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근원적인 차이 (87/303)



〈 87화 〉근원적인 차이

솔직히 여기서 눈에 띄어서 좋을건 하나도 없었다.
일단 적어도 C를 잡고 싶다면 더더욱. 대장간에서 무령이니 사성이니 해서 싸운다는 이야기를 듣고
옳다구나 하고 화산을 터뜨리지는 않을 테니까.
대비할  없는 공격이 치명적인 것인데, 변수를 두고 싶지는 않겠지.
그게 차라리 더 안전할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옳은 일은 아니다.
언제까지나 대장간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굳이 꼭 싸워야겠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어요.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합을 맞춰보는게 먼저라고요.
당신의 오만함을 꺾어드리겠어요."


"나는 눈에 띄어서 좋을게 없는 사람이에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걸어온 결투를 거절하고 도망치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결투...결투라... 애초에 죽일 생각이 없기는 했지만,
죽이지도 않을걸 왜 굳이 싸우나 싶어서요."

"결투가 싫으셨나요? 아니면 이 옥성연의 자리가 탐이 나시는건지요?
그렇게 원하시면  자리를 걸고 싸워드리죠."

"그런건 그닥 하고 싶지 않아서..."

이야기를 하면서 자리를 옮기니 C2지역이었다.
C2지역은 무너져내린 지역의 폭이 넓고 깊이가 깊어서 천연으로 생성된 링과 같았다.
다만 이 부근에서 노동자들이 밭을 일구는 경우는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무너져내린 C2지역에서 퍼간 흙은 좋은 비료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죠. 길게 끌어서 좋을 것도 없고."

"무기를 꺼내시죠. 오브건 스태프건 마법서건, 제가 폼으로 옥성연이 아니라는걸 보여드리죠."

나는 긴 말 없이 가방에서 꺼낸 포션을  던졌다.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포션이다. 바닥의 화산재에 부드럽게  박힌 유리병은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깨지지 않았다.

"이게 뭐죠?"

"죽겠다 싶으면 쓰세요."

"이게 무슨..."


그녀가 포션을 집어드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도 마력을 뭉쳤다.
콜로세움에서는 눈에 띄는게 싫어서 직접 근거리에서 때렸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순수하게 모인 마력을 날리면 상대가 서있던 자리에 날카롭게 박힌다.


"후우, 날렵하네요. 피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뻔 했어요."

"피해? 아닐걸?"


그렇게 말하자마자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등쪽에서 날아온 마력덩어리를 맞고 퍼억 소리를 울리며 무릎을 꿇었다.
이미 등판은 터져서 찢어진 옷가지가 날린다.


"무...무슨...?"

"마력이 피해서 없어질거면 뭐하러 던져? 총 쏘고 말지."

그제서야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한 그녀가 무수한 마력탄을 날려왔다.
오브로 연산속도를 빠르게 해서 던져대는 마력탄을 일일이 피하기에는 내 운동신경이 너무 안좋았다.
내 쪽에서도 마력탄을 지워보겠다고 무효화를 빠르게 시전했지만 결국 다 지우지는 못하고 얻어맞았다.
확실히 아프기는 하다. 그래도, 이걸로 사람을 죽이기에는 멀었다.
나도 경험이 있으니까 연산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브를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오브가 보조할  있는 연산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지정되어 등록한 마법 외에는 보조가 불가능하니까.


마법서는 이미 적힌 마법식을 보고 읽어서 발동하기만 하면 된다.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도구다.
사용이 불편하지만 많은 마법을 저장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느리다.
그에 비해서 스태프는 증폭제에 가깝다. 마법을 스스로 연산해서 발동하면
 효과를 증폭시켜주는 도구이기 때문에 고수들이 사용한다.
머리가 나쁘면 없는 만도 못하다.
괜히 몇 천년  고목을 쓰거나 보석을 치렁치렁 달거나 하는게 아니다.
두 가지 다 요즘에 와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종종 과거의 마법서에서 잊혀진 마법이 나오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위의 물품들이 현대에 와서는 많이 사라진 과거의 유물이라고 하면
오브는 아직까지 실전성이 있는 무기였다.
일반적으로 오브 한 개에 3가지 정도의 마법을 등록해놓고, 생각하는  만으로도
마법을 사용할  있다. 연산을 포기하고 마력량으로 승부하겠다는 것이다.
주력기나 연산이 오래 걸리는 주문을 등록하는게 일반적이다.
마법서든 스태프든 꺼내라는 말을 하는 걸로 보아 공부를 어느정도 한 것 같다.

그런데 말이지, 마력 증폭제는 피가 대신하고 연산은 머리에 의존하고,
마력 자체가 월등하게 되면  모든건 그냥 보조용품에 불과하다.


