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옥성연 (86/303)



〈 86화 〉옥성연

아침에 눈을 뜬 것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서 적당히 옷을 추려 입고 문을 열면 그 앞에는 네네미가 서 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아, 지난   주무셨나요?"

"어... 나름?"

"다른게 아니고...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나한테?"


"네. 네버브레이크님이요."

"알았어. 금방 나갈게."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뒤적이며 혹시 모를 일에 대비했다.
그럴일이 없으리라 생각을 했지만서도 포션을  챙겼다.
마땅히 입을만한 옷이 없어서 쥐색 후드를 대충 둘러입었다.
너무 오래 입어서 이젠 꼭 피부라도 되는  같다.
플로라가 봤다면 품위를 생각하라고 한마디 했겠지만, 이제와서는 의미도 없다.
역시 이게 제일 편하기도 하고.

옷을 갖춰입고 나서 문을 열고 나가면 네네미는 프론트에 앉아서 나를 발견하고 말했다.


"음... 그 옷은 뭔가요?"

"이거? 글쎄, 이제는 못 구하는 빈티지?"


"확실히 구하기 어려워보이긴 하는데, 낡아보이기도 하고요."

"괜찮아. 튼튼해. 강화를 몇 중으로 했는데."

"꼭 도망다니는 사람들이나 입을 것 같아요."


"그러게. 그런 옷이지?"

"아... 아니...그...그게..."

"괜찮아. 그래서 네버브레이크는 어디있어?"


"자기 집무실에서 기다린다고 한 것 같아요."

"집무실이라... 그래. 알겠어."

내가 그의 집무실로 향하면서  생각은 묘한 불안감이었다.
불길함과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꺼림칙한 무언가.
안그래도 신경쓸 일이 많은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게."


 짧은 말 한마디가 왠지 느끼하다고 느껴진건  기분탓이길 바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는 회전식 의자에 앉은 채로 정장을 빼입고 나를 바라보는 네버브레이크가 있었다.


"저 나가봐도 될까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렇소. 내 그대의 로봇의 수리를 위해 고생했다는 걸 알잖은가?
그 옥성연의 의뢰 기한을 미룰 정도로 내게는 중요한 결정이었단 말이오."


"로봇의 수리를 빌미로 이상한 일을  것 같으니까 그런거죠.
어째 대장간에서 수장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부담스럽네요."

"그런건 사소한 갈등일 뿐이오. 해결할  있지.
대화를 통해서 말이네."


"왜 굳이 그걸 해결하려고 하는건지 모르겠지만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나는 큰 용기를 가지고 여기 그대를 부른거요."


"하아... 그래요, 무슨 용건이죠?"

"나와 결혼하지 않겠나?  대장간에서도 수장직을 맡고있소.
아무리 대장간이 불경기라도 그건 내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오.
그대같은 미인은 본 일이 없소. 더욱이 그 실력이라면 내 아내로 맞기에도 부족함이 없소.
가벼운 생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오. 우린 분명 잘 어울리는 한 쌍이  거요."

"잘 생각하세요. 난 무령이에요."

"신분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오. 더욱이 이곳은 미리타엔이 아니라 대장간이지.
대장간에서는 무령보다 위에 있는 것이 수장 아니던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제국에서 최고로 높을  있는데 여기에 굳이 남을 이유가 없죠."


"아주 화끈하시오. 그 성격 하나하나까지도 너무 매력적이야.
그런걸 썩히기엔 아깝소."


"누가 썩힌대요? 더  말은 없을 것 같은데 나가봐도 되죠?"


"그러지 말고 이야기나 좀 하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말하며  팔을 잡는 그의 악력은 상당히 강했다.
팔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억지로 뿌리친 손이 얼얼하다.

"이러지 마시죠."


"미안하네. 그냥 좀 대화를 하고 싶은 것 뿐이네."

"대화의 수준이 아니잖아요. 싫다고 하는데 이러는 이유가 뭐죠?"

"순순히 대화를 했으면  수 있는 오해를 너무 크게 키우려고 하지 말았으면 하는군."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하는 수 없다. 자각도 없고 말도 안통하고. 이젠 지친다.
그의 이마 위로 손가락을 올리고 환영 주술을 시전했다.
원래 개발목적은 포로 심문용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내가 풀어주기 전까지 환각이나 보고 있으라지.
내게 섣불리 들이댔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는 경험을 골백번 경험하면 반성을 하려나.
그런 생각으로 그에게 주술을 걸어주면 그는 비틀거리다가 툭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의자에 늘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에 조용히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아...살려주시게... 내가 잘못했소... 살려주시게... 살려주시게..."


