들이 미리 협상 관련해서 니더들을 동반하고 유레크로스로 떠났습니다."
"만족스럽군. 좋소. 반드시 기계파가 땜장이파보다 더 많이,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수장님. 이미 발빠른 녀석들은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말에 헤세리티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그 앞으로 들어서면 헤세리티가 나를 보고 픽 웃으며 말했다.
"올 거라 생각했다오. 보시오. 나는 벌써 대략적 윤곽을 잡았지.
보이는가? 이게 내 체헤렌이라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보이는 로봇은 내가 수리를 맡긴 체헤게의 몸체보다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곡선이 부드럽게 내려온다는 의미가 로봇의 재질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산뜻해보이고 가벼워보이는 이미지가 있었다.
"이건 정말 대단하네."
"그렇지. 대장간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이오.
이건 두번 없을 걸작이 될거요. 그대의 로봇, 체헤게라고 했던가?
그런 구관을 뛰어넘기에 아주 적합한 녀석이지.
보게, 이 많은 기술자들이 나를 돕고 있다오. 그대의 로봇에게 밀릴 턱이 없잖은가."
그 말대로였다. 기술자 열댓명이 모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회로파 기술자들 역시 로봇의 전신을 아주 세밀한 전기회로로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걸 어디서 볼 기회가 흔치는 않으리라 생각해 눈으로 새겨놓았다.
스팅우스와 함께 작업하던 이들마저 이곳으로 끌려와 노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헤세리티는 단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부실한 부분은 물론이고 개선이 가능한 부분이 하나라도 존재한다고 판단하면 즉시 직접 나서서 손봤다.
"아쉬운 부분이라고는 너무 기계가 신식이라는걸 빼면 없는 정도요.
온도에 민감하거든. 전추석을 쓸 수가 없다오. 그래서 무한동력을 이뤄내기 어려웠지.
일단은, 태양열 에너지를 기반으로 자력으로 충전하는 배터리를 내장하고는 있지만 말이네.
이 로봇은 기록에 남을거요. 분명 최고로 말이야."
"축하합니다. 정말 대단한걸 만들어 버렸네요.
그런 기술력이 있으면 내 로봇을 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신경전 같은 쓸모없는 일에 열이나 올리고."
"하하하! 당연하지. 누가 뭐라고 한대도 난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마르커스를 뛰어넘는다는데 내가 포기할 성 싶겠는가.
그리고, 자필로 추천서를 써 주었잖은가? 네버브레이크가 도와줬을텐데?"
"성희롱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 알지. 그 남자는 변하질 않는군. 나는 그런 시선을 받은 적이 없네.
보면 알겠지만 나이가 들어도 아직 가슴에는 자신이 있거든.
아, 실례했구려. 괘념치 말길 바라오."
그렇게 말하는 헤세리티의 표정에는 명백한 조소가 섞여있다.
나보다 얼마 크지도 않으면서 이 년이...
"아무튼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로봇이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큰 상관은 없지만 들어둬서 나쁠 이야기는 아닐거야."
"호오? 그렇게 말한다니 들어보고 싶군, 무엇이오?"
"곧 C4구역이 생길지도 몰라."
"음 그렇군.... 그 말을 믿으라는거요?"
"바로 믿기 힘들다는건 알아."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정보라고 거래하기에는 그대의 신뢰도가 많이 낮소.
게다가 우리에게 칼데라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닐텐데?
그리고, 이곳에서 이야기하긴 좀 많이 개방적이군. 따라오시게.
자리를 옮길 필요가 있을 것 같소."
나는 그녀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공동이 생각보다 너무 넓어
작업 중인 기술자들과 거리가 상당히 벌어졌음에도 여전히 공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공동의 구석으로 밀려나고 나서야 그녀가 내 말에 노골적인 적의를 보이며 말했다.
"칼데라? C4? 장난하는 건 여기까지요.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소릴 내게 함부로 꺼낼 수 없소.
C3지역의 사고를 도왔다고 해서 그 무게가 가볍다고 여기지 마시게.
나는 그대를 은인으로서 대우하고 있는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축객령이 아니라 배척이 되겠지."