실력을 알고나니 거리낄게 없어져서 마력을 가볍게 몸에 둘렀다.
이정도라면 더 강한 공격이라면 모를까, 아까와 같은 마력탄 정도는
공기중으로 분해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하아압..!"


이번에는 오브에서 날카로운 마력이 날아온다.
하나정도는 고의로 맞아주고 속성을 파악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피할 능력도 없었지만.
양 팔과 오른쪽 옆구리에 명중한 마력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 전에 끌어들여 분석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서늘한 감각과 깨끗한 마력. 은이다.
자칫 철이라고 오해할 뻔 했는데, 은의 성질을 가지는 마력이라니. 확실히 드물다.

"맞았다!"


그렇게 말하며 거리를 좁히는 그녀의 발이 멈춘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분명히 마나의 창이 찌른  팔과 옆구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했으니까.
구멍이  채 찢긴 후드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얼마나 오래 입은 옷인데, 마력을 부여하면 자동으로 수복되도록 주술을 걸었다.

"환술...? 어느 틈에...?"


"에이, 멋없게 그런건 안써요."

다시 거리를 벌리고 오브에서 빛을 뿜어낸다.
오브에 정화를 등록했다는 의미다. 회복이나 상태이상을 동시에 담당하는 사제의 백마법이다.
역시 교국 출신이라고 사제 정도는 포섭을 해 놓았다는 의미다.
다만 자신의 패를 그렇게 보여준건 감점 요소다. 환술이 걸려있지 않았다는 것도 주효했고.

"대충 다 봤나?"

내 마력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한참을 흩뿌린 마카의 마력을 모으기만 했는데도
벌써 상당한 양이다. 에너지의 총량은 언제나 보존된다.
그걸 일회용으로 사용하면 전력 낭비다.
이정도의 마력에 조금의 충격만 부여해도,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페이백 받아가세요."

그렇게 말하고 마력덩어리를 일제히 쏘아댔다.
놀란 마카가 빠르게 도망쳐보지만  마력 제어는 그정도를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결국 그녀는 쏟아지는 충격에 무릎을 꿇었다.
외상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명백히 충격과 고통은 가해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상이겠지.  많은 마력들이 억지로 안쪽에서부터 마력회로를 찢어내고 있을테니까.

"으아아아악!!!"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를 일으켜세워 등에 들쳐메고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내가 그러지 않고 곧장 마카를 땅바닥에 내부친 것은 다른 충격 때문이었다.

"너...너 남자였어?!"

그제서야 비틀거리던 마카가 고개를 들고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말했다.

"여자라고 안했는데요."

충격적이었다.
저런 긴 머리를 하고, 왜소한 체구에 안경이  어울리는 예쁘장한 얼굴인데
이제와서 들쳐멨더니 허리춤에 닿는 불길한 감촉.
아까까지 느꼈던 동질감이 곧 남자와 비교될 정도로 초라한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하..."


"당신이 이겼어요. 이제 옥성연은 당신입니다..."

"닥쳐봐,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래도 룰이 그런건데요..."

"네가 이긴걸로 해 그럼. 에이 씨발..."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그대로 그를 버려두고 숙소로 돌아갔다.
마력회로를 찢어놨으니 못해도 3일정도는 마력을 쓸 때마다 몸이 쑤시겠지만
적어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


작은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카를 상대로 동질감 같은 거나 팔자좋게 느끼고 있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그럼 한번  하시죠!"

"하아?"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다.
다만 말을 걸어온 마카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는  좋은 표정은 아니라는 거겠지.
나는 다시 무시하고 뒤를 돌아 걸었다.

"제가 자만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내가 대답이 없자 그는 내 앞을 막아서고 다시 말했다.

"제가 자만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 너무 심취해서 당신을 깔보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에리아님. 다시 정식으로 이야기를 할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목소리도 가늘고 여리여리해서  짜증이 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네? 네??"


그는 한결같이 내 뒤를 따랐다.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른 누구에게보다 스스로에게 실망했으니까.

"당신같은 실력자가 왜 지금껏 숨어지냈죠?"


"그 이야기는 밥이나 먹으면서 하자. 네가 사."


"아, 알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대장간의 식당으로 향했다.
어째 하나같이 술집이 지배적이었고,
그 안에서도 판매하는 음식은 대부분 감자니 무니 하는 야채에 종종 멧돼지 고기 정도였다.
그 중 하나의 가게에 들어가게 된 우리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대장간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의자가 낮아서 조금은 불편하게 앉았다.

주문한 것은 맥주에 돼지고기 통구이였다.
맥주를 한 잔씩 나눠가지고 마시기 시작하면 그가 내게 물었다.