환각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진 모양이다.
힘을 줘서 소리치는 것도 못하고 몽롱한 정신속에서 악몽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부하가 없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인 부분에서는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는 조심해야 하는 주술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 가만히 앉아서 그의 경과를 지켜보았다.
한참을 몸부림치던 그의 초점없는 눈에 실핏줄이 지고,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흐르면
그제서야 나는 그의 주술을 풀어주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악!!!"

그는 숨을 고르다가 내 얼굴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마치 못볼 것을 보았다는 것처럼 공포로 얼룩진 그 표정에는 더이상 추잡한 욕망은 없었다.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나 아니면 다행이지.

"조용히 하셔야죠."


"하으읍...."


양 손으로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식은땀이 가득한 고개를 끄덕이는 네버브레이크의 눈에는
이미 공포가 한가득 서려있었다.
그러다가 손에 묻는 코피를 보고 나서 손으로 피를 슥슥 닦아내고 말했다.

"아... 미...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반성하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럼 다시 이야기를 해 보실까요?
설마 결혼같은 이야기나 하려고 부르신 거라고 하면 많이 실망할 것 같아요."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면서 말했다.


"아...아니... 그... 대장간에서 정식으로 기술을 배워볼 생각은 없는가 하는 이야기였소...
그 기술은 분명히 엄청난 재능이였소..."

"사양하죠. 그럼 이만."


내가 말을 마치고 뒤로 돌아 나가려고 하자 쾅 하며 문짝이 날아갔다.
폭발로 인한 문의 파손인 것으로 보였다.
근력으로 잡아뜯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네버브레이크! 내 의뢰를 뒤로 미룬 이유가 뭐죠!!"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나와 키가 비슷한정도의 여자였다.
잿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그녀는 이마에 안경을 살짝 걸치고 있었는데,
상당히 단출하게 내려오는 옷을 입고 있었다.
 옆을 빙빙 돌고있는 마력덩어리가 불안정하게 터질 것같이 일렁였다.

"선객이 있는데 상당히 과격하시네요."

"앗... 당신은 누구죠?"

그제서야 진정한듯 나를 보고 멈춰선 그녀를 보고 나는 가볍게 인사했다.

"에리아라고 해요."


"아, 당신이 그 로봇의 의뢰를 맡겼다는..."

"네. 당신은 말하는 걸로 보아 옥성연이겠죠?"


"네, 옥성연 마카입니다."

"마카?"

"교국의 다미아 가문의 3남매중 둘째입니다. 마카라고 불러주세요."

"일단  문부터 되돌려놓으시죠."

"어머? 저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시는 분은 처음 봤네요."


"어쩐지. 오냐오냐 자란건 보이네요."

"오냐오냐? 그럴리가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상당히 입을 함부로 놀리시네요.
그나저나 네버브레이크는 왜 저렇게 널브러져있는거죠?"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모른다고요?"

"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왜 제가 그 짜증을 다 받아드려야 하죠?"


"재밌는 사람이네요. 덕분에 저는 주문했던 오브가 3일이 밀리게 생겼는데요.
옥성연에게 오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는건 아닐텐데요."

"저는 피해자에요. 저한테 따지실건 아니죠?"

대체 왜 혼자 지내려니까 일이 겹치는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래도 뭔가 그렇게 보이는 자체로 화가 나는 정도는 또 아니었는데
아마 나와 비슷한 체형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다 저기서 널브러진 수장 때문이니까 우리끼리 싸우기도 뭐했다.


"뭐 그럼 두분이서 느긋하게 이야기 하세요. 저는 먼저 나가볼게요."


"아뇨, 같이 이야기 좀 하시죠."


왜 얘들은 다들 이야기를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체헤게를 고치겠다고 오기는 했는데, 이래서는 의미가 없는  아닐까.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망가질 것 같다.

"저는 그다지 할 말 없는데요.  달갑지도 않고, 바쁘거든요."

"시간은 언제 나시는데요?"