"믿는건 자유지만 아직 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
잘 들어. 누군가가 테팔레스 화산을 의도적으로 분화시키려고 하고 있어."
"이건 또 무슨... 테팔레스 화산은 그렇게 터트리고 싶다고 터트릴 수 있는 규모의 작은 화산이 아니오.
더구나 도관을 자체적으로 휘어잡고 있는데 누가 감히 화산을 터뜨린단 말인가?
우리는 마그마를 옮기기 위해 이 공간을 계획했다오.
언제라도 저기 보이는 게이트를 열면 마그마가 이 공동을 메우겠지.
대장간이 그렇게 대비없이 오랜 시간을 버텼을 거라고 생각하오?"
"대비를 강화해서 나쁠 건 없다는 이야기야."
"음... 그래, 긍정적으로 검토는 하겠소. 이야기는 그게 다요?"
"일단은. 로봇 만드는거 힘내라고."
"혹시 내가 그대의 물욕에 불을 지핀 것은 아니길 바라오."
"난 앤틱한게 좋아서."
"그럴 것도 같았다오."
나는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다시 체헤렌을 바라보았다.
로봇은 체헤게와 다르게 섬세하고 세밀한 부분이 많았는데,
여성형의 바디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흉부에 엔진이 있는건 동일해도 배터리팩을 같이 달아서 상대적으로 돌출되었다.
농담이라도 체헤게에게는 주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기서 할 말을 마쳤으므로 다시 1층으로 올라가 본관에 있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지쳤기 때문에 별다른 말 없이 방에 돌아와 객실에 딸린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
내 몸은 여전히 너무나 깨끗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상처 하나 흉터하나 진 적이 없는 몸은 반을 잘리고도 총을 맞고도,
불에 타고도 찍히고 뚫려도 금방 재생하고 만다.
내가 얼마나 험하게 굴러도 아무리 재생을 막아본대도 결국 언젠가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 몸.
콜린에서도, 제국에서도, 얼마나 힘들었건 생각하지 않고 지워버리는 이 몸이,
내게 너는 한 없이 순결해야 하는 존재라고 강제하는 것 같았다.
발을 욕조 끝에 담근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온도가 발가락에 닿는다.
작은 발. 발가락 사이로 물이 스며든다. 천천히 담그는 발은 그 뜨거운 물 속으로 삼켜진다.
고깃덩이. 아주 비루한 고깃덩이여야 할 육체는 성녀의 그것보다도 깨끗하다.
아름다운가? 아니. 그것은 결단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감각을 뒤흔드는 열기가 발목을 감싼다.
발목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오금으로, 다시 허벅지로.
물이 점차 차오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내가 그 뜨거운 속으로 집어넣는 다리다.
발을 뻗은 것도 나고, 뜨거운 것도 나다. 누군가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건 아주 피상적인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변태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인생을 살았으니까.
"후우..."
욕조에 몸을 담근다.
결국 느껴지는 물이 내 몸을 적신다.
빈약한 가슴. 거짓말로라도 지방은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내게 자애로움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친의 유방이나 젖과 같은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왜 그걸 굳이 돌아가야 할 이상향이자 아득한 그리움, 그리고 희생과 모정으로 치환하는가.
그건 그저 욕망일 뿐인데. 미성숙을 포장하려 든 행위일 뿐이 아닌가.
"가슴... 가슴...."
그래봐야 얼마나 크다고. 플로라가 훨씬 컸었지...
나이도 40줄이 넘어서 말이야, 그런 걸로 꽁해서 놀리기나 하고.
나잇값을 못하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었던가?
말문이 턱 막힌다.
나는 말 대신 그대로 내 머리를 욕조에 푹 담궜다.
숨이 막힐 때까지 정신을 좀 차리자는 의미에서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상한 것만 체헤게에게 옮아버려선, 그런거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었는데...
아까까지는 그래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네버브레이크의 말이 도리어 짜증을 불러온다.
그 변태가... 그딴 취향이나 가지고 말이야... 나한테 욕정이나 하고.
나는 그렇게 작지 않은데... 짜증이 난다.
아직도 나잇값을 못하는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욕조에 머리를 쳐박았다.
고온의 물에 얼굴을 담그고 있어서인지 화끈거린다.
얼굴이 익어버린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