"묻고 싶은건 많은데 우선 제국의 무령이라는 말은 사실인가요?"


"나는 그런 걸로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왜 숨어지냈냐고 했던가? 관심 없거든 그런 자리에."


"그렇군요..."

"불길한 마력이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였지?"


"아, 그건 피같은 느낌이 나서요... 저는 선천적으로 마력 감응 능력이 있었거든요.
마력 속성을 감정할  있어요. 가문에서 전해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편리하네 그거. 맞아. 나는 마력 증폭의 매개체가 피야.
실제로도 피와 생명에 관한 마력이 익숙하기도 하고."


"왜 저를 살려주셨는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무슨 소리야?"

"옥성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서 사람들은 저를 죽이려고 해요.
이 이름이 가지는 기대값이 크니까요. 아직까지는 누구에게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쫒겨다니는 삶이 익숙해지는건 슬픈 일이지."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어요.
저는 패배했고, 에리아님이 저보다 더 강하시니까요."

"됐어. 쫒기는건 질렸어. 그래서 오브를 의뢰했다고?"


"네, 네버브레이크는 땜장이파의 수장이니까 제일 잘 할  같아서 의뢰했어요.
그런데 비용은 터무니없게 비싸지, 약속한 일자는 계속 미뤄지지,
재료비는 따로 달라고 하지... 너무 화가 나는 거에요."

"오브 만드는게 얼마나 까다로운지 모르지?"

"만들어 보셨나요?"

"뭐.. 그렇지. 그닥 고성능은 아니라서 6개 정도밖에 등록은 못하지만.
실제로  중 하나는 내가 등록한 마법도 있고 말이야.
오브라는게 마법서나 스크롤에 적히는 마법식을 기록형식으로 옮겨서
구슬 안에 세밀하게 새겨넣는 작업이라서, 기록형 마법에 마법식을 적으면 되는거야.
일반적으로 마력이 있어야 마법이 존재하는 형식인 마법식에서,
마법식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게 만드는 건데, 쉬운건 아니지.
마법식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이니까. 순서를 바꾸는게 말로는 쉬워도 꽤 어려워."


"여..여섯개요?"


"응."

"제가 이번에 의뢰한 오브가 4가지 마법을 등록하는 오브인데요...?"


그렇구나. 오브의 성능 자체가 열화되었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 한번 볼래?"

"네! 보여주세요!"

"그럼 오늘 있었던 일들 전부 사과해봐. 그러면 용서해줄게."

"미리 알아 뵙지 못하고 건방진 언행으로 인해 피해를 끼쳐드린 점 죄송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자만으로 언행을 관리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누를 끼치게 된 점,
마카다미아, 가문의 이름에 걸고 사과드립니다."

"그래, 솔직하게 사과하는건 좋은 자세야.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으면 좀  나은 사람이 되겠지."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가방에서 꺼낸 오브를 내밀었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었던 오브는 미숙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양이었다.
둥근 것도아니고, 괜히 오브는 꼭 둥글어야 하나 하는 반발심에
정사면체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브라는 이름 대신 테트라큐브라고 불렀다.


"이건, 구가 아닌데요...? 아아...!"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브의 성능 정도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감정마법으로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내가 새겨넣은 마법이 아마... 봉인이었나?
일회성이지만 상대가 누구든 자신보다 약한 존재라면 반드시 봉인하는 마법.

"이런게... 존재한다니..."


"그냥 옛날에 만든거야. 별로 필요 없는."

"제가 사겠습니다! 얼마죠?"

"됐어, 뭘 기본도 안된걸 사겠다고. 그냥 가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감사하던 그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 등록되어있는 마법, 요구되는 마력량이 너무 많은데요..?
숙련된 영기술사들 10명은 모여야 쓸 수 있겠어요... 아무리 일회용이라지만..."

"그냥, 고대 유물이라고 생각해."

마력회로 자체가 빈약해서 체내 마력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금의 '영기술사'는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조잡한 마법이라도 사용할 수 있다면 옥성연이라는 칭호를  수 있는 거겠지.

"저도 이걸로 꼭 에리아님 같은 영기술사가 될거에요!"


"나처럼 되고 싶다고?"


"네!"


나는 그의 손에서 테트라큐브를 빼앗았다.
그리고 멋대로 봉인을 발동했다.
마력을 흘려넣는건 굳이  마력이 아니더라도 대기중의 마력을 모아도 되는 일이니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테트라큐브에 마카의 시간을 봉인했다.

"나처럼 한번 살아봐. 모든걸 잃을 자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할게요!"

그는 해맑아서 내가 자신에게 뭘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알겠지. 노화는 없다고 해도 죽을 수는 있으니까 적당히 조심해야겠지만,
적어도 절반은 원하던 존재에 가까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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