"글쎄요, 한동안은 안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끊어지고 나는 괜히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21번 레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스팅우스씨와 기술자들이 여전히 고생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내가 구부러진 철골을 비롯한 부품을 펴 놓아서인지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중인 것 같았다.

"어서오시게. 계획했던 것보다 더 빨리 진행중일세. 망가진 회로를 손보는 일도 다 끝나간다네.
이대로 간다면은 아마 4일 내로도 손볼 수 있을 것 같소.
정말 예상치도 못한 성과였지."


"회로는 금방 되나요?"

"회로가 문제였지. 어제 기록을 뒤져가면서 찾아봤건만 문제는 너무 복합적이라는 부분이오.
이제 막 덧셈을 뗀 아이에게 어떻게든 곱셈을 가르치려 했더니
정작 풀어야 할 문제는 지수와 로그라면 어떨 것 같나?
어떻게든 교본을 가지고 와서 풀고는 있지만 정작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이해가 안되는 느낌이라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네요."

"그런데 옥성연과는 아는 사이요?"

"아뇨, 바쁘다니까 계속 따라다니네요."

아까 대화가 단절된 이후부터 나를 집요하게 따라오는 것 같다.
이러다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붙들고 늘어질 것 같다.
굳이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에 무시하고 있는 중이다.
바쁘다면서 왜 내 뒤를 따라오는지는 몰라도 지치면 가겠지 생각했다.

"참, 고생이 많으시오."

"그러게요. 사람을 몰고다니는 타입인가봐요.
역마살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제보면 화개살도 있는 것 같소."


"생각해보니까 그렇네요. 그게 제일 잘 들어맞는  같아요."


"걱정말고 맡겨주시오. 저 친구들도 5캐럴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시키지 않아도 흠결 없이 잘 하고 있소. 완성되면 품질 보증은 확실하게 해 주지."

"고맙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뒤를 돌아보면 아직도 내 뒤를 따라다니는 마카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를 이렇게 무시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지금이라도 순순히...저기요! 야! 무시하지 말라고!"

당연히 지나쳐서 숙소로 돌아왔다.
안그래도 생각할게 많은데 피곤하게 정말.
내가 숙소로 들어가자 얼굴을 붉히는 그녀는 화가 잔뜩 나서 네네미를 붙잡고 말한다.

"나도 방을 줘!  여자 바로 옆 방으로!"

네네미는 당황한 듯 보였지만 능숙하게 장사 수완을 발휘해서  옆방을 내어주었다.
덕분에 상당히 골치 아파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동안 마카는 내 방 문을 두드리며 나를 불렀다.
10분 간격으로 찾아와 방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다른 객으로부터 민원이 들어온 것은 당연하고,
네네미는 제발 조용히 해 달라고 말했고,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카를 방에 들였다.


"그래서 대체 뭔데 자꾸 날 못살게 구는거죠?"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죠?"

"그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네요."


"체내에 마력이 넘쳐요. 아주 불길한 마력이.
그리고 옥성연인 나를 제치고 네버브레이크에게 의뢰를  수 있다니,
그런 사람이 있다는건 듣지 못했어요. 당신은 누구죠?"

"음, 미리타엔 제국의 무령을 맡고 있는 에리아에요."

"거짓말! 무령은 형식상으로 존재하는 직책이에요.
황제가 그렇게 쉽게 지위를 내려줄리가 없어요."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정보력이 약한걸 남탓으로 돌리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성급하고 과격하면서 정보력도 나쁜건 자랑이 아니에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수모를 겪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에요.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명예를 걸고요!"


"걸게 많은데 왜 명예같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걸 걸죠?"


"명예가 무가치...? 당신은 정말 이상해요."


"온실속의 화초는 영양제나 비료가 당연하겠죠.
비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으니까 한계를 모를거고.
결투, 받아드리죠. 죽이진 않을게요. 언제로 할래요?"


이미 주위로 계속 돌고있는 마력덩어리가 날카롭게 벼려져있다.
시각적으로 마력을 구현화하는 정도는 되는 것으로 보아서 상당히 실력이 있다.
괜히 사성이라는 이름이 붙은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가 바로  뒤까지 마력을 쏘아보내도 반응하지 못하는걸 보면 아직 어리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녀가 안경을 내려 쓰며 말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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